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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의 저술
20년의 취재
그리고 600년의 이야기'

이 문구를 보는 순간 '짜릿'했다. '장인.'

28년간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로 일한 김유경과 월간 <샘이깊은물> 출신 사진기자인 하지권이 만든 서울이야기 <서울, 북촌에서>
 28년간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로 일한 김유경과 월간 <샘이깊은물> 출신 사진기자인 하지권이 만든 서울이야기 <서울, 북촌에서>
ⓒ 민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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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떠오른 인물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쓴 마거릿 미첼. 50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단 한 작품만 남겼다. 1926년부터 1936년까지 11년 동안 쓴 작품은 가장 위대한 작품이 되었다.

최명희는 또 어떤가. 그는 1980년부터 1996년까지 17년 동안 자기 몸을 불사르며 <혼불>을 남겼다. 작품 탈고 2년 뒤 세상을 떠난 데서 그가 작품에 쏟은 집념을 느낄 수 있다.

'5년의 저술...'은 <서울, 북촌에서>(민음인 간) 뒷표지에서 본 문구다. 1969년부터 1997년까지 28년간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로 일한 김유경과 월간 <샘이깊은물> 사진기자 출신으로 지금으로 불광출판사에서 우리나라 불교문화를 기록하는 하지권이 만든 작품이다.

마거릿 미첼이나 최명희가 쏟은 정성에 비하면 '5년'이란 기간은 짧을 수 있다. 하지만 패스트푸드와 같은 작품이 넘치는 요즘, 20년 동안 취재한 기록이 책 한 권으로 묶여 나왔다는 사실은 빛날 수밖에 없다.

대상은 600년 조선수도 서울이다. '북촌'이라고 이름 붙였지만 지금 삼청동을 중심으로 한 좁은 지역을 말하는 게 아니다. 서울을 상징하는 친근한 이름으로 붙인 이름이다. 즉 과거 한성부 시절을 중심으로 한 서울기행으로 보면 되겠다.

백남준, 김소희, 야나기와 아사카와 형제... 서울을 사랑한 사람들

덕수궁 일대. 열강이 벌이는 각축전 속에서 외로운 줄타기를 해야 했을 대한제국의 슬픈 역사가 깃든 곳이다.
 덕수궁 일대. 열강이 벌이는 각축전 속에서 외로운 줄타기를 해야 했을 대한제국의 슬픈 역사가 깃든 곳이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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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 살면서도 한국에서 좋은 공연이 있다면 조용히 찾아와서 객석 한 자리를 채우던 백남준, '아베 마리아'를 부르던 김소희 명창, 종로를 지나가면 "사람들이 물살 갈라지듯 싸악 비켜나면서 반드시 뒤돌아보았다"는 심재순씨(한규설 대감의 외손녀), 세상 떠나는 날 친구를 찾아가 "나 괜히 이 세상에 왔다 가나 봐"라는 말을 남긴 중광스님 등 서울에 발자취를 남긴 이들의 흔적은 아스라하다.

어디 이들 뿐일까. 1959년 세검정에 봄소풍 나온 이온실, 김옥희씨, 30년 가까이 철물점을 하는 허만희씨, 일생을 한옥에서 산 송영각씨 등 줄곧 서울에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는 이들에 대한 기록들이 생생하다.

그 중 야나기와 아사카와 형제와 보신각종 지킴이 조진호씨를 살펴보자.

야나기와 아사카와 형제는 조선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이들이다. 1924년 자신들이 갖고 있는 조선 미술품을 가지고 경복궁 안에 미술관을 열었다. 오히려 조선 사람들이 "천한 도공의 도자기를 뭐 좋다고 전시하나"라면서 냉대했다 한다. 지금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다.

야나기는 메이지대학에서 윤리학을 가르쳤는데, 서울 광화문이 헐리는 것을 반대하니 일본 학생들이 조선인이라고 의심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어째서 조선의 것은 아름다운가. 조형의 세계에서 이 정도의 것을 영속적으로 지니고 있는 나라는 별로 흔치 않다고 생각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인보다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들 흔적도 북촌 서울엔 남겨져 있다.

조진호씨는 2006년 80세까지 보신각 타종과 종각 관리를 도맡은 이다. 종로가 대한민국 역사에서 차지한 역할에 비춰보면 그가 보고 들었을 역사의 부피를 짐작할 수 있다.

"1946년 광복절을 잊지 못하죠. 일제 때 타종이 금지되었다가 다시 치는 종이었으니까요. 이승만과 김구 두 분이 중앙청에서 광복절 기념식을 하고 바로 이리로 와서 기념 타종을 했어요. 그날 흰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 천연두 흔적이 있는 얼굴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쓴 김구 선생은 스무 살 난 내 등을 두드리며 '아버지를 대신해 오늘 종을 쳤다지? 이젠 임정도 들어오고 했으니 같이 일해봄세. 불러다 쓸테니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어. 허허허.'라고 했지요. 난 정말 김구 선생이 부르면 옆에 가서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려고 기다렸는데 그분은 얼마 뒤 돌아가셨지요. 고종이 쓴 보신각 현판은 6·25 때 불타고 나중에 이승만 대통령의 글씨로 다시 걸린 것입니다."-254-255쪽

서울을 만들었고, 만드는 이들은 결국 사람이다. <북촌, 서울에서>가 결국 사람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옥 다 허물고 고급빌라로"... 사라질 뻔한 북촌

북촌 골목. 하마터면 북촌 일대는 모두 고급빌라로 바뀔 뻔했다.
 북촌 골목. 하마터면 북촌 일대는 모두 고급빌라로 바뀔 뻔했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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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넘기다 보면 사진에 눈이 멎고 사연에 마음이 멎는다.

요즘 들어서 문화유산이네 전통이네 하면서 다소 관심을 가지지만 이들이 소리 없이 사라졌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숨이 멎는 듯하다.

서울에서 유일한 한옥밀집촌인 북촌은 하마터면 사라질 뻔했다. 1990년대 북촌 문제로 전문가 회의가 열렸을 때, 참석자들 절반 이상이 "한옥을 다 허물고 고급 빌라를 짓는 게 이 지역을 살리는 것"이라 말했다 한다. 당시 주민들은 재산권 보호를 외치며 한옥을 허물자 했다. 서울시가 이들 전문가들 말을 들었다면 지금 북촌은 영영 사라졌을 것이다.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가운데 하나인 삼청동길 또한 위기 순간이 있었다. 1980년대 행정당국에선 삼청동길을 직선도로로 넓히려고 주변 건물을 모두 사들였다. 지금처럼 구부러진 길을 그냥 두기로 결정한 것은 2003년이었다.

북악산 자락 삼청각은 또 어떤가. 1999년 폐관돼 고급 주택지로 팔릴 처지에 놓였다. 몇몇 시민들과 서울시가 나서지 않았다면 사진 속에서만 남은 건물이 됐을 것이다.

아찔하다. 한편으론 무섭다. 이런 일은 현재진행형이다. 문화와 역사에 대한 무관심 속에 이미 사유재산이 된 문화재 지역들이 얼마나 많은가. 근대문화유산 지정 전에 재산권 침해를 걱정해 앞서 파괴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과거엔 시민과 정부가 함께 문화재 파괴에 나섰다.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었다.

"숲 속을 관통해 넓은 길이 나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말을 타려고 여기다 길을 냈다고 한다. 철탑도 들어서 있다. 담 위로는 담에 붙여 지은 집들의 뒷벽이 무슨 누더기처럼 얼룩덜룩 솟아 있고 비닐이며 걸레 같은 것을 걸쳐 놓기까지 했다. 창덕궁은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궁 안팎이 그토록 지저분하면 문화유산 자격 유지에 위협이 된다는 것 때문에 당국이 골치를 앓는다고 했다."-190쪽

숨 가쁜 개발시대에 가까스로 몇몇 문화재들과 전통집,길들이 살아남았다. 그렇게 과거와 더불어 살고자 하는 배려와 거침없이 과거를 지우는 광폭함이 어우러진 게 지금 서울이다.

급진개혁을 내걸고 1884년 정변을 일으킨 홍영식 집안은 멸족을 당했다. 영의정을 지낸 부친 홍순목과 아내는 자살했다. 그날 홍순목의 명에 따라 집단 자살한 이들이 20여명에 이르렀다.

이후 홍영식 집은 몰수돼 넉 달 뒤 미국인 알렌이 운영하는 신식병원 광혜원이 됐다. 이후 한성고등여학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경기고등여학교(경기여고 전신)가 뒤를 이었다. 지금은 어떤 건물이 들어서있을까. 바로 헌법재판소다. 헌법재판소가 품은 지난 역사가 아찔하다.

조선 개국공신인 정도전은 태종 이방원에게 살해되며 역적이 된다. 그가 살던 집은 태종이 마구간으로 만들었다. 정도전에 대한 능욕이었을 터. 재미있는 사실은 1970년대까지 이 자리가 서울 경찰청 기마대 자리였다는 점이다. 역사는 이처럼 무심하게 이어진다.

잠자리채를 들고 메뚜기와 매미를 잡는 아이들, 성 밖에 닭을 놓아 기르는 집,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재물로 바치고 비는 굿, 57년째 빈대떡을 구워 파는 부부는 글쓴이가 찾아낸 지금 서울 속 모습이다. 서울이 품은 얘기들이 어디 한 두 가지일까. 400쪽이 넘는 책을 덮은 뒤에도 글쓴이들이 미처 풀지 못했을 실타래들이 떠오른다.

"북악산과 한강을 보면서 600년 전 서울에 터를 잡은 이성계와 무학 대사의 작업은 일면 설치 미술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 위에 건축가들을 만나고 현대의 정책 관련 내용을 접하면서는 감성 이상의 현실 세계가 펼쳐졌다. 북촌 이야기는 연못물에 들어가는 실 꾸러미처럼 끝없이 풀렸다."


서울, 북촌에서 - 골목길에서 만난 삶, 사람

김유경 지음, 하지권 사진, 민음인(2009)


태그:#서울북촌, #김유경, #하지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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