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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이맘 때, MBC는 주중 드라마 시장을 석권하고 있었다. 월화드라마 <에덴의 동쪽>은 적수가 없었고, 수목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는 난적들을 모두 물리치고 정상에 우뚝 섰다. 그러나 송승헌이라는 한류스타의 안방극장 복귀작이자 대규모의 시대극이었던 <에덴의 동쪽>과는 달리, 오케스트라라는 낯선 소재에 스타급 배우들도 없던 <베토벤 바이러스>의 성공을 점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더구나 경쟁작들의 면면 또한 기를 죽이기에 충분했다. <주몽>의 영광을 재현이라도 할 듯, 송일국을 주연으로 하고 고구려를 배경으로 한 대규모 사극 KBS <바람의 나라>. 베스트셀러인 동명 원작의 탄탄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안방극장 흥행보증수표 박신양, 그리고 국민여동생 문근영의 복귀작인 SBS <바람의 화원>. 이 두 화제작의 틈바구니에서 <베토벤 바이러스>가 걸어갈 길은 순탄치 않아 보였다.

 

그러나 강마에로 분한 김명민의 신들린 연기는 첫 회부터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오케스트라라는 낯선 소재는 거부감이 아닌 호기심의 대상이 됐다. 이순재, 박철민, 쥬니 등 조연급 연기자들의 안정적인 연기력과 탄탄한 극본 역시 시청률 상승에 일조했고, 결국 <베토벤 바이러스>는 경쟁작들을 모두 물리치고 동시간대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김명민이 그 해 연기대상을 탄 건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베바> 이후 침체 늪에 빠진 MBC 수목드라마

 

그러나 정확히 1년이 지난 지금, MBC 수목드라마의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베토벤 바이러스>가 끝나고 뒤이어 시작한 <종합병원2>은 그런대로 선방했지만, 이후 방영된 <돌아온 일지매>에서 시청률은 한 자리대로 추락하고 말았다. 권상우, 윤아의 주연으로 화제를 모은 <신데렐라맨> 역시 참패, <커피프린스 1호점>의 이윤정 감독의 복귀작이자 피겨스케이트라는 소재로 화제를 모은 <트리플>도 동시간대 꼴찌의 수모를 겪었다.

 

여름특수를 노린 납량특집 드라마 <혼> 역시 성과를 내지 못했고, 아이돌 그룹 '동방신기'의 리더 유노윤호의 연기 데뷔작으로 화제를 모았던 <맨땅에 헤딩>은 3~4%대의 저조한 시청률로 결국 최초 20부작에서 16부작으로 조기종영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지난 1년 동안 모두 여섯 작품이 방영되었지만 그 <종합병원2>를 제외한 모든 작품들이 동시간대 꼴찌의 수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는 지경, 드라마 왕국 MBC의 자존심이 다 뭉개진 상황에서 드디어 <히어로>와 함께 그가 출동했다. 시청률의 사나이, 한류스타, 그리고 왕의 남자, 이준기. 중성적인 매력이 가득한 광대에서 냉정한 국정원 요원으로, 그리고 다시 의적 일지매까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진지한 자세로 늘 새로운 캐릭터에 도전해오던 그가 이번에 선택한 것은 바로 '열혈 기자'였다.

 

전형성 벗어던진 <히어로>, 주목된다

 

CF퀸과 유부남 축구 선수의 밀회 장면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콘서트장에 잠입하는 진도혁(이준기 분)은 가십성 잡지 '먼데이 서울'에서 일하고 있는 기자다. 모두들 파파라치, 삼류, 저질 찌라시라고 무시하지만 그는 진실을 중요시하고 "내용이 어떠하든 구독자가 있으면 기사로서 가치가 있다"고 말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진실을 파헤쳐 독자들에게 보도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고 살아간다.

 

강해성(엄기준 분)은 진도혁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우리나라의 모 일간지를 연상케 하는 '대세일보'에 다니는 유능한 엘리트 기자. 회장님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고 매사에 자신만만한 사내. 그는 진실을 부르짖는 도혁을 향해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국회의원의 민망한 스캔들 사진을 조작하고 합성해 '진실 같은 건 언론의 힘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진실을 중요하게 여기는 도혁은 진실을 호도하고 자신들의 입맛대로 진실을 만들어내는 대세일보와 해성에게 강한 적개심을 느낀다. 먼데이 서울이 사장의 야반도주로 어이없게 폐간된 뒤 갈 곳이 없어진 도혁은 마찬가지로 대세일보에 뿌리 깊은 원한을 갖고 있는 전직 조직폭력배 보스 조용덕(백윤식 분)과 의기투합하여 '타도 대세일보'의 기치를 내걸고 '용덕일보'를 창간하게 된다.

 

<히어로>가 주목되는 이유 중 하나는 시작부터 전형성을 벗어던졌다는 데 있다. 피 끓는 정의감으로 무장한 열혈 기자란, 대개 쓸데없는 진지모드 발동 상태로 초지일관해 보는 이에게 피로감만 쌓이게 할 뿐이다. 그러나 이준기가 연기하는 진도혁은 열혈 기자 앞에 '삼류'라는 꼬리표를 달아 자칫 진부하고 진지하게만 흘러갈 수 있는 자신의 캐릭터를 좀 더 유들유들하고 능청스러운 분위기로 바꿔버렸다.

 

등장인물들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과 앞으로 일어나게 될 사건을 암시하는 드라마의 초반은 그렇기 때문에 자칫 지루하게 늘어질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히어로>의 1, 2회를 지루하지 않게, 늘어지지 않게 붙잡아두었던 일등공신은 바로 백윤식이다. 15년간의 장기복역 후 출소하여 겪게 되는 이질감. 세상도 변했고 사람들도 변했다는 그 아픈 사실은 희극적 상황과 담담한 그의 어투가 더해져 유쾌하게 그려졌다.

 

<히어로>, MBC 수목을 구할 수 있을까

 

드라마의 감초 역할을 하는 조연들의 면면도 예사롭지 않다. 정 많고 따뜻한 심성을 가진 강력계 형사로 분한 이한위는 새로 부임한 팀장의 어머니인 이혜숙을 보며 첫눈에 반해 중년의 로맨스를 예고했고, 주인공의 유쾌한 직장상사이자 동시에 진지한 일면을 갖고 있는 배역을 정석용이 맡아 앞으로의 활약을 예고했다.

 

화려한 조연들 가운데서도 누구보다 기대되는 인물은 바로 정수영이다. 본명보다 <환상의 커플>의 '강자', <내조의 여왕>의 '지화자'로 더 유명한 그녀는 밋밋하고 평범했던 캐릭터에 자신만의 색깔을 칠하고 다듬어 주연만큼 돋보이는 조연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탁월한 재주를 가졌다. <히어로>에서 맡은 나가연이란 캐릭터 역시 화류계 출신의 기자라는 설정과 독특한 음색이 어우러져 초반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여자주인공 윤소이의 등장은 사실 가장 우려스러웠던 부분이었다. 최초 강력계 여형사인 주재인 역에 캐스팅되고 촬영까지 들어갔던 김민정이 부상 악화로 끝내 하차하고, 서둘러 합류한 윤소이에 대해, 배우 자체에 대한 평가보다도 몰아치듯 진행돼야 할 급박한 촬영 스케줄에 대한 우려가 높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윤소이는 그런 우려를 일거에 날려버리듯, 안정적이고 순탄한 연기를 선보이며 극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그러나 <히어로>의 앞날은 용덕일보의 그것마냥 순탄치만은 않아 보인다. KBS <아이리스>가 30%를 넘는 시청률로 수목드라마의 맹주로 자리 잡았고, SBS <미남이시네요>는 마니아층의 결집과 인터넷 열풍의 영향으로 꾸준히 10% 초반의 시청률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경쟁작들에 비해 한참 뒤처진 후발주자인 <히어로>에게까지 시청자들의 관심이 쏟아지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 1, 2회 시청률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러나 근 1년 만에 가장 해볼만한 작품이 나왔다는 사실에 MBC는 총력을 걸어볼만 하다. 남녀 주·조연 배우들의 열연과 탄탄한 대본. 불편한 진실을 파헤치며 대세일보를 추격하는 용덕일보의 모습을 보며 느끼는 카타르시스. 이러한 것들이 서로 잘 어우러져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때, 종종 드라마 시장에는 기적과도 같은 역전극이 펼쳐진다. <히어로>는 그 역전극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태그:#히어로, #이준기, #엄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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