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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여진 틀에서 계속 그대로 가다 보면 다른 것을 못할 때도 있다. 그 틀 속에서 살다보면 그 스케줄대로 산다. 백수가 되었을 때가 찬스라는 말이 있다. 그 때 나를 돌이켜 보고,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하고, 하고 싶은 게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창조적인 것이 된다. 일부러 백수가 될 필요는 없지만, 백수가 되면 초조하게 생각하지 말고 나를 찾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라."

시사만화가 박재동 화백이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져 재수할 때 첫 만화 완성본인 <내 가슴에 봄이 왔습니다>를 그리고, 고등학교 때 1주일간 정학을 먹고 대형 유화를 그렸던 추억을 떠올리며 한 말이다. 박 화백을 18일 오후 창원대에서 "나의 삶과 그림, 그리고 창의력과 상상력"이란 주제로 강연했다.

박재동 화백.
 박재동 화백.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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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과 부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그림과 만화에 푹 빠져 살았던 기억을 더듬었다. 그는 "세상이 바뀌었다. 제가 어렸을 때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드물었는데, 지금은 아주 뛰어난 아이들이 많고 질투심도 생긴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렸던 그림을 슬라이드로 보여 준 그는 "외삼촌이 화가였는데, 어렸을 때 종이 100장을 주면서 하루에 한 장씩 그려라 하더라"고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유아 미술 교육과 관련한 견해를 제시했다.

"그림은 보이거나 생각하거나 겪은 것을 그려보자고 할 수 있는데, 아이들한테는 테마를 주어서 그리는 것이 괜찮을 것 같다. '이별'이나 '인생', '숙제'라는 주제를 주어도 좋고, 시나 단편 소설을 읽고서 그리도록 하면 훨씬 나을 수 있다. 만화를 그리게 하면 아이들은 좋아한다.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렇다."

어렸을 때 집에 혼자 있으면서 장판에 송곳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나중에 부모님이 오셔서 나무라지 않았던 추억을 더듬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부산에 와서 파도를 처음으로 봤다. 그것을 그리고 싶었는데 종이도 없고 크레용도 없었다. 송곳이 보여 장판에 점을 찍어서 그렸다. 나중에 부모님이 오실 때가 되니 불안하더라. 부모님은 아무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다. 속으로는 그림을 잘 그려서 꾸지람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뒤에 어머님께 여쭤봤더니 '혼자서 이거라도 하고 있어서 다행이다'는 생각을 했고, '어디 나가서 물에 빠지지 않아서 다행이다'고 생각하셨다고 했다. 그 때 부모님이 나무라지 않았던 것이 고마웠다."

그러면서 박재동 화백은 "결혼해서 아이가 생기면, 아이는 당연히 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 아이는 낙서가 아니다.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는 작품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낙서가 아니라 창조다"면서 "아이들이 벽이나 소파에 그림을 그려 놓으면 부모들은 눈이 확 돌아가는데, 꾸지람하면 안된다"고 말했다.

박재동 화백.
 박재동 화백.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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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다시 생각해 보자. 소파가 귀중하나 아이가 소중하냐. 아이가 소파를 더럽힌 게 아니라 소파에 무엇인가를 창작한 것이 중요하다. 아이의 위력, 생동감, 자랑스러움을 소파에 선언해 놓은 것이다. 그 때 아이를 나무라게 되면, 구겨진 아이의 마음을 되살리기는 힘들다. 아이가 항칠해 놓은 것을 보고, 1초만 참으면서 감상하고 평을 해주면 더 좋다. 그러면 아이는 자기의 행위를 사랑하게 되고,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부모님들은 부산에서 만화가게를 했다. 그는 "울산 살다가 아버지가 사시는 부산으로 이사를 했다. 처음 집 앞에 가니 '만소잡화설지'(만화소설잡지)라고 되어 있더라. 세로로 읽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게 읽었다"며 "만화집 사장 아들이라 엄청나게 만화를 봤다"고 말했다.

진주 출신으로 <아기공룡 둘리>를 그린 김수정씨와 비교하기도 했다. 그는 "60년대 만화에 대해 이야기 하면 저를 이길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때 본 만화는 어마어마했다. 김수정씨는 어쩌다 만화책 한 권을 구하게 되면 여러 번 봤다고 한다. 저와 정반대였다. 제가 한번 보면 100권을 봤다면 김수정씨는 한 권을 100번 본 것이다"며 "광범위한 독서도 좋은데 깊이 있는 독서도 좋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서 '만화방 가지 말자'와 '불량식품 먹지 말자'는 내용의 포스터를 그려 달라고 하더라. 비판의 대상이 우리 집이라 보니 그려야 하나 고민했다. 그려서 드렸더니 자장면 한 그릇을 사 주시더라. 아버지께 만화방 안하면 안되느냐고 했더니 아버지는 돈이 있어야 하지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는 만화가 천시를 받았다. 지금은 만화 대학이 생겼다."

박재동 화백은 "여자 아이들이 인형을 그릴 때 부끄럽다고 생각할 게 아니다. 그것도 그림이다. 당당하게 그려야 한다. 미술사에서 보면 만화도 회화이다. 자기가 좋아서 그리면 다 그림이다"면서 "캐릭터 그리는 것도 당당하게 생각하고 작품으로 여기고, 사인도 해라. 예술은 아닌데 하고 그린 게 나중에 가서 보면 예술이 된다"고 말했다.

박재동 화백은 중학교를 나온 뒤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쳤지만 떨어져 한 해 재수했다. "영화를 하도 보러 다니다가 공부를 안했다"고 한 그는 "재수하면서 친구들은 교복 입고 고등학생이 되었는데, 저는 어슬렁거리다가 시간이 나니까 만화를 그리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 때 114쪽 분량의 만화 <내 가슴에 봄이 왔습니다>를 그렸는데, 처음으로 완결한 작품이었다.

"그 때 만화를 그리면서, 만화를 그리는 것은 노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영감이나 의욕으로 시작했지만 완성시켜 가는 것은 노동이다. 항상 즐거울 수만 없다. 창고에 앉아서 계속 그려야 물건이 나온다. 만화는 소설로 그리는 게 아니라 엉덩이로 그린다는 말이 있다."

그는 "인생에서 재수시절이 중요했다. 바로 명문 고등학교에 들어갔다면 실패나 낙오한 사람들의 마음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가장 소중한 친구들을 그때 사귀었다"면서 "지금도 '고등학교 떨어져서 재수하고 만화를 그릴래, 만화 그리지 않고 고등학교에 바로 진학할래'라고 물으면 재수를 택하겠다"고 말했다.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1주일간 정학을 맞았던 추억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그는 "1주일 동안 다대포에 가서 유화 그림을 하나 완성했다"면서 "지금도 '정학 먹고 그림을 남길래, 정학 안 먹고 그림을 안 남길래'라고 물으면 그림을 남기는 것을 택할 것이다. 그림을 남기겠다는 사람은 무엇인가 기질이 있는 사람이다. 정학 먹은 것은 지금 제 인생에 아무 상관없고, 결혼하고 교수되는 데도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그런데 그림은 남아 있다"고 말했다.

박재동 화백은 18일 오후 창원대에서 강연했다.
 박재동 화백은 18일 오후 창원대에서 강연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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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박재동 화백, #시사만화, #창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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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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