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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을 하다 보면 가슴 한 켠에 늘 묻어 두고 있는 길이 있다. 진해 장복산을 올라가서 안민고개를 거쳐 시루봉 정상에 이르는 산행 코스가 내겐 바로 그런 길이다. 까탈을 부리는 나에게 언제나 따뜻한 손을 내밀어 주는 가까운 친구와의 추억이 서려 있는데다 장쾌한 바위 능선, 소박한 나무 계단, 앙증맞은 다리 등 산행 재미가 쏠쏠한 곳이기 때문이다.

 

지난 14일 오전 9시 10분께 집을 나서 경남 마산시 가포동과 창원시 귀산동을 잇는 마창대교를 건너 장복산공원 인근에 있는 진흥사(경남 진해시 태백동)에서 본격적인 산행을 한 시간은 9시 50분께. 초록빛 차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선 등산로를 따라 나는 느긋한 걸음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곳뿐만 아니라 시루봉 정상에서 자은동으로 내려가는 등산로에도 녹차밭이 아주 잘 조성되어 있어 녹차 새순이 돋아날 때면 찻잎을 따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산등성이 오른쪽은 낭만의 진해시, 왼쪽은 활기찬 창원시

 

오전 10시 30분께 장복산(582.2m) 정상과 덕주봉으로 가는 갈림길에 이르렀다. 나는 장복산 정상에 가지 않고 덕주봉 쪽으로 계속 걸어갔다. 거기서 덕주봉 정상까지는 1.3km. 그런데 30분쯤 걸었을까, 연분홍 진달래꽃이 피어 있어 화들짝 놀랐다. 가을의 끝이라 할 수 있는 요즘에 연분홍빛 진달래를 보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곳에서 5분 정도 떨어진 길에서도 예쁜 진달래꽃들이 늦가을인 줄도 모르고 고개를 쑥 내밀고 있는 모습에 또 한 번 놀랐다. 갈림길에서 안민고개까지는 공룡능선을 연상하게 하는 바위길이 이어지는데, 위험스럽게 보이지만 막상 바위를 타게 되면 재미있어 바위 옆으로 나 있는 수월한 길을 두고 굳이 바위길을 오르내리는 등산객들도 많다.

 

더욱이 두 도시를 한눈에 내려다보면서 산행을 하는 즐거움이라 할까, 산등성이를 타면서 오른쪽으로는 낭만적인 바다를 끼고 있는 진해시, 왼쪽으로는 활기 넘치는 창원시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 또 신도 난다. 파란 하늘, 맑은 햇살, 햇빛 부스러기 곱게 내려앉은 은빛 바다, 그리고 간간이 불어 대는 바람이 기기묘묘하게 생긴 바위들과 어우러져 참으로 멋진 길이다.

 

아스라이 시루봉 정상과 불모산(801.7m) 정상도 보인다. 곰메, 웅산(熊山)이라고 불리는 시루봉 정상에는 높이 10m, 둘레 50m의 신비스러운 곰메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그 거대한 바위가 마치 시루를 얹어 놓은 모양이라 하여 시루봉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그런데 멀리서 시루봉 정상을 바라보면 영락없는 여인의 젖꼭지 형상이다.

 

덕주봉(602m) 정상에 오른 시간은 11시 15분께. 찬 바람이 갑자기 불어 대어 오래 서 있을 수 없어 내려갔다. 50분 남짓 걸어가자 진해시 태백동과 창원시 안민동을 잇는 안민고개에 이르렀다. 거기에는 동물들이 이동하는 통로를 고려하여 세운 안민생태교가 있다. 그것을 사이에 두고 진해와 창원이 바로 붙어 있어 안민생태교를 지나면 행정구역이 달라져 버린다.

 

시루봉 정상, 기다란 나무 계단과 잘 어울리네

 

나는 안민고개에서 쉬지 않고 곧장 시루봉(653m) 정상을 향해 걸어갔다. 아줌마 두 분이 혼자 왔냐고 내게 먼저 말을 걸었다. 그러면서 같이 가자고 한다. 낯선 사람에게 따뜻한 말을 건넬 줄 아는 그들의 마음은 넓으리라. 결국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산행을 같이 하다 늦은 점심도 함께 먹고 하산한 뒤 장복산공원까지 차를 얻어 타는 신세마저 졌다.

 

단풍 색깔이 점점 윤택을 잃어 가는 듯한 산등성이를 바라보고 있으니 이제 가을이 한 걸음 한 걸음 우리들 곁을 떠나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 가지 않아 함초롬히 피어 있는 진달래꽃을 또 보게 되어 기뻤다. 오후 1시 50분께 내가 좋아하는 소박한 나무 계단으로 올라섰다. 경사가 완만해서 참 편안한 계단이다. 시를 쓴 종이를 코팅해서 걸어 두기도 했는데, 최문수라는 분이 지은 자작시들이다.

 

나무 계단 끝까지 올라가면 커피, 막걸리, 아이스크림 등을 팔고 있는 최문수 씨를 만날 수 있다. 그곳에서 주말 장사를 한 지 2년이 되었다 한다. 이따금 바람이 불어 코팅한 종이들이 이리저리 나부껴도 마치 빨랫줄에 널린 깨끗한 옷들이 바람의 장단에 맞춰 요리조리 춤추는 것 같아 흥겹다.

 

그곳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불모산과 시루봉의 갈림길이 나온다. 거기서 10분이 채 안 돼 정감 있는 웅산가교에 이르게 되는데, 다리가 아기자기하면서 제법 출렁대는 것이 재미가있어 산행의 즐거움을 더해 준다. 웅산가교를 지나자 시루봉 정상이 점점 더 가까워지는 듯하더니 어느새 곰메바위가 우람한 자태로 내게 다가섰다. 멀리서 바라보면 야들야들한 여인의 젖꼭지가 연상되는데 가까이에서 올려다보면 웅장하면서도 신령스러운 분위기이다.

 

그래서 그런지 시루봉은 신라 시대에는 산신제를 지내 나라가 태평하기를 빌었던 곳이고, 조선 시대에 와서는 명성황후가 세자로 책봉된 순종의 무병장수를 빌기 위해 백일 산제를 드렸던 산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곰메바위 밑으로는 기다란 나무 계단이 설치되어 있는데, 계단과 그토록 잘 어울리는 산 정상도 드물다.

 

정상 바로 아래에 있는 계단보다 더 기다란 느낌을 주는 나무 계단이 또 한 번 나오는데 이제는 슬슬 지루하다. 시루샘터를 거쳐 자은초등학교 쪽으로 하산하는 길은 생각보다 거리가 길고 가파른 편이라서 경치가 좋고 볼거리도 많은 안민고개 쪽을 이미 지나온 길이더라도 하산길로 잡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자은동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 30분께. 나는 장복산공원으로 다시 가서 조각 작품을 감상했다. 두 팔을 가지런히 들어 올리고 시선은 아래로 떨어뜨린 채 곧추서 있는 세 명의 남자 조각품을 한참 쳐다보았다. 그대로 드러내 놓은 갈비뼈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도저히 얼굴을 들 수 없는 이유 또한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고통스런 삶을 맞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내게 말을 건넨 아줌마들이 일러 준 대로 나는 마진터널을 지나 '산등성이'라는 간이식당으로 들어가 뜨끈한 손수제비를 사 먹었다. 산행을 끝낸 뒤 맛보는 음식은 이상스레 피로를 씻어 준다. 어떻게 보면 산행을 잘했다고 스스로를 대견히 여기는 자축의 의미도 있다. 그곳에서 나와 금세 어둠이 내려앉은 길을 자동차 헤드라이트로 환하게 비추면서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태그:#진해시루봉, #곰메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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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3.1~ 1979.2.27 경남매일신문사 근무 1979.4.16~ 2014. 8.31 중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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