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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청산의 첫 걸음이라 할 수 있는 친일인명사전이 오는 8일 반민특위 해체 60년, 편찬위원회 출범 8년 만에 발간된다. 쉽지 않은 길이었다. 최근 만주군 중위 출신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전 게재를 막기 위해 유족이 게재금지 가처분신청을 낸 것에 대해 온·오프라인에서 벌어진 격렬한 논쟁은 60년 전에 풀지 못한 '친일 청산'의 숙제를 다시 확인시켜주었다. <오마이뉴스>는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앞두고 갖은 굴곡을 겪어야 했던 지난 8년의 편찬사와 우리 시대에 사전이 갖는 의미를 3회에 걸쳐 재조명하고자 한다.  <편집자말>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제일 큰 의미는 과거 청산이 아니라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주춧돌이라는 데 있다."

 

일제강점기 때 태어나 6·25 전쟁을 겪고, 유신정권의 공안사건에 연루돼 두 번이나 옥살이를 한 문학평론가는 강건한 눈빛으로 '미래'를 주목했다. 김봉우·한상범 소장에 이어 지난 2003년 민족문제연구소장으로 취임한 임헌영(68) 소장은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의미를 '동아시아의 미래'로 확대했다. 그리고 물었다.

 

"유럽이 2차 세계 대전 이후 저렇게 번창하고 민주화를 정착시킬 수 있었던 까닭이 뭘까? 바로 독일만이 아니라 유럽 전 국가가 부끄러운 과거를 깨끗이 청산할 수 있는 '상식이 통하는 정치'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아시아 국가들은 어떠했는가?"

 

그 답은 모두가 알고 있다. 한국만 하더라도 일본이 스스로 나서 반성하고 진심으로 사죄할 수 있도록 '압박'을 하지 못했다. 친일파는 반민특위가 해체되기 전까지 잠시 숨어 있다 다시 등장해 사회 곳곳의 기득권을 다시 차지했다.

 

정부는 일본 정부로부터 약간의 보상과 함께 모든 과거사를 묻어버렸다. 그래서 '친일인명사전'은 그 잘못 꿰어진 단추를 다시 풀고 채우는 시작점인 셈이다. 임 소장은 "친일인명사전은 단순히 국내의 친일파를 기록한다는 차원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일부 정치인들은 일본과의 관계 때문에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덮어두려 하는데 옳지 않다. 오히려 일본과 주변국의 보수화만 이끌어낼 뿐이다. 과거를 제대로 짚어야 올바른 호혜평등의 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다. 결국 친일인명사전 발간은 우리나라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동시에 동아시아 평화에 대한 염원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일제시대 '군인' 친일파 취급 부당? 대한민국 군인 장교 충성 무시하는 발언"

 

하지만 여전히 '잘못 꿰어진 역사의 단추' 그대로를 원하는 이들이 있어서일까? 편찬 8년 만에 발간되는 친일인명사전은 앞서 여러 번 만만치 않은 장애물을 만났다.

 

지난 2003년 국회의 연구용역 예산 전액 삭감부터 사주 일가의 친일 전력이 드러난 거대 보수 신문들의 편향적 보도, 거기에다 일부 수구단체들은 연구소 앞까지 찾아와 현판을 떼어가는 등 '마구잡이'로 나서기도 했다.

 

임 소장의 옥살이 경력도 이들의 입에 올라 빨간 색으로 '매도'됐다. 당장 일부 수구단체는 오는 8일 사전발간 국민보고대회 장소 앞에서 민족문제연구소와 사전발간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 것으로 알려졌다.

 

임 소장은 "이승만 정권 때부터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빨갱이'란 말을 쓰는데 아직도 그런 언어를 쓰는 분들을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연구소에 전화 와서 '빨갱이'라고 하고, 욕설 하고 그러면 솔직히 화가 좀 난다. 어떻게 지금 시대에 그런 말을 아직도 쓰는지…. 민족문제연구소가 좌익이라고 하는데, 연구자들이 좌익일까? 주로 나보고 그런 말을 한다. 내가 반공법·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두 번 옥살이(문인간첩단 사건, 남민전 사건)를 했지만 다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확인을 받았다."

 

임 소장은 또 "나라를 뺏겨서 독립운동을 할 때면 흰둥이·빨갱이 가릴 여유가 없다"며 "내부에 많은 갈등이 있더라도 민족독립이라는 대의명분 앞에서 힘을 합칠 줄 아는 것이 올바른 좌익이고 우익이다"고 꼬집었다.

 

임 소장은 이어, 최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지만씨가 "단순히 일제시대 군인이라고 친일파로 규정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게재 및 배포금지 가처분신청을 낸 것을 두고 "우리나라 군인 장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고 반문했다.

 

"군인 장교는 국토방위의 보루이자 충성의 상징 아닌가. (지만씨의 발언은) 군인의 충성을 무시하는 발언이었다. 백범 김구가 일본 육군 중위를 죽인 일이 있다. 김구 선생은 그를 일본 자체로 보고 죽인 것이고 일본은 그를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군인 장교가 그만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단 뜻이다. 특히 일제 파시즘에서 군인들의 지위가 (지금보다) 훨씬 높았다는 점을 상기해보기 바란다."

 

"연구원들에게 자기 조상이라 생각하고 조사하라고 했다"

 

그러나 임 소장은 "그 당시의 상황, 시대적인 압박 모두를 감안했다"며 "후손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참 안됐다"며 안타까움 역시 드러냈다. 또 "그 때문에 발간 예정을 늦춰가면서 이의신청한 분들을 일일이 만나 설득한 것"이라며 덧붙였다.

 

실제로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는 지난해 4월 수록대상명단을 발표한 이후 1·2차에 걸쳐 이의신청을 접수했다. 이후 접수된 120여 건의 이의신청에 대한 재검토 과정도 거쳤다. 이로 인해 예정됐던 지난 8월 15일보다 석 달 가량 발간이 늦춰졌다.

 

"친일인명사전이 그 후손들을 규탄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 연구원들에게 가장 강조한 것이 '수록 대상자를 자기 조상으로 생각하고 조사하라'였다. 그만큼 조심하고 다시 확인해라는 뜻이었다. 선거철만 되면 언론 등으로부터 경쟁 정치인 조상의 친일 경력을 묻는 전화가 많이 온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런 내용을 밝힌 적도 없다."

 

무엇보다 임 소장은 "후손이 조상의 친일 경력을 숨기거나 옹호하려는 우를 범하면 안 된다"고 충고했다.

 

"고대 플라톤의 철학 때부터 가장 큰 죄악은 국가와 민족을 배신한 것이었다. 수치스럽다고 느끼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조상의 오류를 경계 삼아 후손이 잘 하면 되는 것이다. 그 조상을 다시 영광스럽게 만드느냐, 아니면 더 욕되게 만드느냐는 후손에게 달려있다."

 

"독립운동가의 원혼과 친일파의 죄의식이 어우러져 모두의 '한' 푸는 굿판으로"

 

일부 보수신문이 '박정희 만주군 혈서지원' <만주신문>의 진위 여부에 의구심을 드러내는 등 사전의 신뢰성에 의구심을 보내고 있지만 임 소장은 "원 사실에서 단 한 자도 가미되지 않았다"며 사전의 전문성과 신뢰도에 대해 큰 자부심을 드러냈다.

 

임 소장은 "사전의 의의를 하나 더 들자면 근·현대 인문학의 총화라고 할 수 있다"며 "근·현대 100년 간 있었던 모든 자료를 다 동원했고 사전에 게재될 인물 한 명 한 명에 대한 참고문헌 모두를 다 밝혔다"고 말했다.

 

또 "(사전 발간 이후) 일제관료·관변단체·기구, 중국과 일본의 각종 사회단체 연구 등 친일관련자료를 총괄하는 총서도 발간하고 그간 수집한 자료 등을 이용해 역사 박물관을 만들 계획도 있다"며 "우리 연구소가 일제식민지 시대에 관해 연구든, 자료든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다"고 밝혔다.

 

이어, 임 소장은 "임종국 선생을 비롯한 우리 선배들의 피어린 노력과 지금으로 상상할 수 없던 시기에 연구소를 만든 김봉우 소장의 노고에 감사드리고, 민족주체성을 잃지 않고 친일 청산을 지원해주신 방방곡곡의 국민들과 해외 동포들에게 깊은 고마움을 표한다"며 마지막 부탁을 남겼다.

 

"사전 서문에 '우리 민족의 앞날이 어떻게 될까, 이 사전이 영광스럽게 받아들여진다면 우리 민족도 영광스러울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험난할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에 축복이 있길 바란다'고 썼다.

 

그렇다. 그와 같이 친일인명사전은 국민적인 축제가 되어야 한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굿판'이 되어야 한다. 독립운동가, 수난 받았던 이들의 원귀와 친일파의 죄의식이 함께 어우러져 털어내고 하는 그런 계기가 되어야 한다. 각각의 후손들이 서로 만나 '좋다, 이것으로 화해하자' 그렇게 되어야 한다."


태그:#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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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입사. 사회부(2007~2009.11)·현안이슈팀(2016.1~2016.6)·기획취재팀(2017.1~2017.6)·기동팀(2017.11~2018.5)·정치부(2009.12~2014.12, 2016.7~2016.12, 2017.6~2017.11, 2018.5~2024.6)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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