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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육이 아닌 진정한 교육을 원해요."

 

지난해 2월 경기도 내 한 기숙형 사립고등학교 학생들이 옥상에 올라가 날린 색색의 종이비행기에 적혀 있던 글귀다.

 

학생들은 견디기 힘들 정도의 학습 부담과 체벌, 소지품 검사, 얼차려, 편지 검열까지 당했다고 호소했다.

 

좀 심한 경우이긴 하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 대부분의 학교에서 인권은 그저 사전에만 나오는 단어일 뿐이란 지적이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기도교육청(교육감 김상곤)이 각계의 관심 속에 전국 최초로 추진중인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위한 준비가 하나둘 진행되고 있다.

 

도교육청은 10월 30일 오후 수원북중학교(수원시 장안구 소재) 다목적실에서 학생과 학부모, 교사 등 1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경기도학생인권조례 사전협의회'를 열었다. 협의회는 '경기도학생인권조례제정자문위원회'(아래 조례자문위, 위원장 곽노현) 주관으로 진행됐다.

 

이날 협의회의 취지에 대해 인사말을 한 김인교 자문위원(안양 동안고등학교 교장)은 "조례 제정을 위한 의견 수렴은 학생과 학부모, 교사 모두가 행복한 공동체를 만드는 첫걸음이다"고 강조한 뒤 "좋은 조례안이 마련될 수 있도록 허심탄회한 의견을 제시해 주시면 최대한 반영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어 '경기도학생인권조례로 여는 새로운 학교의 전망'이란 주제로 발표한 김영기 자문위원(변호사, 법무법인 다산)은 "대학입시란 걸 위해 소중한 학생의 인권이 뒷전으로 밀리는 현실이다"면서 "학생 인권 보장은 가혹한 경쟁을 지양하고 삶의 기쁨과 책임을 일구어내는 교육의 밑거름"이라고 설명했다.

 

"학생 인권 존중은 세계인권 기준과 우리나라 헌법, 법률이 요구하고 있는 가치이기도 합니다. 학생은 미성숙한 보호 대상이 아니라 존엄한 인권의 주체임을 강조하는 조례 제정은 학생과 교사, 학부모의 권리가 조화를 이룬 교육공동체 회복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주제 발표가 끝난 뒤엔 학생, 교사, 학부모, 학교 관리자(교장·교감) 4모둠으로 나뉘어 각각 다른 교실에서 조례안에 담아야 할 내용 등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다.

  

[학생] 조례에 대한 기대감으로 활발히 의견 내놓아

 

학생들은 조례 제정에 대한 많은 기대감을 나타냈다. 학생들은 학교생활에서 겪는 사례를 이야기하며 대체로 두발과 교복 자율화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날 논의엔 장발에 점퍼차림의 고등학생이 참여해 다른 학생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대안학교로 알려진 수원 대명고 학생이었다.

 

처음엔 별로 의견을 개진하지 않던 학생들은 분위기가 조성되자 "학급회의에서 어떤 사안에 대해 건의를 해도 어떻게 반영되는지도 알 수가 없다"거나 "우린 표현의 자유조차 없다", "선생님들은 전혀 개성을 존중해 주지 않는다", "조례 제정이 기대된다"는 의견들을 쏟아냈다.

 

한 학생은 "교권과 학생인권이 반비례한다고 생각하는 선생님들의 의식 변화가 우선돼야 한다"면서 "오늘처럼 따로 나뉘어 얘기하는 게 아니라 한 자리에서 토론해야 상호 이해가 가능해질 것"이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논의 과정에서 여러 학생이 체벌은 없어져야 한다고 이야기하자, 한 학생은 "학교에 아이들이 말 잘 듣는 선생님과 말 잘 듣지 않는 선생님이 있다"면서 "말 잘 듣지 않는 선생님만 있으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체벌 규제에 반대하는 듯한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자 다른 학생은 "때리면서 하는 것은 교육이 아니라 사육이다"면서 "선생님들이 학생들의 행동에 무조건 '너는 맞아야 돼'라는 식으로 묻지 마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안 좋다"고 반박했다.

 

[교직원] "학생인권조례가 아니고 학생생활지도조례라고 해야"

 

바로 옆 교실에서 논의 중인 교사들은 기대감에 충만한 학생들과는 달리 조례 제정에 찬성하는 의견부터 우려와 반대의 목소리까지 큰 의견차를 드러냈다.

 

한 교사는 "조례 제정에 원칙적으로 찬성하는데 조례의 내용들이 국민의 인권수준보다 더 과도하게 학생에게 권한을 준다는 생각이다"면서 "두발이나 복장을 제한하는 건 안 되지만, 경찰도 국민들에게 불심검문을 하는데 학생 소지품 검사를 못하게 하는 건 너무 과도한 것"이라고 말했다.

 

교사들 중엔 "이런 조례를 꼭 만들어야 하느냐"라거나 "다른 나라나 다른 시도에서 이런 조례를 만들어 성공한 사례가 있으면 예를 들어달라", "학생인권조례와 함께 교권조례도 만들어야 한다", "조례에 반대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심지어 어느 교사는 "의견 수렴이 먼저인데, 누구 한사람의 교육철학을 좇아 대다수 선생님의 의견을 배제하는 조례를 제정하려 하는데, 제정된다 하더라도 실효성이 없을 것"이라면서 "조례에 반대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학교 관리자로 분류된 교장과 교감들이 모인 교실에서는 "너무 선생님들을 제한하고 위축시켜선 안 된다"거나 "교육환경이 열악해지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는 식의 조례에 대한 거부감과 부정 섞인 의견이 이어졌다.

 

한 교장은 "조례에 학생의 권리뿐만 아니라 학생의 의무도 명시해야 한다"면서 조례 제목에 대해서도 "학생인권조례가 아니고 학생생활지도조례라고 해야 부담이 덜할 것"이라고 목소릴 높였다.

 

또 다른 교장은 "인권을 존중하다 보면 생산성이 떨어진다"면서 "서양에서도 인권을 존중하다보니 생산성이 떨어지니까 오바마 대통령도 한국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 것 아니냐"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누가 아이들을 때리고 싶어 하겠어요. 다 성적을 올려보려고 하는 건데···."

 

[학부모] '교복 자율화' 놓고 다양한 의견 제시

 

학부모들이 모인 교실에서는 "과도한 체벌은 문제가 있다"는 의견과 함께 '교복 자율화' 사안을 놓고 다양한 의견들을 보였다.

 

중학생 자녀를 뒀다는 어느 학부모는 "복장 자율화를 반대한다"면서 "사복을 입게 되면 비싼 옷을 사주지 못할 경우 마음도 아프고, 빈부격차도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다른 학부모는 "자율화를 기본으로 하고 교복을 입거나 사복을 입는 것은 학생들이 선택하는 방안이 괜찮을 것 같다"고 제안했다.

 

그러자 "우리 아이는 교복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자율화돼서 교복만 입으면 집이 빈해서 그런 거로 보이지 않겠느냐"거나 "우리 아이는 규제는 어느 정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더라", "다 풀어 놓으면 좋기도 하겠지만, 학생들이 협의를 통해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는 등의 의견이 잇따라 나왔다.

 

한편 자문위원회는 이날 사전협의회에 이어 11월 2일 안산, 3일 안양·과천, 5일 성남과 구리·남양주, 9일 부천에서 잇따라 협의회를 개최해 학생과 교사, 학부모들의 의견을 수렴할 예정이다.

 

또한 11월 8일까지 자문위원회 홈페이지(http://human.kerinet.re.kr/)에서 설문조사를 진행하고, 조례 제정 과정에서 학생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통로가 될 '학생참여기획단'을 11월 2일부터 13일까지 모집하고 있다.

 

도교육청은 자문위원회 활동을 통해 모아진 의견과 다양한 전문가들의 조언을 비롯해 각계의 의사를 반영한 조례안을 만들어 가능한 올해 안에 제정할 계획이어서 그 결과가 주목된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수원시민신문(www.urisuwon.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학생인권조례, #경기도교육청, #인권, #교사, #김상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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