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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느새 만추의 계절 11월로 접어들었다. 가을을 일러 수확의 계절이자 조락의 계절이라고들 하는데, 올 한해도 어느덧 가을의 끝 무렵, 수확 다음의 조락의 시기로 접어든 것이다.

거의 매일 '장명수'라는 이름을 가진 인근 해변을 다니며 걷기 운동을 한다. 평생 성인병 관리를 하며 살아야 하는 신세이기에 오후 2시간 걷기 운동을 매우 귀중한 일로 여긴다. 오후 3시쯤 장명수로 차를 가지고 가서 해변 걷기 운동을 한 다음 5시쯤 태안 읍내 한 초등학교로 가서 아내의 퇴근을 도와 준다.

갯벌 위에 사리 물이 덮이면 마치 호수와 같은 평화로운 모습을 보여 준다. 태안군 근흥면에 속한 해변에서 남면에 속한 해변을 보며 찍은 사진이다.
▲ 사리 때의 장명수 갯벌 위에 사리 물이 덮이면 마치 호수와 같은 평화로운 모습을 보여 준다. 태안군 근흥면에 속한 해변에서 남면에 속한 해변을 보며 찍은 사진이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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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는 내가 사는 태안군청 바로 옆 아파트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도 되지 않는, 태안 읍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다. 태안읍 남산리 끄트머리에서 오른쪽은 근흥면이고 왼쪽은 남면이다.

근흥면에 속한 해변은 두야리와 안기리와 용신리로 이어지는데, 용신리 해변에는 채석포도 있고, 그 너머는 도황리 연포이고, 그 다음은 정죽리 안흥항이다. 또 남면에 속한 해변은 진산리와 몽산리로 이어지는데, 몽산리 해변에는 몽산포도 있고, 다음은 달산리 청포대이고, 그 다음은 마검포이다.

전에는 집에서부터 걸어서 장명수를 가곤 했다. 30분 정도면 갈 수 있으니, 왕복 1시간은 산길과 들길을 걷는 셈이고, 1시간은 해변을 걷는 셈이었다. 그러다가 요즘에는 차를 가지고 간다. 해변을 더 많이 걷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태안읍 남산리에 속한 해변에다 차를 놓고, 오른쪽 근흥면에 속한 해변과 왼쪽 남면에 속한 해변을 번갈아 걷는다.

발이 빠지지 않는 부드러운 모랫길이며, 발을 옮길 때마다 자갈자갈 소리를 내는 자갈길이며, 판판한 제방 길을 번갈아 걷는 재미는 신선한 바닷바람을 더욱 감미롭게 만들어준다.

한 달에 두 번 만조 때는 갯길이 없어져서, 제법 파도라도 있는 날은 곡예하듯 산모롱이 길을 밟아야 한다.
▲ 장명수의 만조 한 달에 두 번 만조 때는 갯길이 없어져서, 제법 파도라도 있는 날은 곡예하듯 산모롱이 길을 밟아야 한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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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두 번 만조 때는 '호수'의 평화를 즐기며 주로 제방 길을 걷지만, 대개는 황막한 갯벌의 쓸쓸함을 즐기며 해변의 모랫길이나 자갈길을 걷는다. 물이 있건 없건 갯고랑들을 안고 있는 갯벌에는 늘 바닷새들이 있다.

사람을 보고 멀찍이 자리를 옮기는 바닷새들, 제방 길 위에 잔뜩 모여 있다가 사람의 발길을 피하려고 황급히 흩어지는 갯강구들을 보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갯방구들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기도 한다. 때로는 돌 틈으로 숨은 작은 게를 곤란하게 만들고 잠시 장난을 걸기도 한다.

요즈음 장명수 해변은 더욱 아름답다. 해변뿐만 아니라 갯벌 가운데까지 나문재 류의 바다풀이 많이도 깔려 있는데, 푸르던 풀색들이 빨갛게 변해 있다. 그 풍경을 보면서 바다풀들에도 단풍이 든다는 것을 실감한다. 갯벌 위에 가을이 가득한 셈이다.

사리 때 며칠을 빼고는 거의 매일 황막한 상태인 장명수 갯벌에는 요즘 가을 채색이 한창이다. 바다풀들도 단풍이 드는가 보다. 사진 한 장에 갯벌 전체를 담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 갯벌의 가을 채색 사리 때 며칠을 빼고는 거의 매일 황막한 상태인 장명수 갯벌에는 요즘 가을 채색이 한창이다. 바다풀들도 단풍이 드는가 보다. 사진 한 장에 갯벌 전체를 담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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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두 번 만조를 이루었다가 썰물이 시작될 때는 어김없이 무수히 많은 갈매기들이 모여들어 갯벌을 덮는다. 어디에 있던 갈매기들이 그렇게 많이 모여드는지, 또 어떻게 만조 후의 썰물 때를 정확히 맞춰서 날아오는지 신기할 정도다.

얼마 전 주말에 아내와 함께 걷기 운동을 하면서 갯벌의 얕은 물 위를 엄청난 규모의 갈매기 떼가 뒤덮고 군중집회를 하고 있는 장관을 보며 감탄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저녁 무렵의 밝은 햇살이 완벽하게 조명 효과를 내주고 있는 것을 보며, 그날따라 카메라를 휴대하지 않은 것을 한탄하고 또 한탄했다.

<2>

장명수 해변을 거닐면서 선친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것은 당연지사이기도 하다. 선친은 생전에 <장명수 산조>라는 시를 지으셨다. 여러 쪽에 이르는 장시다. 1980년 5월, 경기도 남양만 간척공사장에서 생활하던 나는 선친의 시들을 모아서 <장명수 산조>라는 시집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시집을 선친의 회갑상 위에 올려 드렸다.

장남 처지에 나이 서른이 훨씬 넘도록 아버님께 며느리도 보여드리지 못하는 불효를 조금이나마 상쇄하고자 그렇게 아버님의 시집을 만들어 드렸는데, 그 시집은 태안 지역 최초의 개인 시집이 되었다. 아버님은 당신의 습작품들을 아들이 가져다가 보기만 하는 줄 알았더니 몰래 시집을 만들었다고 놀라고 당혹해 하면서도, 친지들에게 사인을 해서 선물을 할 때는 더없이 행복한 모습이었다.

선친(지동환 님)께서 생전에 만져보신 책이다. 객지 노동판 생활을 하던 나는 불효를 조금이나마 만회하고자 선친의 습작품들을 모아 시집을 만들어서 1980년 선친의 회갑상 위에 올려 드렸다. 이 시집은 태안 지역 최초의 개인 시집이 되었다.
▲ 선친의 생전 시집 선친(지동환 님)께서 생전에 만져보신 책이다. 객지 노동판 생활을 하던 나는 불효를 조금이나마 만회하고자 선친의 습작품들을 모아 시집을 만들어서 1980년 선친의 회갑상 위에 올려 드렸다. 이 시집은 태안 지역 최초의 개인 시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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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언 30년 전 일이지만, 선친의 회갑상 위에 올려드린 그 시집의 이름이 <장명수 산조>인 고로, 내가 오늘도 장명수 해변을 거닐며 '장명수 산조'를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선친의 생전 모습들을 떠올리고, 그 장시 안에 담겨진 장명수 관련 설화 내용도 상기해 보는 것은 해변 걷기 운동의 색다른 즐거움이다.

장명수 해변은 내 소년 시절의 추억도 담뿍 어려 있는 곳이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종종 와서 고등을 줍고, 대합을 캐고, 망둥이 낚시를 하고, 염전 저수지에서 멱을 감곤 한 곳이다. 해변 초입에서 먼 바다를 바라볼 때는, 초등학생 시절 바로 아래 누이동생과 함께 아버지를 따라 말미잘을 찾아 갯벌 위를 오래오래 걸었던 날, 대체 어디쯤까지 갔다가 허탕을 치고 되돌아왔을까? 그 지점이 어디쯤일지 가늠해보며 아스라한 하늘의 까치놀 같은 그리움에 하염없이 젖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괜히 눈물이 솟기도 하고….

근흥면에 속한 해변을 걸을 때는 절로 눈여겨보게 되거나 잠시 다리 쉼을 하는 곳들이 있다. 2007년 2월이던가, 안양에서 사는 생질녀 부부가 와서 잠시 머물며 유아원에서 쓸 일이 있다고 고운 모래를 두어 포대 퍼간 지점, 또 지난 9월초 미국에서 사는 누이동생이 왔을 때 어린 시절의 장명수를 추억하며 산그늘에 앉아 막걸리를 마신 지점, 그리고 명절 때는 모이게 되는 3형제 가족들을 두어 번 데리고 가서 시멘트 구조물을 식탁 삼아 술과 명절 음식을 즐겼던 곳….

작은 갯고랑과 어깨동무하고 있는 제방 길가에 피어 있는 억새 무리도 해변의 가을 정취에 일조를 한다. 태안읍 남산리에서 남면 진산리로 가는 길이다.
▲ 제방 길 앞의 갯고랑 작은 갯고랑과 어깨동무하고 있는 제방 길가에 피어 있는 억새 무리도 해변의 가을 정취에 일조를 한다. 태안읍 남산리에서 남면 진산리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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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멀어지는 만큼 점점 더 그리워지는 현상 때문에 정말 그 지점들을 통과할 때는 잠시 다리 쉼을 하거나 뒤로 걷기를 하며 오래 눈을 주기도 한다. 언젠가 한번 동생에게 그런 얘기를 했더니, "나도 망둥이 낚시를 가서 그 앞을 지날 때는 그리움 때문인지 괜히 쓸쓸해져요"라는 말을 해서 속으로 탄성을 머금은 적도 있다. '쓸쓸해진다'는 말이 왜 그리도 절절하게 느껴지는지….

남면에 속한 해변을 걸을 때는 한 펜션 뜰의 벤치나 정자 안에서 잠시 다리 쉼을 한다. 2007년 6월, '굿자만사(가톨릭 굿 뉴스 자유게시판에서 만난 사람들)' 모임이 있었던 장소다. 반가움과 정다움, 그리고 즐거움이 가득했던 시간이요 장소였다. 마음으로나마 그 날의 그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것, 그런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산다는 사실에서 감사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그 날 그 자리에 함께 했던 사람들 중에 이미 고인이 된 이도 둘이나 된다. 어쩌면 그래서 그 날의 추억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고 그리워하게 되는지도 모를 일이다. 세월의 덧없음과 인생 무상을 반추하게 되기에…. 

<3>

태안읍 남산리 해변에서 오른쪽 근흥면에 속한 해변을 걸으면 두야리 다음의 안기리 해변을 걷게 되는데, 안기리에는 '궁틀'이라는 마을이 있다. 땅의 형세가 활(弓)과 같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그 궁틀 한 곳에는 태안 출신 최초 등단 문인이었던 고(故) 이래수 박사(문학평론가·동국대 교수)의 생가가 있다.

1942년 생으로 나보다 여섯 살이 위인 이래수 박사는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ROTC 육군 장교로 군 복무를 마친 다음 잠시 고향에 내려와 있을 때 나와 인연을 맺었다. 그와 나는 태안의 최초 문학단체인 '여울문학동우회'를 만들었고, 1968년 겨울 이 지역 최초 문학동인지인 <여울>을 발간했다. 내가 1969년 여름 군에 입대함으로써 <여울>은 창간호이자 종간호가 되고 말았지만, 그 <여울>을 매개로 이래수 박사와 나는 알찬 추억을 만들었다.

태안군 근흥면 안기리 '궁틀' 마을에 있는 태안 지역 최초 등단 문인 고 이래수 박사(문학평론가, 동국대교수)의 생가는 20년 가까이 빈집으로 남아 있다. 내가 청년 시절 여러 번 드나들며 밥도 먹고 잠도 자고 했던 집이다.
▲ 빈집이 된 고 이래수 박사의 생가 태안군 근흥면 안기리 '궁틀' 마을에 있는 태안 지역 최초 등단 문인 고 이래수 박사(문학평론가, 동국대교수)의 생가는 20년 가까이 빈집으로 남아 있다. 내가 청년 시절 여러 번 드나들며 밥도 먹고 잠도 자고 했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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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여름부터 69년 여름까지 2년 동안 이래수 선배와 나는 자주 만나서 술잔을 기울였다. 그는 내게 "조숙하다"는 말을 했고, "충분히 말상대가 된다"는 말도 했다. 나는 태안 읍내에서 근흥면 안기리 궁틀까지 종종 발걸음을 했고, 밤중에 혼자 시오리 길을 걸어 그 집을 간 적도 있다.

밤새 얘기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여서 그 집의 술 한 독을 다 비운 적도 있다. 오밤중에 술 한 주전자와 고추장 접시 하나만을 들고 해변으로 가서 모래톱 위에 앉아 술잔에다가 별을 담아서 마시기도 했다.

까마득히 멀어진 그 시절의 정경들이 오늘 더욱 그리워지는 것은 어느덧 오후의 산그늘 속으로 접어든 내 나이 탓도 있겠지만, 이래수 박사가 예전에 고인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할 터였다. 이래수 박사는 1990년 겨우 쉰 살 나이로 세상을 하직했다. 그리고 그 후 안기리 궁틀 이래수 박사의 생가는 '빈집'이 되었다.

오늘의 나는 장명수 해변을 걸을 때마다 안기리 해변에서 궁틀 마을을 보곤 한다. 해변에서 멀리 논틀 너머로 건너다 보이는 지점에 이래수 박사의 생가가 있다. 붉은 함석 지붕이 훤히 보인다. 보는 것만으로도 쓸쓸해지고 처연해진다.

이래수 선배의 노모께서 허리 굽은 몸으로 술주전자를 들고 부엌에서 사랑방을 오가시던 뜰에는 잡초가 무성하여 세월의 덧없음, 인생무상을 더욱 실감케 하였다.
▲ 뜰안에 잡초가 무성하고 이래수 선배의 노모께서 허리 굽은 몸으로 술주전자를 들고 부엌에서 사랑방을 오가시던 뜰에는 잡초가 무성하여 세월의 덧없음, 인생무상을 더욱 실감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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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리 해변을 걸을 때마다 매번 해변에서 논틀 너머 이래수 박사의 생가를 보기만 하다가 얼마 전에는 그 집을 가보았다. 폐가가 되다시피 한 집이었다. 옛날 이래수 박사의 노모가 굽은 허리로 부엌에서 사랑방으로 술 주전자를 나르던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먼지가 쌓인 대청마루에서는 적막만이 감도는데, 이웃집에서 걸어놓은 처마 밑의 마늘 접들이 그나마 인적을 느끼게 할 뿐이었다.

폐품이 어지럽게 쌓여 있고 여기저기 거미줄이 무성한 사랑방 안을 들여다보자니 숨이 막혔다. 대학교 철학과 출신으로 문학평론가를 지망하는 그에게서 밤새 하이데거와 야스퍼스를 듣고, 조이스와 엘리어트, 마르크스와 엥겔스, 샤르트르와 까뮈, 앙드레 말로와 생 떽쥐베리, 그리고 카프카 등을 듣던 방이었다.

이광수와 김동인, 현진건과 염상섭, 김유정과 이효석, 이상과 임화, 그리고 홍명희와 김동리와 황순원 등을 듣던 방이었다. 또 정지용의 "고향에 돌아와도 그립던 고향은 아니려뇨"라는 시도 듣던 방이었다.

저 방안에서 이래수 선배와 밤새 술을 마시며 문학을 논하던 때가 있었다. 마루 끝에 앉아 국화 향기에 취한 때도 있었고...그런 시절이 정말 있었나 싶고, 숨이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 청년 시절의 추억이 어린 방 저 방안에서 이래수 선배와 밤새 술을 마시며 문학을 논하던 때가 있었다. 마루 끝에 앉아 국화 향기에 취한 때도 있었고...그런 시절이 정말 있었나 싶고, 숨이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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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인가, 4·19 세대인 그에게서 민주와 독재, 자유와 평등, 진실과 정의, 양심과 상식, 친일세력과 민족세력, 남정현의 '분지' 사건 등을 듣던 방이고, 허리 굽으신 노모께 죄송한 줄도 모르고 수없이 아침밥을 먹은 방이었다.

사랑방 마루에 앉아 울안의 국화꽃을 바라보았던 그 옛날의 어느 날처럼 먼지 덮인 마루 끝에 슬며시 엉덩이를 얹어 보았으나, 계절도 잊은 듯 소담하고 정겹던 국화꽃은 어디에도 없었다.

<4>

안기리 해변을 거닐며 궁틀 앞을 지날 때는 한숨을 쉬기도 한다. 이래수 선배는 자신이 대학생 시절 학생 데모에 직접 참여했던 4·19 세대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민주주의에 대한 남다른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의 그를 상기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동국대학교에서 그와 사제의 연을 맺은 공광규 시인 등 많은 제자들이 오늘도 그를 잊지 못하여 나에게까지 연락을 해오는 경우가 있다. 제자들이 그를 오래 잊지 못하는 것은 그가 유지했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준수한 성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기도 할 터이다.

주말에는 아내도 장명수 해변을 함께 걷는다. 남편 덕을 많이 보는 셈이다. 근흥면 안기리 해변에서 태안읍 남산리 해변을 보며 찍은 사진이다.
▲ 장명수 해변 자갈길 주말에는 아내도 장명수 해변을 함께 걷는다. 남편 덕을 많이 보는 셈이다. 근흥면 안기리 해변에서 태안읍 남산리 해변을 보며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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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민주주의가 무참히 모멸 당하는 현상을 겪으며 살고 있다. 4·19 세대인 이래수 박사가 여섯 살 연하인 내게 민주주의를 열렬히 얘기했던 그때로부터 어언 40년이 흐르고 있건만, 그 세월과 상관없이 민주주의는 오늘도 갈지 자 걸음을 걷고 있다.

여러 가지로 코미디 같은 현상들이 연출되고 있는 시대다. 상식과 정도에서 벗어난 일들이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수만 년 이어져 내려온 아기자기한 강들의 형체를 완전히 바꾸어 버리려는 엄청난 파괴 행위도 자행되고 있다.

사회 곳곳에 나부랭이들이 너무도 많다. 정치나부랭이, 법조나부랭이, 언론나부랭이, 문인나부랭이, 성직자 나부랭이 등등 부끄러움을 모르는 나부랭이들이 넘치고 판치는 세상이라, 코미디 같은 현상은 계속 일어난다. 미구에 그것들은 엄청난 '적폐' 현상을 보이면서 우리나라를 큰 수렁 속으로 몰아넣을지도 모른다.

호수 같은 울안의 바다지만, 때로는 제법 힘센 파도가 제방 길 위에 돌멩이들을 잔뜩 올려놓기도 한다.
▲ 장명수에도 이런 풍경이 호수 같은 울안의 바다지만, 때로는 제법 힘센 파도가 제방 길 위에 돌멩이들을 잔뜩 올려놓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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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11월 만추의 계절이다. 세월의 덧없음과 인생 무상을 좀더 명료하게 체감할 수 있는 시기이다. 천주교는 이 달을 '위령의 달'로 정하고 세상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할 것을 권고한다.

나는 세상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이 조락의 계절 속에서, 밀물과 썰물이 정교하게 교차하면서도 황막한 때가 많은 장명수의 빈 갯벌에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저 나부랭이들, 상식과 정도에서 벗어나는 행동으로 코미디를 연출하는 저 정치나부랭이들과 법조나부랭이들, 언론나부랭이들과 성직자 나부랭이들의 개과천선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무릇 나부랭이들의 미망과 횡포로부터 나라의 위신과 민주주의가 되살아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태그:#가을 해변, #장명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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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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