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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잔 바람에도 휘청 누워야 하는 존재, 또는 눈에 침이 찔려 노예가 된 존재를 가리켰다 한다.(고문 진태하 교수 글씨)
▲ 슬픈 글자 민(民) 원래 잔 바람에도 휘청 누워야 하는 존재, 또는 눈에 침이 찔려 노예가 된 존재를 가리켰다 한다.(고문 진태하 교수 글씨)
ⓒ 진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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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民主主義)의 주인으로서의 존재(存在), 백성을 일컫는 민(民)자다. 굴곡(屈曲) 심한 나라의 역사에서 그 의미 더 크겠다. 원(怨)과 한(恨)도 깊겠지. 그러나 민주의 쟁취 과정에 환희(歡喜) 작약(雀躍) 또한 우뚝 빛났을 터. 더욱이 '나'와 '너'를 가리키는 말이지 않는가. 중간 크기 국어사전에 이 글자가 들어간 단어만 3백개 이상이다.

자전(한자사전)은 '사람 공민(公民) 인민(人民)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 백성(百姓)'이라는 정의(定義) 다음에 참 쓸쓸하게 이 글자 생성(生成) 때의 의미를 풀었다. 당시가 원시적 군주제 시대였다는 점을 염두(念頭)에 두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황당하고도 서글픈 이야기다.

'백성(百姓)은 천한 신분을 타고 나며 눈 먼 사람이라 생각했음. 눈이 보이지 않는 데서 무지(無知), 무교육인 사람, 일반 사람이란 뜻. 먼 옛날에는 사람을 신에게 바치는 희생으로 하거나 신의 노예(奴隸)로 삼았음. 그것이 민(民)이었다고도 함'

어떤 문자학자는 종정문(鐘鼎文)이라고도 하는 금문(金文)에 그려진 모양을 살펴 '눈을 침으로 찔러 노예로 삼은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위의 풀이와 상통(相通)하는 바가 있다.

백성이라는 같은 새김[訓]을 갖는 '맹'이라는 음(音)의 䇇, 甿, 氓자를 보면 당시의 백성됨의 신산(辛酸)함이 새삼 고달프게 다가온다. 심지어 밭(田)에서 망(亡)하는 의미까지를 품고 있지 않는가.

'백성(百姓)이 주권(主權)을 가지고 주인(主人) 노릇함'이라는 오늘날 민주(民主)의 창대한 뜻과 이 글자의 태동(胎動)이 보이는 이러한 격차(隔差)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역사의 변전(變轉)인가, 변증법적(辨證法的) 또는 다른 여러 형태의 투쟁(鬪爭)의 결정체(結晶體)인가.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는 이 민(民)자를 단순히 '백성'이라고 풀었다. 그러나 설문해자에 꼼꼼한 주석(註釋)을 달아 이름 높은 청나라의 문자학자 단옥재(段玉裁)는 저서 <설문해자주(注)>에서 '아마도 싹이 나서 무성해지는 모양을 상형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변정삼 저 '설문해자주 부수자 역해)

토막해설-백성 민(民)
상형문자로 각시 씨(氏) 부수에 속한다. 갑골문에는 포함되지 않고 금문(金文)에 비로소 등장하는데 이 글자 그림의 해석이 달라 풀싹, 또는 눈에 침을 찔러 노예를 삼은 것이라는 풀이가 엇갈린다.

민(民)자와 같은 뜻의 싹 맹(萌)자를 어떤 책에서 맹(氓)이라 잘못 적어 혼란이 있다고 단옥재는 주석(註釋)을 붙였다.

백성을 천시(賤視)하는 생각이 그런 오류(誤謬)를 불렀을까? 잠잘 면(眠)처럼 다른 글자의 소리를 만들어주는 요소로도 쓰인다.

문자학자 진태하 교수도 저서 '한자학 전서(全書)'에서 '해석이 통일되어 있지는 않으나 옛 자형들을 볼 때 본래 풀싹의 모양(模樣)을 그린 것인데, 뭇 백성이 임금에 대하여 순종함을 비유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쯤에서 일반 대중이라는 의미로 전용(轉用)된 영어 낱말 그래스루츠(grass-roots)(풀뿌리)가 나와야 한다. 풀뿌리라는 뜻. 우리말 민초(民草) 또한 그 뜻과 쓰임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 시작은 잔바람에도 휘청 눕는 보잘 것 없는 졸(卒)의 존재였지만, 역사(歷史)와 신화(神話)의 세례로 결국(結局)에 이르러서는 나라(國]와 '맞장'을 뜨기도 하는 긍지(矜持)의 시민, 씨티즌(citizen)으로 변신하는 것이 민(民)이자, 백성(百姓)이다. 국민(國民)이기도 하고.

이 글자의 반대어(反對語)를 열거한 한자사전의 목록이 눈길을 끈다. 임금 황(皇) 제(帝) 왕(王) 군(君) 따위 다음 신하 신(臣), 벼슬 관(官) 리(吏) 등이 따르는데 선비 사(士)도 들어있다.

지금은 없는 임금 따위는 논외(論外)로 치더라도 민(民)의 대리인(代理人)으로서의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관리(官吏) 등 세금으로 일 삯을 받는 이들이 백성을 졸(卒)로 여기는 시대착오(時代錯誤)의 어리석음을 범한다면 언제든지 민(民)은 그들을 등진다는 뜻이겠다. 심지어 학식과 경륜을 갖춘 선비(士)마저도 예외는 아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사회신문 한자교육원 홈피(www.yejiseowon.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이 신문의 논설주간으로 한자교육원 예지서원 원장을 함께 맡고 있습니다.



태그:#민주주의, #시민, #사회, #선비, #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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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등에서 일했던 언론인으로 생명문화를 공부하고, 대학 등에서 언론과 어문 관련 강의를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얻은 생각을 여러 분들과 나누기 위해 신문 등에 글을 씁니다. (사)우리글진흥원 원장 직책을 맡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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