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 필리스의 박찬호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박찬호 ⓒ Philadelphia Phillies

'꿈의 무대'에 도착하기까지 무려 16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오랜 기다림 끝에 잡은 기회인만큼 감회가 남다를수밖에 없다.

 

박찬호의 소속팀 필라델피아 필리스는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우승을 확정지으며, 이제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 뉴욕 양키스와 7전 4선승제의 월드시리즈에서 맞붙게 됐다. 메이저리그 16년차를 맞이하는 박찬호로서는 생애 처음이자, 한국선수로는 2001년 김병현(당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 이어 두번째 월드시리즈 도전이다.

 

박찬호는 소속팀 필라델피아가 월드시리즈 진출을 확정짓고 난 후, 동료들과 승리의 환호를 나누며 누구보다 크게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무리도 아니다. 불과 2년 전 뉴욕 메츠에서 방출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사실상 한물 갔다는 평가를 받으며 야구인생의 기로에 놓여 있던 박찬호가 어느새 월드시리즈 진출팀의 일원으로 멋지게 재기하리라고는 누구도 쉽게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강팀의 프리미엄을 등에 업은 무임승차가 아니라, 당당히 불펜의 핵심요원으로 지난 1년간 묵묵히 팀을 위해 쌓아올린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기에 더욱 값지다.

 

박찬호의 끝나지 않은 도전

 

1994년 LA 다저스에서 데뷔한 박찬호는 16시즌 동안 6차례나 10승 이상을 거두고 통산 120승을 이뤘지만 유독 포스트시즌과는 인연이 없었다. 풀타임 메이저리거 첫 해이던 96년 불펜요원으로 처음 포스트시즌 엔트리에 들었으나 팀이 1라운드에서 3전 전패로 맥없이 탈락하며 한 차례도 등판 기회를 잡지 못했다. 이후 97년부터 2001년까지 5년간 75승을 거두며 메이저리그 최정상급 선발투수로 약진했던 전성기에는 정작 팀이 번번이 포스트시즌 문턱에서 탈락하며 분루를 삼켜야 했다.

 

FA 대박을 터뜨리며 텍사스로 이적한 2002년 이후에는 번번이 부상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고질적인 허리부상에 신음하던 박찬호는 '먹튀'라는 비난을 받으며 수년간 슬럼프에 허덕여야 했고, 팀 성적도 신통치 않았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팀을 옮긴 2006년에 내셔널리그 디비전시리즈에서 한 차례 등판하며 박찬호는 무려 10년여만에 가을야구와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다. 하지만 정규시즌 중반에 얻은 갑작스런 장출혈 증세로 인하여 포스트시즌에서 기대만큼 많은 기회를 얻지는 못했다.

 

지난 2008년에는 친정팀 LA 다저스로 복귀하며 내셔널리그 챔피언전에서 생애 최다인 포스트시즌 4경기에 나서 구원투수로 1.2이닝간 1안타 무실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다저스는 1승4패를 당해 월드시리즈를 밟지 못했다. 지난 시즌까지 박찬호의 포스트시즌 성적은 5경기에서 3.2이닝간 무실점이었다.

 

박찬호는 올시즌 다저스를 떠나 '디펜딩 챔피언' 필라델피아로 팀을 옮겼다. '눈물의 기자회견'을 통하여 WBC 출전 고사와 대표팀 은퇴까지 선언하는 초강수를 두면서 내린 선택이었다. 아직 못다한 꿈인 선발 재도전과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루기 위한 마지막 도전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절반 이상의 성공이었다. 시즌 초반 선발 투수로 활약하던 박찬호는 시즌 도중 불펜으로 밀려나기는 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최고의 피칭을 선보이며 어느덧 불펜진에서 없어서는 안될 선수로 자리잡았다. 올 시즌 성적은 3승3패 13홀드 평균자책점 4.43. 선발로 나설 때 성적(1승1패 평균자책점 7.29)은 다소 부진했으나, 불펜으로 전환한 뒤로는 2승2패 평균자책점 2.52를 기록했고, 특히 단 한 개의 피홈런도 허용하지 않은 안정감을 자랑했다.

 

지난해와 소속팀만 바꾸어 다시 맞붙은 이번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4경기에 등판해 3.1이닝 간 평균자책점 8.10, 1홀드 1패를 기록했다. 사실 이번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박찬호의 출장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시즌 막판 사타구니 통증으로 부상자 명단에 등재됐고, 콜로라도 로키스와 디비전시리즈에도 제외됐다. 야구인생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박찬호의 앞길을 가로막는 부상에 본인도 좌절감을 숨기지 못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박찬호는 언제나 그렇듯이 포기하지 않았고, 막바지까지  재활을 위하여 구슬땀을 흘린 끝에 결국 챔피언십시리즈 명단에 합류하는 기쁨을 맛볼수 있었다. 챔피언십 4경기에서 3실점을 기록하는 동안 1- 4차전은 모두 1이닝 무안타 무실점으로 선방했고, 2차전에서는 0.1이닝간 2실점을 기록했으나 수비실책의 영향을 받았다. 5차전에서도 1이닝 2피안타 1실점을 기록했다.

 

다소 기복이 있었던 게 아쉽지만, 정작 우려했던 구위에는 크게 흠잡을 데가 없었다. 특히 36세의 박찬호가 포스트시즌에서 150Km대를 넘나드는 직구를 구사하는 모습은, 거의 전성기 시절의 위용을 방불케하며 많은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변이 없는 한 찰리 매뉴얼 감독은 이번 월드시리즈에서도 박찬호를 중간계투진의 핵심 요원으로 기용할 것이 유력시된다. 다저스와의 챔피언십 시리즈 내내 박찬호를 중용했고, 중요한 박빙의 승부처에서 투입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신뢰를 짐작케 한다. 라이언 매드슨-스콧 에어-브래드 릿지로 이어지는 필승계투진의 한 축을 담당해줘야 할 박찬호의 역할은 그만큼 중요하다.

 

공교롭게도 상대가 2001년 김병현에게 월드시리즈의 한을 남겼던 뉴욕 양키스라는 점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당시 리그 특급마무리 투수로 군림하던 김병현은 양키스와의 2승 1패로 앞서던 월드시리즈 4-5차전에 연이어 등판하며 두 번이나 9회 닮은꼴 홈런을 허용하며 마무리에 실패했다. 팀은 극적으로 역전 우승했지만 김병현은 한동안 극심한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리기도 했다.

 

다행히 박찬호는 그간 양키스전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다. 통산 성적은 4경기에 등판하여 평균자책점 3.38로 2승 무패를 기록했다. 양키스 주축 타자들과의 맞대결에서도 강한 모습을 보였다. 가장 관심을 모으는 일본인 타자 마쓰이 히데키와 대결에서는 7타수 무안타로 절대 우위를 보였고, 주장 데릭 지터에게 7타수 1안타(.143) 톱타자 저니 데이먼에게 13타수 2안타(.154)로 선방했다.

 

김병현과 달리, 박찬호의 보직은 미들맨으로서 마무리로 기용되거나 오랜 이닝을 소화할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경기의 흐름을 좌우할 수 있는 박빙의 상황에서 등판할 확률이 높은 만큼, 압박감을 이겨낼 수 있는 심리적 강인함이 필요하다.

 

박찬호는 이미 데뷔 16년간 선수로서 모든 것을 다 이뤘다. 부와 명예, 그리고 가족의 행복까지도 얻었다. 야구공 하나로 눈물과 웃음을 거듭하며 파란만장한 인생역전의 드라마를 써내려온 박찬호에게 이제 남은 것은 못다한 월드시리즈 우승의 꿈을 이룸으로서 '아메리칸 드림의 마지막 퍼즐을 완성하는 일뿐이다. 그의 야구인생을 지켜보며 동시대를 호흡해왔던 팬들에게 있어서도 어느덧 베테랑이 된 박찬호의 후회없는 월드시리즈 선전을 기원하는 마음이 절실하다.

2009.10.27 11:38 ⓒ 2009 OhmyNews
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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