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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꽃의 원산지는 남미로 알려져 있다.
▲ jacaranda 이 꽃의 원산지는 남미로 알려져 있다.
ⓒ 마포의 백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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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한국을 떠나 이 곳에 온 지 5개월이 되었습니다. 악명 높았던 독재자 박정희가 부하의 손에 최후를 맞은 역사적인 날이기도 하군요(10월 26일). 곳곳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을 보면서 이 곳에 온 이유를 다시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지금 시드니에는 보라색 Jacaranda가 만개하였습니다. 이 곳의 본격적인 봄을 알리는 전령사쯤 되는 꽃이라고 하겠습니다. 곳곳에 보라색이 찬란하게 물든 광경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에서 봄을 알리는 벚꽃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꽃이 호주의 12학년 학생들에게는 매우 반갑지 않은 꽃이라도 합니다. 바로 이 꽃이 만발하는 시기에 그들은 대학입학을 위한 HSC(Higher School Certificate)을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남들은 모두가 봄의 정취를 만끽하는 때에 그들은 중요한 시험을 거쳐야 하니 그리 반갑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곳 역시 학생들에게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아이들을 공부와 시험의 지옥에서 해방시키려고 했지만 여기서도 역시 완전한 해방을 선사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좀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한국에서의 편리한 생활을 뒤로 하고, 많은 지인들과의 따스한 교류도 접어둔 채 이곳에 온 이유가 희석되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곳에 와서 문득문득 약한 향수에 젖어 막연히 한국을 그리워하는 일조차 이미 감내하기로 했는데, 이 곳도 역시 입시라는 것이 우리 아이들을 괴롭힐 수 있겠다고 생각하니 그리 달갑지는 않습니다.

평판 낮은 대학이라도 사회 진출시 특별히 불리할 게 없어

하지만 역시 한국을 떠난 목적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이내 자위하게 됩니다. 우선 대학입시라고 하더라도 한국에서의 그것과는 직접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대학을 한 줄로 완벽하게 서열화시켜 놓고 소위 말하는 인류대학을 가기 위해서 목을 메는 현상이 이 곳에는 없습니다. 이 곳도 역시 평판이 좋은 대학이 있고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대학이 있지만 뚜렷한 서열을 매기기는 좀 곤란한 점이 많습니다. 또 평판이 좋은 대학을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 것이 곧 그 학생의 밝은 미래를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좀 평판이 낮은 대학을 나온다고 사회에 진출할 때 특별히 불리할 것도 별로 없습니다.

또 경쟁의 강도도 한국의 그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 외고나 과학고 등에 진학하는 것이 유리하고, 그런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 중학생들이 엄청난 사교육비를 지출하는 일도 별로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심지어 초등학생들도 사교육비를 엄청나게 지출하며 하루 종일 공부하는 경우도 있으니 확실히 이곳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이 곳에서도 한국이나 중국 그리고 인도출신 학생들의 경우 Primary School부터 Selective(시험 봐서 들어가는 공립학교)에 진학하려고 사교육을 시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런 학생들이 평판 좋은 대학에 많이 진학하는 것도 역시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그들의 인생 전체를 결정짓는 정도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한국에서처럼 일류대학을 나오면 시작부터 훨씬 유리한 위치에 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10학년을 마치고 주립기술전문대학(TAFE)에 가서 기술을 배운 사람들이 훨씬 높은 보수를 받고 경제적 안정을 확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학력이 높은 사무직과 현장에서 노동하는 기술직이 서로 계급 차이를 인식하는 것도 아닙니다. 각자 다른 일을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나에게는 훨씬 편안한 한국생활을 접고 아이들을 무한경쟁의 늪에서 탈출시킨 것을 옳은 결정이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 5개월에 불과한 이 곳 생활에 우리 부부도 아이들도 그리 잘 적응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상당히 불편하고 마음에 맞지 않는 일도 많습니다. 하지만 다소간 각오를 했던 일이기에 당황하지는 않습니다.

한국에서 작은 중소기업이지만 임원으로 편하게 생활하던 것에 비하면 지금 내 생활은 정말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공부하러 가는 아내를 기차역에 내려주고, 아이들을 학교까지 태워다 주고 나서 TAFE에 갑니다. 3시쯤 끝나면 다시 아이들과 아내를 태워서 집에 옵니다. 잠시 한 숨을 돌리고는 5시에 나가서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뭐 그리 꺼릴 것이 없으니 공개하자면 큰 회사 사무실을 청소하는 일입니다.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열심히 하고 시급으로 12불을 받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수입이라곤 집세의 절반도 안 되는 푼돈에 불과합니다.

Center Link에 2주마다 아이들 키우라고 주는 돈까지 합해서 겨우 집세를 낼 수 있을까 말까 합니다. 나머지 생활비와 공과금 등은 모두 한국에서 가져온 돈을 야금야금 덜어 쓰고 있습니다. 물론 TAFE에 다니지 않고 적극적으로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면 생활비는 충당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곳에 살려면 적어도 의사소통을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수준의 영어는 해야 하고, 또 장차 안정된 일을 얻기 위해서 공부를 해야 하기에 은행잔고가 조금씩 줄어드는 것을 감수하고 있습니다. 이 곳에 온지 2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영어 한마디도 못하고 한국인하고만 아울려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나름의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그리 따라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도 이 곳에서 학교생활을 하며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이제 1학년인 작은 애는 별로 언어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그냥 어울려서 잘 노는 편이죠. 그런데 5학년인 딸아이는 그렇지 못합니다. 한국의 강도 높은 경쟁과 시험에서 해방된 대가를 나름 톡톡히 치르고 있는 중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키울 자신이 없습니다

사실 온 식구가 적응을 위한 몸살을 앓고 있어서 지금 그리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나마 지금은 훨씬 나아진 셈입니다. 처음에 도착했을 때는 정말 암담했습니다. 마치 이 곳이 추운 겨울이어서 날씨부터 고통스럽기만 했습니다. 기거할 집을 구하기도 만만치 않게 어려웠고, 언어장벽에 대한 공포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가장 큰 고통은 마음의 고통이었습니다. 한국을 떠나오던 때에 고 노무현 대통령의 국민장 기간이었습니다. 한국의 정치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휴머니스트를 가슴에 묻어야 하는 고통이 컸습니다. 정신이 없고 힘든 시간 중에도 문득문득 그분의 서거가 가슴속에 분노를 자아내게 만들었습니다. 누가 이렇게까지 만들었는가를 생각하며 분노하고 또 분노했습니다. 시드니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분향을 하고 49재를 한인들과 함께 준비하고 치르면서 분노를 다스렸습니다.

가슴속의 분노가 조금씩 익숙해질 무렵 이번에는 김대중 전대통령의 서거소식을 들어야 했습니다. 한반도의 평화, 한국의 민주주의, 지역주의 정치에 대한 문제의식, 빈부격차의 해소 등을 추구하던 두 분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것이 지금도 분하고 화가 납니다. 화를 다스리는데 여전히 애쓰고 있습니다. 우리 현대사에 긍정적 의미와 커다란 족적을 남기신 두 분을 한꺼번에 잃은 분노가 하필이면 이민생활 시작부터 찾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아이들이 자신의 친구를 경쟁의 상대로만 여기고 이기고 딛고 설 대상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일은 피할 수 있어서 선택한 일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민의 목적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심각히 퇴행하고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친 독재자 박정희의 유령이 통치하는 곳에서 마음에 고통을 느끼며 속을 태우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한국을 떠난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입시지옥에 시달리는 아이들, 오로지 친구는 경쟁에서 이겨야 할 대상에 불과한 아이들, 휴머니즘이 없는 사회, 정글의 법칙과 적자생존의 원칙이 지배하는 나라, 여전히 국민은 통치의 대상일 뿐 주권자로 대우받지 못하는 대한민국, 그 곳에서 아이들을 키울 자신이 없기 때문에 나는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Jacaranda가 흐드러지게 핀 시기에 그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여유롭게 자연을 관조할 여유는 없지만 적어도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살아가고 있지는 않으니 견딜 만은 합니다.

덧붙이는 글 | 개인블러그에 함께 올립니다.



태그:#이민생활, #입시지옥, #H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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