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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가을 날씨가 따사롭습니다. 아침과 저녁으론 쌀쌀한 기온을 전해주고, 낮에는 따사로운 햇살과 바람이 불어 한층 더 가을임을 자랑하는 듯합니다. 산에는 이미 많은 잎들이 옷을 갈아입고 있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그러한 가을 오후입니다.

 

휴일을 쉴 수 없는 저로서는 가끔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산과 들녘의 정취만으로 가을을 실감해야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계절이 지나감을 느낄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기며 삽니다. 올해 가을은 유달리 풍년인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제 눈으로 보이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쉬는 날 하루, 시골 어머니 댁에 갔습니다.

 

 

쉬는 날이 남들과 다르다 보니 고향집 어머니를 찾아뵙는 횟수도 예전과 달라 갈수록 미안함만 더 커가는 것을 어찌할 수 없네요. 자주 찾아뵙겠노라 약속은 했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하니 어머니도 이제 가끔 전화를 주시곤 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들에서 살다시피 하시니 자식들 생각이 그리 많이 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저기 지천으로 깔린 풍성한 먹을거리 앞에선 어머니도 애가 타는지 요즘은 전화 하실 때마다 강한 어조로 말씀을 하십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다른 일을 미루더라도 고향집을 찾아갑니다. 십 여 년이 넘도록 차 없이 버스 타고 다닌 시골 고향집입니다. 어머니의 잦은 부름에 늘 버스타고 굽이굽이 돌아가야만 했던 그 길을 요즘은 자동차가 있어 가벼운 마음으로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습니다. 정말 무어라 말할 수 없이 고맙고 행복합니다. 비록 번쩍거리는 새 차는 아니어도 덜컹거리는 아주 오래된 중고차일망정 저의 가족에겐 행복을 싣고 달리는 희망차인 셈입니다.

 

논 앞 둑까지 우리의 행복차는 안전하게 주차를 합니다. 들과 밭에서 농작물 하나하나 돌보고 계신 어머니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여름 태풍도 무사히 탈 없이 지나가서인지 벼들은 자연스레 고개를 숙이고, 수확의 그날만을 기다리는 눈치입니다. 대추나무, 감나무, 고추, 배추, 무, 고구마, 콩, 깨…. 따사로운 햇살 아래 모든 것들이 풍성하기만 합니다.

 

어디 하나 버릴 것 없을 정도로 어머니의 손길을 받으며 잘 자랐습니다. 어머니는 호미를 내려놓으며 단감나무 아래 그늘진 곳에 앉으셨습니다. 밭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는 제게 먼저 말을 꺼내십니다.

 

"너거 언니들은 함에 와서 이것저것 다 챙기 가는데 니도 좀 빨리 오지 와 인제 왔노?"

"와아, 시간되는 사람 와서 묵을거 챙겨가면 되는데 엄마는 무신 걱정을 하노. 난 괜찮다."

"그래도 내 맘은 안글터라. 저기 있는 단감 잘 익은 것 마이 따가라아."

 

어머니는 밭 구석구석 서 있는 단감나무들을 가리키며 그동안 언니들이 따간 단감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내셨습니다.

 

막내라고 항상 신경을 쓰고 있어서 그럴 때마다 제가 아른거렸나 봅니다. 곳곳에 서 있는 단감나무 가까이 가보니 정말 단감들이 때 아닌 풍년입니다. 가지마다 축 늘어져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한 자세로 서 있었습니다. 어린 묘목을 사서 심은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어느새 자라 결실을 맺어 넉넉함을 선물해주니 참 고마울 따름입니다. 어머니는 늘어져 땅에 떨어지는 단감들을 보면서 이웃 아파트 사람들한테 이미 많이 따다 팔았다고 했습니다.

 

행여나 자식이 오면 따 주려고 놔두지 말고 그렇게 해서라도 팔아 고등어라도 사 드시라고 하니, 그래도 제철 난 그것도 처음으로 열매다운 열매를 맺은 단감을 자식 입에 넣어주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어찌 고등어가 맛이 있겠냐며 타박을 주십니다.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그 마음까지 못 헤아려 드린 것 같습니다.

 

단감 따가라며 요 며칠 전화를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부모 마음이 다 그런 것이겠지요. 집에 들고 갈 것들을 큰 포대자루에다 가득 넣어주셨습니다. 커고 포실한 것들로 골라 다듬어 넣어주시는 어머니 모습을 보니 마음이 두 갈래였습니다. 까맣게 그을린 피부에 주름진 얼굴, 수건을 두르고 밭고랑을 이리저리 다니는 어머니,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뭉클함이 밀려들었습니다.

 

 

늘 그런 어머니를 보고 고마움에 마음을 담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 한 해 두 해 다 달리 느껴지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습니다. 부쩍 기운 없어 하시는 것이 걱정이고, 시간에 쫓겨 더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것도 죄스럽기까지 합니다. 가을 수확만큼이나 찬거리들을 많이 담아 들기조차 힘든 포대자루를 어깨에 메고 논두렁을 걸어 나왔습니다.

 

가지가지 주렁주렁 매달린 단감들을 따가라며 전화하시던 어머니의 성화에 유난히 잘 익은 단감 한 포대도 차에 실었습니다. 남들보다 월동준비를 일찍 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매번 와서 느끼고 가는 것이지만 단감 한 포대에 어머니나 제가 마치 마음이 하나가 된 것처럼 행복해졌습니다. 어머니의 사랑만큼이나 달달한 단감을 먹고 올 가을도 제 마음에 사랑을 가득 담아 봅니다.


태그:#단감, #가을, #수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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