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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편이 넘는 영화를 찍은 임권택(76) 감독은 고백했다. "내가 만든 영화가 100편이라고 하는데 절반 정도는 흔적도 없어졌으면 한다. 내 영화를 내가 보고 있으면 열이 나서 못 본다. 자기 작품을 안 보기로 유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임 감독은 20일 오후 창원대에서 "임권택의 영화 이야기"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교수와 학생 등이 강의실을 가득 메운 가운데, 임 감독은 2시간 동안 자신의 영화 세계를 털어놓았다.

 

"어느날 텔레비전을 보는데 60년대 영화가 나오더라.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보니 내가 만든 작품이더라. 영화를 저렇게밖에 만들지 못했나 싶은 생각에 쥐구멍이 있으면 들어가고 싶을 정도였다. 1961년에 데뷔했는데 1970년까지 10년 사이에 50여편을 찍었는데, 당시는 단지 흥행만을 생각하며 영화를 찍었던 것 같다."

 

임 감독은 "돌이켜 생각하면 저급한 작품일지언정, 무지하게 열심히 찍었던 것 같다"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찍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흥행에 실패하면 감독 생활을 접어야 할 정도로 심한 타격을 입는 직업이었다"고 말했다.

 

그런 뒤 임 감독은 미국 할리우드의 B급이나 C급 정도의 영화라도 만들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그런 가당찮은 생각을 하며 10년 정도 영화를 만들었는데, 제작비와 기술, 배우 등 여러 조건에 한국영화를 미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한국 사람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한국영화를 찍자는 생각을 했다. 허황된 거짓말을 찍지 말고, 한국사람만이 갖는 문화적 개성을 찍자고 생각했다. 기술 등 모든 면에서 미흡하지만 우리만이 가지는 문화적 개성이나, 세계 속에서 한국 사람의 삶은 누구나 찍을 수 없기에, 특화시키자는 생각을 했다."

 

임권택 감독은 스스로 평론가들로부터 '동심이 없다'는 소리를 듣는다며, 그 이유를 설명했다.

 

"동심이 선천적으로 없거나 어른의 입장에서 동심을 어린이다운 정서로 찍어낸다는 것을 무엇인가 기피한다든가 싫어하는 감독이 아닌가 하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 평가를 받으면서 깜짝 놀랬다. 그게 사실 맞는 말이다. 나는 그런 동심을 살 시대를 살지 못했다. 해방 후 좌우익 갈등과 전쟁, 5.16을 겪으면서 정서가 메마를 수밖에 없었다. 꼭 갖추어야 할 정서를 잃고 살았던 감독이었던 것 같다."

 

임 감독은 "미국영화처럼 찍어내는 게 체질에 배어 있었는데, 그런 체질을 벗겨내는 데 10년 정도 걸렸다"면서 "그런데 한국의 정서가 많이 담긴 영화감독이라 생각하고 시작해보니 주제는 있지만 영화가 재미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1980년대 들어 '인본'을 주제로 한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강수연 등 여성배우들이 외국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을 때 그는 "주변에서 친구들이 여배우 상이나 타러 쫓아다니느냐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영화 <장군의 아들>을 소개하면서 그는 "제작사의 꼬임에 빠졌던 것 같다"고 술회했다.

 

"당시에는 외국 영화제에 내보낼 영화를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제작사의 교묘한 꼬임에 빠져 들었던 것 같다. 당시 남성들이 사내다움이 없어지고 중성화되는 시대에, <장군의 아들>을 찍어서 사내다움을 보여 주자고 했다. 당시 홍콩 무술영화를 보면서 싸움판 같지도 않았고, 급소를 맞았는데도 다시 일어나고 하는 게 무슨 서커스 기예단 같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사내다운 영화를 만들자고 생각했다. 제작사측에 신인배우를 쓰자고 했더니 응해주었다. 그런데 배우를 모집하는데 진짜 깡패들이 몰려오기도 했고, 연기교육을 받은 사람은 몇 명 안됐다."

 

영화 <태백산맥>에 대해, 그는 "<장군의 아들>을 찍은 뒤 <태백산맥>을 찍기로 하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정부가 이념문제를 객관적으로 다룰 수 없다며 못하게 했다"면서 "다음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에 하자고 해서 1년 정도 덮어놓았던 것"이라고 말했다.

 

배우 오정해씨에 대해, 그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춘향이 선발대회' 같은 프로그램을 보다가 오정해양이 나오기에 보는 순간 가슴이 덜컹거렸다"면서 "유럽의 친구들은 간혹 한국 배우들은 왜 전부 쌍꺼풀이 되어 있고, 서양 여자 흉내를 내느냐고 하며 동양여자다운 외모를 영화에 출연시켜야 되지 않느냐고 했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갖고 있던 차에 오정해양을 보는 순간 바로 저 배우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영화 <서편제>에 대해, 그는 "말은 쉬운데 판소리라는 말을 어떻게 화면으로 보여줄 것인지, 가사나 이야기가 영상과 어떻게 잘 맞아떨어질 것인지, 소리의 맛을 어떻게 살려낼 것인지가 고민이었다"고 말했다.

 

"어떻게 찍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소신만 갖고 장소를 찾아 돌아다녔다. 스텝도 장소를 찾아 돌아다니면서 나보고 '영화를 많이 했으니까 소신이 있는 놈'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앞이 캄캄했는데 그렇다고 표시를 낼 수 없었다. 정말 귀신이 도와준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막막하다가도 어떤 장면이 잡히기도 하더라. 어떤 장면에서는 회오리 바람이 불어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진짜 바람이 불더라. 마지막 장면을 염전에서 찍는데 염전은 눈이 내리면 바로 녹아버린다. 그런데 정말 눈이 퍼붓는 것이었다."

 

임권택 감독은 "뒤에 돌아가신 김소희 선생께서 감사패를 주면서 억울하게 살다간 명창들의 원혼이 힘을 보태주어 <서편제>를 만들었다고 하셨다"면서 "당시에는 무슨 귀신이 돕느냐고 했는데 나이가 들어서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다른 감독들도 귀신이 도운 영화는 흥행한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영화 <춘향뎐> 등을 소개한 그는 "긴 세월 동안 무식하게 노력했는데, 외국의 영화 대가들에 의해 내가 해온 작업들이 긍정적으로 평가받은 것 같다"면서 "이상하게도 내가 파고들었던 영화는, 우리 문화를 캐고 팔아먹는 쪽에는 다른 감독들이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독식하며 살았던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임권택 감독은 "지금까지 영화를 오래 해 올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 말고 다른 것을 조금이라도 알았어도 달랐을 것이다. 고비가 많았다"면서 "절박한 벽과 만날 때는 다 놓아버리고 도망가고 싶었고, 영화밖에 모르니까 도리없이 영화에만 매달린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계속 저질러보기를 했다. 내 자신이 영화를 찍으면서도 어떤 결과를 만날 것인지 의구심과 불안함을 갖고 있었다. 내가 찍은 필름은 나와의 싸움이었다. 적당한 성과를 얻었다고 해도, 내가 그 자리에 머물렀다고 해서, 편안해지면 그때부터 죽는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찍은 영화를 보면서 이것밖에 못 찍었나 하는 생각은 도처에서 만난다. 내 스스로 이만하면 됐다고, 완성도 높은 영화를 만들기는 이미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단지 완성도 높은 영화를 지향하면서, 치열하게 열심히 하다가 영화 인생이 끝나는 것도 바람직한 것 아닌가 생각한다."


태그:#임권택 영화감독, #서편제, #춘향뎐, #창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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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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