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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겨울, 군대 보내는 첫째 아들을 따라온 아버지를 뒤로한 채 춘천102보충대로 쓸쓸히 입소했었다. '군대 가면 죽는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던 아버지는 춘천과 가까운 화천 최전방에서 기나긴 군 복무를 했었다. 당시에는 북한군과의 교전, 초병들을 노린 침투 등으로 정말 살벌했었다 한다.

 

술에 취했다 하면 과거 아픈 기억을 토해내곤 했던 할아버지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북한군에 잡혔다 구사일생으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중에 한국전쟁 참전 국가유공자로 인정받긴 했지만, 수십 년의 세월을 복부의 상처처럼 지워지지 않는 전쟁의 기억들로 남모르게 아파했다.

 

한국전쟁 당시 할아버지처럼 1만3000여 명의 군인들이 북으로 잡혀갔다 휴전 후 경기도 파주 임진강의 경의선 철교를 건너 고향으로 돌아왔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픈 과거와 자신의 힘겨웠던 군복무 시절 때문에, 아들만이라도 육군보다 의무경찰에 지원하길 바랐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했던 1996년, 당시만 해도 대학가 시위현장(연세대사태)에서 전투경찰이 된 동기와 선배와 마주치는 일들은 비일비재했다. 

 

그 괴로운 만남을 피하기 위해, 왜소한 몸집이지만 아버지의 걱정이 괜한 것이니 걱정 마시라는 철없는 생각에서 군에 입대했고, 정신없는 고성과 명령, 감시, 경직된 자세로 편치 않았던 보충대에서 부대배치를 받았다. 부대배치 후 전세버스에 줄줄이 올라탄 까까머리들은 사방이 온통 산뿐인 강원도 양구의 한 신병교육대에 내렸고, 그때부터 고난의 몇 주간을 보냈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지독한 추위를 견뎌낸 뒤 자대에 배치되었고, 2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을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된 그곳에서 군복무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365일 내내 밤낮없이 남과 북이 분단된 채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이런저런 사고의 위험인 산재된 그 철책선에서 정말 별 탈 없이 살아 돌아 왔다. 군복무 중 이웃부대-초소에서 총기사고와 폭발사고로 중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는 이들도 있었다.

 

 

이렇게 3대째 이어진 최전방 철책선의 기억이 도서관에서 우연히 마주친 DMZ 사진들 속에서 떠올랐다. 한국전쟁 이후 반세기 만에 민간인 최초로 휴전선을 1997년부터 2년 가까이 3번을 왕복하며 사진작업을 했다는 최병관 작가의 사진책과 사진들에서 아버지와 내가 군복무 했던 화천과 양구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진짜 흔히 볼 수 없는 DMZ 사진들은 지난해 자전거를 타고 오두산전망대에서 파주, 철원, 화천을 빙 돌아오면서 둘러본 민통선의 모습들도 되생각나게 했다. 민간인 출입이 제한된 비무장지대의 아름다운 자연(열목어가 살아있는 두타연 계곡과 대암산 용늪 등)과 전쟁의 흔적, 분단과 대립의 연속선을 담은 사진들을 애잔하게 바라보다 말이다.

 

그런데 남북분단과 휴전선 때문에 자연 본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DMZ가 이런저런 개발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한다. 특히 비무장지대의 생태계 우수성과 자연성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이를 돈벌이용으로 삼으려는 성급한 시도 탓에 DMZ 생명들의 땅이 위협받는다고 작가는 우려하고 있다.

 

* 최병관 작가의 DMZ 사진은 인천 계양도서관 2층에서 29일까지 전시된다.

 

덧붙이는 글 | <울지 마, 꽃들아> / 최병관 / 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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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최근 군복무 가산점제 부활논란과 관련해 여성계에서 남성만의 군복무가 양성평등에 어긋난다며, 여성들도 군대가자는 소리를 한다고 한다. 군복무를 모두 이행하고 예비군 이후 민방위에 편입된, 양심적 병역거부 조차 못한 내가 이런 말을 하는게 우스울지 모르지만, 군대와 군복무는 평등의 차원에서 해석할 만큼 여성들에게 권할 것이 못된다. 제발 다시 생각해 보길...


태그:#DMZ, #철책선, #사진,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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