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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자(임금 지급 금지)문제는 정치적으로 풀어서는 안 된다. 노조도 경쟁하고 재정적으로 자립하면서 떳떳하게 활동하는 게 당당하다. … 노동부 고객은 일하는 근로자이지만 그렇다 해도 국제적으로 기준이 있다."

- 임태희 노동부 장관, 7일 환경노동위원회 노동부 국정감사

 

"임태희 장관이 (복수노조와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문제와 관련해) 원칙론을 피력한 것으로 안다. 그것이 글로벌 스탠더드(국제 기준)이기 때문이다."

- 정정길 대통령실장, 8일 청와대 기자간담회

 

정부가 또 다시 '국제 기준'을 외치고 있다.

 

작년 광우병 사태 때도 정부는 "국제수역사무국(OIE)의 기준에 따라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에 합의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언론들의 취재 결과, '국제 기준'이라는 국제수역사무국의 기준을 따르는 나라는 많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 20개월 이하의 쇠고기를 수입했고, EU 국가들은 그 기준보다 세세하게 광우병 특정위험물질(SRM)을 특정해 제거하길 권고하고 있었다.

 

하반기 노동계 최대 화두인 '복수노조 허용 및 교섭창구 단일화'와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중 전임자 임금지급과 관련된 부분에 대한 정부의 태도도 '알아보면' 그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노동부의 '글로벌 스탠더드', 국제노동기구(ILO) 권고와 배치

 

당장 주무 장관인 임태희 장관이 나서 이 문제가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노사 선진화를 위한 개혁과제"임을 천명했다. 

 

그는 지난 1일 취임사를 통해 복수노조 허용·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가 "글로벌 경쟁시대를 맞아 후진적 노사관계 틀을 새롭게 바로잡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핵심 개혁과제"라고 규정했고, 지난 8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국제적으로도 회사  돈으로 노조활동을 하는 사례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임 장관의 이러한 소신은 국제노동기구(ILO)의 권고와 배치된다. 지난 1998년 11월 국제노동기구는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규정인 노동조합법 24조 2항에 대해 "법률로 금지할 입법적 관여대상이 아니다"고 권고했고, 지난 2월에도 "(전임자 임금)문제에 관해 노동자와 사용자가 자율적이고 자발적인 협상을 통해 해결하도록 할 것"을 권고했다.

 

정부가 도리어 '국제 기준'과 배치된 주장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노동부는 13일 '전임자 문제 쟁점풀이'라는 자료를 배포하며 '국제 기준' 주장을 되풀이했다.

 

노동부는 "국제노동기구(ILO) 기준은 협약과 같은 일반적인 기준이 아니라 한국 노동단체가 제기한 진정에 대한 답변일 뿐"이라면서 "전임자급여는 노조 스스로 부담하는 게 국제기준"이라는 몇몇 국가를 그 예로 공개했다.

 

노동부는 자료에서 "산별노조 전통이 강한 유럽국가는 노조 간부가 기업에 소속된 근로자가 아니기 때문에 원래 입법적 규율이 없었고 한국과 비슷한 기업별 노조 체제인 일본은 사측이 인건비를 포함한 노조 운영비를 지급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영국, 프랑스, 미국도 전임자 역할 있어... 노사 합의 아래 유급 풀타임 활동"

 

반면, 당사자인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입을 모아 "독일이나 프랑스 등에서도 노조전임자의 임금을 사용자가 실질적으로 지급하고 있다"며 노동부의 사례를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은 관련 보고서를 펴내고 프랑스, 영국, 독일, 미국, 일본의 전임자 제도를 조목조목 분석해 "기업 수준에서 노조 전임자에 대한 사용자의 임금지급을 금지하는 법은 사례 국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이와 관련해 김미정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부원장은 "산별노조를 근간으로 하는 외국의 경우에도 '완전전임자'(프랑스), '전임현장위원'(영국), '유급 풀타임 전임자'(미국)가 있어 단체협약을 통해 유급을 보장받고 있고, 독일의 경우에는 종업원평의회에 유급전임자가 있다"고 설명했다.

 

김 부원장은 아울러, "기업별 노조를 근간으로 하는 일본의 경우에도 1949년에 제정된 노동관계법에 의해 사용자의 재정상 원조를 금지했지만 공공부문과 대기업에 '비공식전임'이란 이름으로 풀타임 전임자를 둔다"며 "프랑스는 단협에서 정한 노조 전임자에 대한 사용자의 임금지급 의무를 법으로써 명시하고 있기까지 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김 부원장은 "지난 97년 노동법 개정 이후 전임자 임금 지급 문제를 논의해온 노사정 위원회의 연구 결과 중에도 이 문제를 '국제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며',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도 있다"며 다음의 연구 결과를 예로 들었다.

 

"미국의 경우에도 전임자에 대한 임금지급이 상당부분 이뤄지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전임자에 대한 임금지급을 2002년부터 금지하는 우리의 노동법조항은 국제기준에서 보아 지나치게 엄격한 것으로 생각된다."

- 노사정 위원회, 1999년 전임자 제도개선 방안을 위한 외국사례 연구

 

이 연구에서는 독일, 프랑스, 영국 등에서의 조사에서도 "임금 지급은 법적으로 명시적 규정이 없으나 이를 금지하지도 않는다"며 전임자 임금지급 대상이 국제노동기구의 권고대로 입법대상이 아닌 노사 자율 합의의 대상임을 분명히 밝혔다.

 

노사정위원회 연구결과도.... '국제기준' 가면 뒤엔 어떤 계산이?

 

노동계에서는 정부가 이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국제 기준'을 주장하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를 요구하는 까닭은 '노동운동 말살'을 위해서라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전임자 임금지급이 금지될 경우, 전임자 평균 임금과 노조활동비를 고려하면 300인 미만의 노조는 전임자 없는 노동조합으로 가거나, 노조활동비를 인상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전임자의 역할이 사라지게 된 노조의 교섭력이나 활동이 대폭 위축될 것은 명백해 보인다. 현재 우리나라 전체 노동조합 4900여 개 중 87% 이상이 조합원 300인 이하의 소규모 기업별 노동조합이다.

 

실제로 노동부도 지난 13일 전임자 임금지급이 금지되는 경우 전체 조합원수를 기준으로 약 16.3%에 달하는 노조가 활동이 불가능해질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노동부는 "노조의 핵심활동인 교섭과 협의 활동에 대해서는 유급 처리가 가능하다"며 노조의 교섭 및 협의 활동에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정부에서 노조 전임자 임금을 두고 '국제 기준'이니 '노조의 자주성 회복'이니 말을 할 때면 '고양이가 쥐 생각한다'는 말이 생각난다"며 "산별노조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기업노조의 간부 활동을 위축시키는 것은 노조 활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나 다름 없다"고 꼬집었다.

 

그는 또 "노조 전임자의 활동은 사실 사용자의 동의 아래 노조업무 활동을 하는 것"이라며 "무노동 무임금 원칙이 적용될 대상이 아니다"고 비판했다. 

 

이수봉 민주노총 대변인도 "역사 속에서 노동조합이 자본주의의 '윤활유' 역할을 했다"며 "단체교섭과 고충처리 등 전임자가 처리하는 각종 업무는 사측이 해야 할 역할을 대행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태그:#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복수노조, #한국노총, #총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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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입사. 사회부(2007~2009.11)·현안이슈팀(2016.1~2016.6)·기획취재팀(2017.1~2017.6)·기동팀(2017.11~2018.5)·정치부(2009.12~2014.12, 2016.7~2016.12, 2017.6~2017.11, 2018.5~2024.6)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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