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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올해로 50대 중반이에요. 초등학교 시절에 성폭행을 당했는데 세월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힘들어져요. 고통과 열등감 이런 게 더 심해져요.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그것이 어제 일어난 일처럼 더 또렷해져요. 어떤 때는 분노가 일어나 잠을 못 자고 벌떡 일어나요. 부엌의 식칼을 들고 와 베개를 그 놈이라 생각하고 수도 없이 베개를 찔러가지고 베개를 수십 개나 버렸어요. 절대로 안 잊혀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성폭행을 당한 어느 여성의 증언이다.

KBS창원 방송국은 지난해 라디오다큐멘터리 '성범죄보고서-소녀를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성폭력 피해자들의 실상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이 다큐는 '2008년 올해의 좋은 프로그램상'과 라디오다큐멘터리 부문 한국방송대상을 수상한 데 이어, 올 10월에 아시아태평양방송연맹의 ABU 라디오 다큐멘터리 부문 특별상을 수상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최근 '조두순 사건'으로 다시 한 번 사람들 입에 회자됐다.

'성범죄보고서-소녀를 위한 나라는 없다'를 제작한 손윤희 피디는 이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이유로 "가벼운 성추행을 당해도 모멸감이 평생을 가는데 심각한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은 얼마나 힘들겠냐"라며 "이제는 그런 아픔들을 세상에 까발려야겠다, 세상도 그런 아픔과 고통을 함께 해야 된다는 생각에 아동성범죄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지난 13일, 손윤희 피디를 만나 다큐 제작과정 및 성폭력 피해자들의 실상을 자세히 들어봤다.

제36회 한국방송대상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한 사람들.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손윤희PD. 라디오지역다큐멘터리 대상을 받았다.
 제36회 한국방송대상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한 사람들.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손윤희PD. 라디오지역다큐멘터리 대상을 받았다.
ⓒ 조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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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 성폭력은 어릴 적 일? 죽을 때까지 간다

"국회법사위에서 밝힌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성인 세 명 중 두 명이 '우리 주변에 성폭력범죄가 발생할 위험성이 높다'고 느끼고 있다고 해요. 늘 잠재적 불안에 떨고 있는 거죠."

그동안 정확한 통계조차 없다가 2008년 처음으로 여성부에서 전국 성폭력피해 실태조사결과를 발표했다. 하루에 10명꼴로 성폭행이 일어나고, 신고 되지 않은 수까지 합하면 실제로 열 배는 더 많다는 미성년자 성폭력 사건들. 성범죄 세계 2위의 불명예를 안고 있는 대한민국. 한때 동방예의지국으로 불리던 우리나라가 왜 이렇게 변했을까. 손 피디는 말한다.

성범죄로 인한 인권침해실태를 진단하고, 성범죄방지를 위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성범죄보고서-소녀를 위한 나라는 없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올해의 좋은 프로그램상과 한국방송대상, 아시아태평양방송연맹 특별상을 수상한  KBS라디오 손윤희PD
 성범죄로 인한 인권침해실태를 진단하고, 성범죄방지를 위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성범죄보고서-소녀를 위한 나라는 없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올해의 좋은 프로그램상과 한국방송대상, 아시아태평양방송연맹 특별상을 수상한 KBS라디오 손윤희PD
ⓒ 조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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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여성들에 대한 인식이 너무 낮아요. 쉽게 여자를 살 수 있는 나라에서 여자들을 어떻게 대접할 수가 있겠어요. 아무렇지도 않게 성도구화를 해버리죠. 평생 지워지지 않는 성폭력피해자들의 그 모멸감과 수치심, 힘없음에 대한 자괴감 같은 것을 생각해보면 성폭행이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친 살인이나 마찬가지인데, '남자가 술 취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는 거죠."

나이 들면 주변에서 어릴 적에 당한 성폭행에 대한 기억을 잊으라고 많이 이야기한다. 근데 세월이 갈수록 피해자들의 고통과 자괴감, 자기 비하 감정은 깊어간다. 결국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자신을 버리는 일도 자주 일어난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일반인들에 비해 자살률이 20배 정도 높다고 한다. 이처럼 어린 시절 당한 성폭행은 아이들의 몸만 상처 내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꿈과 미래, 영혼도 파괴시켜 버린다.

"중학교 배구선수 시절 코치로부터 비 오는 날 성폭행을 당한 여학생이 있어요. 공부를 하다가 비가 오면 그 날이 갑자기 생각나 그 순간부터 아무것도 할 수가 없대요. 손가락도 못 움직이고. 그때에 아팠던 거, 혓바닥 같은 게 막 닿았던 그런 느낌들이 되살아나 옆에서 막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대요. 성폭행 당한 당시의 충격과 고통이 더해진대요. 그러면 아무것도 못해요. 공부가 하기 싫은 게 아니고 못 하게 되는 거죠. 그러면 이런 생각이 든대요. 이렇게 살아서 뭐하냐고.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라고."

어린 아동들은 성폭행을 당하면 음부뿐만 아니라 장까지 파열될 수가 있다고 한다. 장이 파열되면 생명까지도 위험할 수 있다. 나팔관이 손상되거나 성병에 걸리면 불임증에 걸리거나 향후 자궁암에 걸릴 수도 있다. 

"어린애를 성폭행하는 것은 살인과 마찬가지예요. 아니 살인보다 더한 죄죠.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릴 뿐만 아니라 그 부모나 가족들의 인생까지도 망가뜨려요. 성폭행 피해자들은 대부분 혼자 살고 있어요. 성인이 되어서는 가족이 없다는 거예요. 사는 게 너무 고달프고 힘들어서 가정생활을 할 수 없는 거죠. 보통 하루에 12번씩 정신적인 공황상태를 겪는데 그걸 견딜 수 있는 남자가 어디 있겠어요. 집창촌에서 일하는 여성의 80%가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해요. 성폭행은 한 여자의 인생을 완전히 죽이는 죄악 중의 죄악이에요."

하루 12번씩 정신적 공황 ... 성폭행 피해자가 혼자 사는 이유

아이들은 성폭행을 당하면 무서움과 두려움에 선뜻 부모에게 말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손 피디는 아동 성폭행은 반복가능성이 높으니 '아이들이 먼저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성폭행은 지속되는 경우가 많아요. 아이들은 범인에 대한 두려움과 그 행위 자체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지속적으로 범행에 노출될 때가 많아요. 그럴 경우 아이들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성폭행을 계속 당하게 돼요. 그래서 아이들이 성폭행을 당했을 때 먼저 말을 하게 만들어야 돼요. 니가 어떤 일을 당해도 네 편이니 무슨 일이든지 엄마에게 말해라. 그런 것들은 엄마가 너하고 함께 해결하겠다고 안심을 시켜야 돼요. 피해를 당한 아이 앞에서 울거나 한숨을 쉰다거나 하는 일은 안 좋아요." 

손윤희 피디는 이와 함께 아동성폭행의 경우 빨리 치료하는 게 최선이라고 거듭 말했다. 

"아동성폭행의 경우 아이들은 그게 어떤 일인지 잘 모르잖아요. 아직 어려서. 그럴 적에는 빨리 치료하는 것이 효과가 훨씬 좋아요. 그러지 않고 방치해두었다가 성인이 되면 그 상처는 더 깊어져요.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라는 무력감을 느끼기 때문에 더 힘들어지는데, 어린 시절 빨리 치료하면 치료예후가 굉장히 좋아요. 성인 성폭행보다는."

손 피디는 수사기관의 성폭력 사건 처리에 대해서도 문제가 많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수사기관에 성폭력사건이 접수 되면 증거확보나 진술을 대부분 성폭력 피해자에게 의존하는데 외국과 정반대라는 것.

"우리나라는 피해자들에게 자신의 피해 정도를 증명하라고 해요. 저는 이게 도저히 이해가 안 돼요. 성폭행 사건이 접수되면 가해자를 데려다 수사를 하고 피해자는 치료상담소 등에서 치료를 받아야 되는데, 우리는 피해자를 먼저 불러서 수치스런 질문을 몇 시간이나 묻는다는 거죠.

몇 시간을 피해자에게 물은 다음 가해자를 잠시 데려다 '아이가 이렇게 이렇게 했다고 하는데 맞아요?'라고 물으면 가해자는 '아니요'라도 말해요. 그러면 '이 장소에서 이렇게 했다는데 맞아요?'라고 수사관이 물으면 '아뇨 그 장소에는 가지도 않았어요'라고 하죠. 계속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엇나가죠. 그러고 나서 가해자는 풀려나거든요. 구속수사를 원칙으로 하지 않으니까. 그럼 가해자들은 풀려나 집에 가서 알리바이를 만들죠."

손 피디는 가해자들이 쉽게 풀려나다보니 '아, 요것만 이렇게 피하면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죄를 지어도 처벌받지 않으니 다시 범행을 저지르게 된다고 말한다. 성폭력사건 가해자 10%가 50%의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이다. 때문에 오히려 성폭력 피해를 당해 고소를 한 사람이 상처를 입는단다.

"가해자는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주변 사람들은 별거 아니라고 이야기 하고. 피해 당사자나 가족들은 말 못하는 고통에 속이 곪아 썩어 들어가죠. 아동 관련법들은 아이들의 피를 먹고 자란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희생이 있으면 조금 달라지고."

KBS 시사기획 <쌈> 한 장면. 가해자에 대한 온당한 처벌을 바라는 나영이가 그린 그림.
 KBS 시사기획 <쌈> 한 장면. 가해자에 대한 온당한 처벌을 바라는 나영이가 그린 그림.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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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추궁하는 한국, 피해자 치료부터 하는 외국

그럼, 외국의 경우는 어떨까.

"외국의 경우는 성폭력 피해 사실이 접수되면 피해자에 대한 조사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를 데려다 조사를 해요. 가해자의 진술을 받고 그 말이 사실인지 먼저 수사를 해요. 그 시간에 피해자는 상담소라든지 신경정신과에서 치료를 받게 해요. 의사나 상담사에게 어떤 피해를 당했는지 진술을 기재하고, 나중에 피해자와 가해자의 진술내용이 일치하는지 확인해요. 만일 진술 내용이 일치하지 않으면 가해자를 데려다 추궁해요. 탐문수사도 더 하고. 근데 우리나라는 이게 정반대로 되어있어요. 기가 찰 노릇이죠."

때문인지 우리나라 성폭행사건의 경우 범죄는 증가하는데 기소율은 낮아지고 있다. 기소를 해봐야 증거불충분으로 대부분 풀려나기 때문이다. 손 피디는 피해자들이 수사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고통과 상처를 받는다고 말한다.

"성폭행을 당한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는 생각들을 모든 사람들이 해야 된다고 봐요. 네 잘못이 아니다. 정말 억울한 피해를 당한 거다. 무슨 몸이 더럽혀진 아이라거나 무슨 관계를 맺은 아이라는 식으로 보지 말라는 거죠. 사회가 변하지 않는데 그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혼자서 앞으로 나아가라 말 할 수 없는 거잖아요."

2006년부터 2008년 8월까지 2년 8개월간 우리나라에서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자는 총 10080명이다. 하루 평균 10명이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법이 제대로 되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법적으로 형량은 높아졌지만 법관이 가장 낮은 형량을 적용해요. '그 정도면 됐다. 살인사건도 아닌데'라고 이야기해요. 법원이 국민들의 법 감정과 동떨어져 있어요. 여러 시민단체나 여성들의 활동으로 형량은 높여놨으나 법집행의 마지막 단계인 법관들이 늘 국민들을 무시해요. 국민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법관들은 고고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어요. 

외국의 경우는 아동성폭행을 살인사건과 동일하게 생각해요. 오히려 성폭행이 살인사건보다 더한 거죠. 피해자는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가잖아요. 정신적인 충격에 자신뿐만 아니라 가정도 파괴되고. 프랑스에서는 아동성폭행의 경우 살인에 준하는 무기징역 이상을 주게 되어있어요."

"아동성폭력 가해자, 살인과 맞먹는 처벌 필요하다"

최근에는 우리나라 성폭력 사건의 공소시효가 너무 짧다는 문제제기도 많다. 강간사건의 경우, 공소시효는 7년이다. 어릴 적 성폭행 사건의 고통으로 훗날 가해자를 처벌하고 싶어도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

"어릴 적에는 몰랐는데 성인이 되어서 범인을 응징하려고 해도 할 수 없게 돼버리죠. 범인이 누군지 뻔히 알고 있는데. 이게 미치는 거죠. 그래서 어린이 성범죄는 공소시효를 무기한으로 해야 돼요."

손윤희 피디는 마지막으로 성폭력 문제를 이제 더 이상 여성들의 몸조심과 문단속 등의 문제로 취급하지 말라고 다시 강조했다. 

"아동성폭행의 경우 세 가지가 병행되어야 해결될 것 같아요. 일단은 아동성폭행을 성문제로만 봐서는 안 돼요. 성폭력은 여성과 가정, 사회 전반의 문제로 봐야 돼요. 또 법을 강력하게 만들어 재발 방지에 노력해야 돼요. 강력한 처벌이 먹히지 않는 병적인 가해자도 있지만 처벌을 두려워하는 유형의 범인도 상당수 존재하잖아요. 따라서 살인과 맞먹는 수준의 강력한 처벌이 있어야 돼요. 그리고 피해자에 대한 전문적이고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해요.

취재를 하면서 느꼈던 것은 하나에서 열까지가 다 문제라는 거예요. 다섯 개는 좋은데 다섯 개만 문제라고 하면 요 다섯 개를 고쳐보자고 할 텐데, 이거는 너무 방대하고 문제가 너무 많으니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 지 사실은 모르겠어요."


태그:#손윤희, #성범죄보고서, #소녀를 위한 나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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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스트, tracking photographer. 문화, 예술, 역사 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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