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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더위가 채 물러가지 않은 새벽녘 뤼순에는 일교차 때문인지 연무가 곱게 깔렸다. 이런 평화로운 모습을 보고 누가 과연 한 세기 전 이곳에서 세계육지전 사상 가장 격렬한 전투 가운데 하나가 벌어졌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거리를 걷는 흰 군복의 해군병사나 높은 담장 너머로 빠끔히 들여다 보이는 군함 정도가 이곳이 중국인민해방군의 전략거점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줄 뿐이다.

청년통일문화센터 푸른공감이 주최하고 동북아역사재단과 북경현대자동차 등이 후원하는 '국제평화통신사'의 일원으로 중국 동북3성을 찾았다. 한국 청년들은 물론 조선족과 중국 청년들로 이루어진 답사단이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안중근 의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랴오둥반도의 서남단, 뤼순이다. 그 중에서도 안중근 의사가 사형판결을 받은 옛 일본관동도독부 고등법원(관동법원)으로, 답사단의 발걸음은 향한다.

1906년 중국 뤼순에 들어선 옛 일본관동도독부 고등법원(관동법원).
 1906년 중국 뤼순에 들어선 옛 일본관동도독부 고등법원(관동법원).
ⓒ 권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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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안중근을 만나다

완만한 언덕배기 위에 자리 잡은 관동법원은 현관에 8개의 이오니아식 석주를 세우고 지붕에는 커다란 청동 돔까지 얹는 등 1906년 당시 일제가 지은 일대의 그 어떤 건물들보다 화려하다.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 뒤 그들을 흉내 내면 자기도 제국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일까. 일찍이 근대화에 성공한 뒤 한반도와 중국대륙을 침략한 일제는 피식민지인들을 주눅 들게 할 요량이었는지 경성역(현 서울역)이나 조선총독부(1995년 철거), 경성부청사(현 서울시청사)처럼 식민지 주요 도시마다 서양 건축양식을 모방한 건물을 짓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1937년 중심 기관들이 다롄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관동군사령부가 그랬던 것처럼 법원 역시 뤼순에 먼저 지어졌고, 건물의 규모나 치장도 그 위상에 걸맞았다.

좁다란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자마자 맞닥뜨리는 재판정, 1902년 11월 3일 안중근이 호송되어 와 이듬해 2월 14일 사형판결을 받은 곳이다. 마나베 주조 등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한 판사들이 앉았을 자리와 방청석, 그리고 죽음을 앞에 둔 안중근이 일본인 판검사를 상대로 결연히 자신의 견지를 펼치던 피고인석 등이 당시처럼 재현되어 있다. 물론 안중근이 사형판결을 받았을 때의 그 집기들은 없고, 그의 삶을 소개하는 짤막한 영상자료나 사진을 통해서나 어느 정도 당시 분의기를 가늠해볼 수 있을 뿐이다.

1903년 2월 14일 안중근이 사형판결을 받은 관동법원 재판정.
 1903년 2월 14일 안중근이 사형판결을 받은 관동법원 재판정.
ⓒ 권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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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정 옆 추모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벽에 여러 점의 유묵이 걸려 있지만 단 한 점, "爲國獻身軍人本分(위국헌신군인본분)"이라는 8자의 유묵 앞에 서면, 안중근도 의로운 일에 목숨을 잃는 것을 마다지 않는 의사이기에 앞서 한 명의 인간이었지 싶다. 사형집행 직전에 감시를 맡았던 일본헌병 치바 도시치에게 남긴 것으로 전해지는 그 글의 마지막 글자, '分'의 마지막 획이 몇 번 호뜰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당했다고 알려져 있는 안중근이지만, 그 역시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에는 두려움과 함께 생에 대한 미련이 남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저며 온다.

안중근이 쓴 '爲國獻身軍人本分'이라는 유묵에서 '分'의 마지막 획이 몇 번 호뜰거리고 있다.
 안중근이 쓴 '爲國獻身軍人本分'이라는 유묵에서 '分'의 마지막 획이 몇 번 호뜰거리고 있다.
ⓒ 권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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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에서는 안중근과 일본인 간수 사이의 우정을 말해주는 이 사연이 허구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이 이야기는 애초 치바의 묘비가 있는 일본 미야기현의 다이린지(大林寺) 주지 사이토 다이켄이 지난 1993년 <내 마음의 안중근>이라는 책에 소개하면서 유명해졌다. 하지만 상등병에 불과한 치바가 사형집행 5분 전에 안중근 같은 유명 정치범에게 접근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책에는 안중근과 치바가 동양 평화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는 기록이 많지만, 당시 안중근은 일본어를 못했고 치바는 조선어를 할 줄 몰랐기에 둘 사이의 직접 대화가 과연 가능했을지 하는 의문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게다가 지체 높은 사람에게 글을 써 올릴 때 붙이는 '삼가 올린다'는 뜻의 '謹拜(근배)'라는 글씨가 붙어 있는 점도 이런 의구심을 뒷받침한다.

물론 그 사이 이야기들이 와전되고 과장되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치바 도시치라는 한 일본인이 안 의사를 진심으로 숭모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인 듯하다. 그가 가족에게 남긴 "유묵과 위패를 불단에 바치고 아침저녁으로 봉공해 달라"는 유언에 따라 그의 부인이 집안 불단에 유묵과 위패를 봉안했고, 부인이 사망한 뒤에는 딸이 다이린지에 유묵과 위패를 모셨다는 것이다. 그 유묵은 1979년 서울에서 열린 '안중근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 전시된 뒤 서울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에 기증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어 뤼순감옥으로 향하다

2천여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던 중국 동북지방 최대 규모의 뤼순감옥.
 2천여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던 중국 동북지방 최대 규모의 뤼순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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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해가 서쪽 하늘에 뉘엿뉘엿 걸릴 즈음, 관동법원에서 1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뤼순감옥을 찾았다. 2만6천 평방미터로 2천여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동북 최대 규모의 뤼순감옥은 안중근과 신채호를 비롯한 수많은 항일민족해방운동가들이 투옥되었고, 그 가운데 상당수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곳이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부터 45년 8월까지 3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무려 7백여 명의 운동가들이 이곳에서 처형됐다고 한다.

무시무시한 대량 수감과 고문, 그리고 처형이 이루어진 뤼순감옥…. 중앙옥사로 들어가면 이 건물의 특징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건물은 2층 구조로 되어 있는데, 가운데 복도를 두고 양옆으로 다닥다닥 감방을 설치했다. 특히 2층 복도의 경우에는 바닥의 한가운데를 뚫은 뒤 철망을 깔아 간수가 1층에서든 2층에서든 두 개 층을 모두 감시할 수 있게 했다. 또 옥사의 한 가운데로 나아가면 세 방향으로 뻗어나간 건물군의 복도가 한 지점에서 교차하는데, 여기에 세 복도를 통제할 수 있는 감시대를 세워 두었다. 감시대는 감방의 문에 거의 수직으로 비껴서 있기에 수감자는 간수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게 되고, 따라서 수감자 입장에서는 감시자가 항상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구조다. 영국인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제안한 이래 군대와 학교, 병원 등에서 주로 채택되어 온, 소수가 다수를 통제하기 위한 효과적인 건축양식이다.

안중근이 사형 직전까지 머물렀던 감방으로, 교도소장실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안중근이 사형 직전까지 머물렀던 감방으로, 교도소장실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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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에서 들여다 본 감방 내부로, 침대는 물론 의자와 책상, 먹, 붓 등이 놓여 있다.
 창밖에서 들여다 본 감방 내부로, 침대는 물론 의자와 책상, 먹, 붓 등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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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붉은 군대'가 진주하면서 사용이 중지되었다가 71년 들어 전시관으로 개방된 뤼순감옥. 하지만 이미 88년에 중국 국가중점역사문화재로 지정되었음에도 불과 지난해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의 출입은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4미터 높이의 담장 안에 점점이 산재되어 있는 옥사들을 돌아보는 느낌이 사뭇 진지할 수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감옥의 초입, 교도소장실 바로 옆에 안중근이 사형 직전까지 수감되어 있던 방이 있다. 넓이도 다른 감방의 서너 배는 됨직하고 먹과 붓, 종이, 책상에 의자까지 반입이 허용됐다고 한다. 안중근은 이곳에서 자서전 <안응칠 역사>를 탈고했고, 사형 직전까지 동양평화론을 집필하기도 했다. 어떤 이는 안중근이 먹이나 붓 등을 사용할 수 있던 점에 미루어 국제적 인물인 안중근에 대한 감옥 측의 배려 혹은 안중근을 흠모하는 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교도소장이 직접 지켜봐야 할 정도로 중요하면서도 위험한 인물이 안중근이었고, 나아가 국제적 관심의 대상이었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안중근이 교수형을 당한 20여 제곱미터 규모의 사형장도 나중에 세탁장으로 쓰였다가 최근 들어 당시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의거 100주년이 되는 오는 26일 문을 열 준비를 하느라 곳곳에서 페인트 냄새가 진동을 하지만, 그래도 전시물만큼은 하나둘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듯했다. 교수형을 할 때 쓰던 올무와 의자, 바닥이 꺼지게끔 하는 장치 등 음습한 기운이 그대로 느껴지게끔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 가고 있다. 그 중에서도 눈길을 휘어잡은 것은 벽면에 새겨져 있는, 1963년 8월 저우언라이 전 중국총리가 북한 학자들에게 남긴 말이었다.

"중일갑오전쟁(청일전쟁) 후 중조(中朝) 양국 인민이 공동으로 일본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은 본 세기 초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전에서 이등박문을 격살할 때 시작되었다."

뤼순감옥은 지난해에야 외국인들의 출입이 허용됐다.
 뤼순감옥은 지난해에야 외국인들의 출입이 허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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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그동안 해군기지인 뤼순항의 군사기밀 보호를 위해 이 지역에 외국인이 출입하는 것을 막아 왔지만, 지난 2005년 뤼순감옥을 애국주의교육 시범기지로 지정해 중국인들의 방문을 적극 유도하는 데 이어 지금은 외국인 출입 허용에서 나아가 외국인 항일운동가들의 추모관까지 만들어 가고 있다. 감옥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國際戰士在旅順(국제전사재여순)', 즉 뤼순에서 활동한 외국인들을 위한 전시관이 한 예다.

그곳에는 원래 '순국 중국인 항일지사 전시관'이 있었는데 2년 전 전시관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 조선을 비롯한 미국이나 일본, 러시아, 이집트 출신의 항일인사들을 추모하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바꾼 것이다. 독특한 것은 그 인물 가운데 거개가 조선인들이라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단재 신채호와 도산 안창호, 우당 이회영, 한인애국단에서 활동한 유상근과 최흥식 등을 위해서는 별도의 전시공간까지 마련해 놓았다. 당시 동북지방에서 활동하던 반제국주의자들 가운데 영향력 있는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조선인이었다는 방증이리라.

이름마저 오류투성이

신채호가 6년여 옥살이를 하다 사망한 감방으로, 그의 이름이나 업적 등이 잘못 적혀 있다.
 신채호가 6년여 옥살이를 하다 사망한 감방으로, 그의 이름이나 업적 등이 잘못 적혀 있다.
ⓒ 권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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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아직까지 세심한 배려가 필요해 보이는 곳도 간간이 눈에 띤다. 그 중에서도 안중근이 갇혀 있던 곳에서 불과 2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한 신채호의 감방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또한 안내판부터가 오류투성이다. 안중근과 관련해서는 한국어와 중국어, 일본어, 영어 등 4개 국어 안내판이 기본적으로 설치되어 있는 현실과는 상황이 영 딴판이다. 이를 테면 신채호의 영문 이름은 'Shen Caihao', 즉 '션차이 하오'라는 중국식 발음으로 표기되어 있고, 국적도 'North Korea'로 되어 있다.

이름이 그러할진대 내용이라고 별 수 있을까? 신채호가 쓴 '조선혁명선언'은 당시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국호를 붙여 '북한혁명선언'이라고 잘못 표기해 놓았다. 중국어 설명문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조선 충청도 출신의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문학가'라는 설명과 간략한 행적이 설명의 전부이다. 획이 뚜렷한 역사가가 6년 동안 갇혀 있던 감방치고는 명백한 홀대라고밖에는 볼 수 없다. 안중근에 대한 관심의 절반만이라도 신채호를 비롯한 다른 민족해방운동가들에게 떼어 주었다면 어땠을까,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더욱이 한국인 방문객들 가운데 지금까지 이런 문제점을 지적한 이가 없었다는 안내원의 이야기에 그 씁쓸함은 배가된다.

러시아가 짓고, 일본이 이어 짓고

애초 뤼순감옥을 지은 것은 제국주의 일본이 아니라 제정 러시아였다. 일본이 만주에 발을 들여놓기 전이었다. 태평양을 향해 열려 있는 부동항을 갖고 싶어 하던 러시아는 랴오둥반도를 점령해 1898년 조차권을 얻어냈고 이어 포트 아서(Port Arthur), 즉 지금의 뤼순을 해군기지로 요새화했다. 그러면서 통치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것이 뤼순감옥이다. 안내를 자처한 중국인민해방군 대교 출신의 박용근 국제안중근연구회 회장의 말 속에는 외세를 보는 중국인들의 생각이 녹아 있다.

"한국 사람들은 여기 와서 일제의 식민통치기구라며 뤼순감옥만 보고 가지만, 원래 그것을 짓기 시작한 것은 러시아였습니다. 감옥뿐만 아니라 다롄이나 뤼순 시내에 그들이 남기고 간 건물들도 아직 여럿 남아 있지요. 일본이나 러시아나 중국인민들에게는 남의 나라를 제 멋대로 휘젓고 다닌 똑같은 제국주의자들이었을 뿐입니다."

회색 부분은 러시아가, 붉은 부분은 일본이 지은 뤼순감옥.
 회색 부분은 러시아가, 붉은 부분은 일본이 지은 뤼순감옥.
ⓒ 권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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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회장의 말마따나 러시아가 지은 감옥 건물은 회색 벽돌로 쌓아 올린 반면, 일본이 증축한 부분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선 서울 서대문형무소의 그것처럼 검붉은 벽돌로 지었다. 심지어 1902년 러시아가 건설한 중앙옥사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벽의 가장자리를 뚫어 50여 미터를 연장했다. 러시아에 저항하다 수감된 이들이라고 해서 석방될 리 만무했다. 감옥 하나만 놓고 보아도 러시아와 일본이 이 지역에 대한 '안정적 통치기반 마련'이라는 동일한 목표 아래 사이좋게 바통을 주고받은 셈이다. 마치 1945년 8월 15일을 기점으로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자'와 '가둔 자'의 처지가 뒤바뀌어야 했거늘 일제 때나 해방 뒤 미군정 때나 그대로 이어졌던 것처럼….

그렇게 해서 83칸에 불과했던 감방은 253칸으로 세 배 이상 늘어났고, 중국 동북지방에서 제일 큰 감옥이 되었다. 감방에 채워진 이들은 주로 정치범이나 사상범, 경제범 등이었는데, 특히 정치범과 사상범으로 분류된 민족해방운동가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이 많았다.

일제는 수감자들을 통제하기 위해 수감자를 7개 등급으로 나눈 뒤 식량을 차등 배급했다. 밥그릇에 각각 7개 크기의 나무토막을 넣은 뒤 남은 공간에 밥을 얹어 주는 방식이었다.
 일제는 수감자들을 통제하기 위해 수감자를 7개 등급으로 나눈 뒤 식량을 차등 배급했다. 밥그릇에 각각 7개 크기의 나무토막을 넣은 뒤 남은 공간에 밥을 얹어 주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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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지지 않는 흔적과 사라지는 기억들

독립과 해방을 뛰어넘어 동양평화와 세계시민평등, 그리고 지금 보아도 놀랍고 창발적인 동아시아공동체 건설 구상까지 나아가 있던 안중근이 사형당하고,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저술사업 등을 펼친 신채호가 병사한 곳…. 관동법원과 뤼순감옥 구석구석 남아 있는,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고 그렇다고 잘 사라지지도 않는 고문 흔적들이 미간에 깊은 골을 낸다. 교수형이 행해졌던 사형장에는 여러 명을 한꺼번에 교수형 하려 했는지 4개의 올무가 걸려 있고, 줄을 당기면 밑이 푹 꺼지게 되어 있는 바닥 아래에는 시신을 구겨 넣는 원형 나무통이 놓여 있다.

1942년부터 45년 8월까지 채 3년이 안 되는 기간 동안 무려 7백여 명이 교수형을 당한 사형장. 오른쪽 아래에 보이는 유리관 내 원형 나무통에는 실제 유골이 담겨있는데, 감옥 뒷산에서 발굴한 것이다.
 1942년부터 45년 8월까지 채 3년이 안 되는 기간 동안 무려 7백여 명이 교수형을 당한 사형장. 오른쪽 아래에 보이는 유리관 내 원형 나무통에는 실제 유골이 담겨있는데, 감옥 뒷산에서 발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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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렇듯 역사적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건물들이 하마터면 영영 사라질 뻔한 적도 있다.

"1990년대 말에는 관동법원 건물이 뤼순시립병원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그때 병원을 새로 짓기 위해 법원 건물을 헐어버릴 예정이었어요. 그때 한국에 있는 여순순국선열기념재단이 나서서 법원 건물을 중국 지방정부 보존문물로 지정하는 성과를 거뒀지요. 그 뒤에는 아예 건물을 매입해서 원형복원을 했고, 그렇게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법원 안내원이야 덤덤하게 말을 이어갈 뿐이지만, 안중근의 유해가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는 황막한 현실에서 그나마 몇몇 사람들의 관심 덕분에 관동법원의 질경이보다 질긴 역사적 생명력이 여태껏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열흘 뒤면 안중근이 이역만리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지 꼭 100년째 되는 날이다. 기념관을 새로 짓는다, 시신을 찾는다, 하얼빈에 있던 동상을 국내로 가져온다는 등등 안중근을 생각한다는 말들로 차고 넘치는 요즈음, 그러나 정작 그의 사상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들은 그다지 눈에 띠지 않는다. 그러한 이유로, 즉 이토를 사살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그의 사상과 열망은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의사'가 아니라 '열사'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일례로 동아시아공동체는 말할 것도 없고 남북마저 반세기가 넘도록 두 쪽이 난 채 가까워질 기미가 쉬 보이지 않기에 말이다. 안중근 의거 1백 년…. 관동법원과 뤼순감옥이라는 생명 없는 건물들만 덩그렇고, 정작 중요한 그의 외침은 가뭇없이 사라져 버린 듯한 생각이 드는 까닭이다.

단추 크기의 감시용 구멍 외에 빛이 들어올 곳이 없던 1인 감방.
 단추 크기의 감시용 구멍 외에 빛이 들어올 곳이 없던 1인 감방.
ⓒ 권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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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안중근, #신채호, #뤼순, #이토 히로부미, #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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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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