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를 걷다 우연히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에 문득, 롤러코스터가 둔탁한 규칙적인 파열음을 내며 정점에 올랐다 쏜살같이 떨어질 때 느껴지는 그런 순간의 가슴 속 철렁함을 느꼈을 때, 옛사랑과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며 함께 들었던 잊고 있던 그 음악 소리가 바로 그 음악 소리임을 알았을 때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알아챈 왠지 모르는 그 먹먹함... 그 옛사랑과 어떤 연유로 헤어졌는지 그래서 그동안 얼마나 힘들고 아팠는지에 대한 감각이 무뎌질 즈음 그렇게 추억은 나도 몰랐던 어떤 매개체를 통해 그 시절의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기록의 경기' 승부의 냉정함만이 감도는 녹색 그라운드, 프로 야구의 세계도 분명 사람이 사는 세상이며 그라운드를 누비는 선수와 그들을 지켜보는 팬들도 사람이기에 그런 추억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매개체가 분명 존재한다. 그들이 바로 '프랜차이즈' 선수들이다.

 화려한 기록을 남겨야만 프랜차이즈 스타가 되는 것이 아니다. 박현승처럼 꾸준히 한결같은 모습 또한 충분히 프랜차이즈 스타가 될 수 있다.

화려한 기록을 남겨야만 프랜차이즈 스타가 되는 것이 아니다. 박현승처럼 꾸준히 한결같은 모습 또한 충분히 프랜차이즈 스타가 될 수 있다. ⓒ 롯데 자이언츠


롯데 팬들이라면 아마 1999년 한화 이글스와의 한국시리즈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비록 그 해 롯데 자이언츠는 준우승에 머물긴 했지만 한국시리즈 3차전 대타로 출전하여 '대성불패' 구대성에게 당시 2루 주자였던 현 롯데 자이언츠 코치 공필성을 불러들이는 1타점 2루타로 3차전 역전승을 이끌며 한국시리즈 우승을 위한 불씨를 살렸던 주역이 바로 박현승이다.

1995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한 구단에서만 계속 선수생활을 이어온, 그의 경력이라고는 2007년과 2008년 동군 올스타로 출전한 거 말고는 내세울 게 없는 프로 14년차 박현승이 지난 8일, 구단으로부터 자유계약선수로 공시되었다. 1972년생으로 올해 38살인 박현승을 타 구단에서 데려갈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리 뛰어난 성적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롯데 팬들의 기억에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박현승은 본인의 의사인지 아니면 구단의 일방적인 결정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의 야구 인생의 중요한 기로에 다다른 것만은 틀림없다.

김용수, 양준혁, 김재현 ... 프랜차이즈 잔혹사

 선수시절 김용수

선수시절 김용수 ⓒ LG 트윈스

'프랜차이즈' 스타가 이런 식으로 홀대를 받은 경우는 애석하게도 대한민국 프로야구 역사에 적지 않게 기록되어 있다.

16시즌 동안 613경기에 출장해 평균자책점 2.98 126승 227세이브를 기록한 꾸준함의 대명사 LG 트윈스의 김용수는 2000년 은퇴와 영구결번이 확정되었다는 구단의 발표만 있었을 뿐 번듯한 은퇴식 없이 쫓기듯 해외로 연수를 떠났다.

이후 LG로 돌아와 2군 코치로 임명되었지만 2004 시즌이 끝난 뒤 석연치 않은  이유로 팀을 떠나게 된다.

2007 시즌 김재박 감독이 부임하며 2군 투수 코치로 복귀, 2009 시즌 중반 1군 투수코치로 임명되었지만 시즌이 종료되며 김재박 감독이 물러나자 투수코치에서 스카우트로 보직을 옮기게 되었다.

물론, 스카우트로서 LG의 명가 재건에 화수분이 될 인재를 찾는다는 일에는 의미가 있지만 이제는 지도자로서 줄무늬 유니폼을 입고 현장에서 뛰고 있는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에 LG의 많은 팬들은 아쉬워하고 있다.

 살아있는 신화 양준혁. 그라운드에서 그가 기록하는 모든 것이 이제는 기록이 되고 있다.

살아있는 신화 양준혁. 그라운드에서 그가 기록하는 모든 것이 이제는 기록이 되고 있다. ⓒ 삼성 라이온즈


'양신'이라고 불리며 불혹을 넘긴 나이에도 젊은 선수들 못지않은 스태미너로 현역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삼성 라이온즈의 양준혁은 프로 17년차라는 오랜 선수 생활만큼이나 수난 아닌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삼성에 입단하기 위해 프로 지명을 포기하고 상무에 입대했다는 사실은 야구팬들에게는 이미 공공연한 사실, 그만큼 자신이 각별했던 팀에게서 양준혁은 1999년 당시 유망주였던 곽채진, 황두성과 해태의 임창용과 트레이드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하게 된다. 트레이드를 거부하며 미국의 마이너 리그에서 뛰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결국 자신의 뜻을 굽히고 해태로 트레이드되게 된다.

해태로 트레이드 된지 1년 후, 양준혁은 선수협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고 그 여파로 인해 다시 LG로 이적하게 된다. LG에서 FA 자격을 취득한 양준혁은 계약을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되지만 당시 삼성 감독이었던 김응룡 감독에 의해 그가 처음부터 원했던 삼성으로 다시 돌아와 지금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LG 시절의 김재현, 프로통산 29번째로 달성한 1000안타 기념

LG 시절의 김재현, 프로통산 29번째로 달성한 1000안타 기념 ⓒ LG 트윈스


1994년 LG 트윈스 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역이자 신인 최초 20-20 클럽에 가입한 '캐넌히터' 김재현, 지금은 SK 와이번스 주장으로서 팀의 세 번째 우승을 위해 열심히 그라운드를 누비고 있지만, SK 유니폼을 입고 뛰는 김재현을 바라보는 LG팬들의 마음은 애잔하기만 하다.

2002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6차전, 부상으로 시즌을 마감했던 김재현이 타석에 들어섰다. 분명 2루타 이상의 장타 코스였는데도 불구하고 김재현은 절뚝거리며 1루로 거의 걸어가다시피 했다.

그의 부상은 '대퇴골부 무혈성 괴사증'으로 고관절이 썩어 가는 선수에게 치명적인 부상이었다. 선수생명을 걸고 큰 수술을 받고 재활에 전념하던 김재현에게 LG 구단은 각서 제출을 요구하게 되는데 그 각서의 요지는 혹시 있을 수 있는 부상재발에 따른 모든 문제를 김재현에게 떠넘기려는 내용이었다.

부상에서 돌아온 김재현은 2004년 120경기에 출전하며 타율 3할, 112안타, 14홈런을 기록하며 도루를 제외한 전 부문에서 고른 활약을 펼치며 FA 자격을 취득하지만 LG와의 FA 협상은 불발되고 새로운 팀 SK에서 또 다른 야구 인생을 이어가고 있다.

OB, 두산 베어스를 거쳐 한 팀에서만 17년 선수생활을 해왔던 '안쌤' 안경현도 2009년 두산과의 재계약에 실패해 역시 SK에서 선수생활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기록의 스포츠 야구 ... 기록은 결국 추억이다

 한화 이글스는 영구 결번이 3개나 있다. 왼쪽부터 정민철, 강석천, 송진우, 장종훈

한화 이글스는 영구 결번이 3개나 있다. 왼쪽부터 정민철, 강석천, 송진우, 장종훈 ⓒ 한화 이글스

2009 시즌 종료 직전 한화 이글스의 두 레전드가 아쉽게도 은퇴를 했다. '회장님' 송진우와 '에이스' 정민철이 바로 그들.

그들의 등번호였던 21번과 23번은 영구결번되어 이미 영구 결번된 '연습생 신화' 장종훈의 35번과 함께 대전구장 외야에 빛나고 있다.

은퇴경기 또한 그간 있었던 은퇴경기와는 수준이 달랐다. 자신들의 등번호 숫자만큼 야구 인생에 있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인사를 초대하여 그들에게 사인볼을 받아 대형 액자로 제작하였고, 송진우의 은퇴경기에는 지정석을 제외한 일반석 입장을 무료로 하여 좀 더 많은 팬들이 찾아올 수 있도록 구단 측에서 배려하였다.

비록 한화 이글스가 꼴찌로 올 시즌을 마감했지만 많은 야구팬들에게 박수를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록의 스포츠 야구, 기록은 박현승이 1999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친 1타점 역전 2루타를 기억하고 있지만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팬들에게는 추억으로 남겨져 있다. 적어도 야구가 기록의 스포츠라고 불리는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기록과 추억은 기억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단지 그 선수의 시즌 기록에만 집착한 나머지 팬들의 추억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구단이라면 야구장 안정성 등급 중 사실상 사용이 중단되어 노후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전주구장처럼 '특정관리대상'이 돼야 하지 않을까.

'추억의 매개체' 프랜차이즈 스타. 그들을 홀대한다는 건 그 매개체를 통해 야구를 진정 사랑하게 되는 야구팬들 마저 홀대한다는 걸 구단들을 명심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개인 블로그 (http://blog.naver.com/ygmature) 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박현승 프랜차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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