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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창제 563돌 기념전은 11월 1일까지 열린다
 한글창제 563돌 기념전은 11월 1일까지 열린다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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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창제 563돌 기념전
 한글창제 563돌 기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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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한글창제 563돌'을 기념하는 전시회(11월 1일까지)가 열리고 있다. 주제는 '한글 옛 소설-우리글에 우리 이야기를 담다'.

창제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외면했던 한글이 우리 삶에 어떻게 스며들어 오늘날과 같은 위상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다양한 책들과 기록, 그림 등으로 설명하는 전시회이다. 전시회에서 만난, 조선후기 사람들이 소설 즐기기에 관한 재미 있는 기록 몇 가지.

요즘 부녀자들이 다투어 일삼는 것 가운데 기록할만한 것으로 패설(稗說)을 읽는 것이 있다. 패설은 날로 달로 늘어 그 종류가 수백 수천에 이른다. 쾌가(책 거간꾼)에서는 이것을 깨끗이 베껴 누구에게나 빌려주고는 값을 거두어 이익을 취한다. 부녀자들은 식견도 없이 비녀와 팔찌를 팔거나 동전을 빚내서까지 다투어 빌려다가 긴 날의 소일거리로 삼는다.
- 채제공(1720~1799) <여사시서(번암집)>중에서

옛날에 어떤 남자가 종로의 담배 가게에서 짧은 패설 읽는 것을 듣다가, 영웅의 뜻이 꺾이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입에 거품을 물더니, 담배 써는 칼을 들고 앞으로 달려들어 패설 읽는 사람을 해하였다.
- 정조실록 권31 정조 14년(1790) 8월 10일의 기사

채제공이 살았던 영조와 정조 시대는 우리나라의 문화가 활짝 꽃피었던 때다. 여염집 여인들이 패설(소설)을 읽는다고 장신구들을 팔아먹고 빚까지 냈다거나 소설 속 주인공이 불운해지자 책을 읽어주는 사람을 해친 사내에 대한 기록은 당시 사람들에게 우리 옛 소설이 어떤 존재였는가를 잘 말해주는 것 같다.

담배썰기-단원풍속도첩(보물 제526호)
 담배썰기-단원풍속도첩(보물 제5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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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언문 소설(언패)를 가지고 와서 내가 긴 밤을 지새는데 도움이 되게 하였다. 보니 인본(印本)이었는데 <소대성전>이라고 되어 있었다. 이것은 서울의 담배 가게에서 부채를 쳐가면서 낭독하던 그런 책…'이란 기록도 보인다.

부녀자들만 아니라 남자들도 삼삼오오 모여 소설을 즐겼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부녀자들 몇몇이 자신의 집이나 아는 사람의 집에 둘러 앉아 소설을 함께 읽는 것이나 남자들이 담배 가게에 모여 소설을 즐기는 풍경이 쉽게 그려진다.

당시 사람들이 빚까지 내서 빌려 읽을 만큼 재미를 붙였던 것은 언문, 즉 한글로 필사된 소설들인데, 세종대왕의 '백성들이 쉽게 배워 널리 쓰게 한다'는 한글창제의 목적에도 불구하고 몇 백 년이 지난 조선 후기,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나 보다. 소설을 읽어주고 대가를 받는 사람들까지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전기수는 동대문 밖에 살았다. 언문(諺文) 패설(稗說)을 잘 읽었는데, <숙향전>·<소대성전>·<심청전>·<설인귀전> 같은 것들이었다. 매월 초하루는 제일교 아래, 이일은 제이교 아래, 삼일은 배오개, 사일은 교동 입구, 오일은 대사동 입구, 육일은 종각 앞에 앉아 책을 읽었다. 이렇게 올라갔다가 칠일부터는 다시 내려온다. 내려왔다 다시 올라가고 다시 내려오고 하면서 한 달을 지내는데 다음 달도 마찬가지이다. 책을 재미있게 읽기 때문에 사람들이 담처럼 둘러서서 듣는다. 읽다가 가장 중요하여 들을만한 대목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멈추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 사람들이 다음이 궁금하여 다투어 돈을 던지는데, 이것을 요전법(邀錢法)이라 한다. - 조수삼의 글 <기이> (추재집)중에서

독서하는 여인 중 일부-윤두서의 아들 윤덕희가 그렸다(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독서하는 여인 중 일부-윤두서의 아들 윤덕희가 그렸다(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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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어주는 남자 전기수의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극장의 재담꾼 변사를 떠올리게 한다.  책을 조근 조근 읽어주다가 가장 흥미로운 부분에 이르러 입을 꾹 다물어버려 사람들의 흥미를 정점에 달하게 하여 돈을 받아 챙기는 프로의 느낌이 강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당시 전기수와 같은 프로들이 있었다면, 소설을 읽어주고 돈을 버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지 않았을까? 여하간 조선시대 한글은 부녀자들이나 읽고 썼던 글이라고 알고 있던 터라 담배 가게나 저잣거리에 몰려들어 소설을 즐겼다는 이야기는 썩 흥미롭게 다가온다.

이 전시회를 만나기 전까지 <구운몽>이나 <심청전> <숙영낭자전> <홍길동전> 등 오늘날 우리에게 유명한 이 소설들이 당시 몇몇 사람들에게 겨우 돌려 읽히는 정도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들이 용케도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우리에게 유물로 전해진다고.

그런데 전시회장에서 만나는, 우리가 유물 혹은 자료로 만나는 우리의 수많은 옛 소설들은 당시의 베스트셀러였던 것이다. 책을 빌려본다고 빚을 낼만큼 읽고 싶어 안달이 나는 그런. 전시회는 당시 사람들이 이처럼 즐겨 읽었던 우리의 옛 소설들과 소설을 즐기는 모습을 다양하게 전하고 있다.

한글창제 563돌 기념전에서 한글의 표기방식 설명을 한참 읽던 사람들
 한글창제 563돌 기념전에서 한글의 표기방식 설명을 한참 읽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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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창제 563돌 기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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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여자들이 음란 소설 읽자고 빚을 내? 잼있네

"조선시대 여자들이 음란소설을 읽는다고 살림살이들을 팔아먹고 빚까지 냈다네. 좀 웃기지 않아? 빨리 와서 이것 좀 읽어 봐."

전시물 설명들을 한참 재미있게 읽고 있는데 일행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자기들끼리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들은 아마도 채제공의 '패설'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흔히 쓰이는 '음란패설'이란 말을 떠올렸나보다. 그러나 모르시는 말씀이다.

채제공이 '패설'이라고 기록한 것은 개화기 소설이 등장하기 전에 창작된 우리의 이야기책들을 말하는 것이다. 혹은 고담(古談)으로도 불렸단다. 한글소설은 언문으로 된 패설 즉 언패(諺稗), 혹은 언서고담(諺書古談)으로 불렸다고 한다. 전시회 설명을 꼼꼼하게 읽어보면 이런 것쯤은 쉽게 알 수 있다.

김시습의 <금오신화>를 시작으로 우리 옛 소설들은 꾸준히 창작되었고 한글이 창제되면서 급속도로 활발해졌다. 우리의 삶과 정서를 당시 우대받던 한문보다 훨씬 쉽게 자세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한글소설의 성장은 나아가 우리말과 우리글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윤활유가 되었고 한글이 기록 매체로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한글 옛소설-우리글에 우리 이야기를 담다'는 이처럼 창제 당시 우대받지 못한 우리의 글 한글이 시대를 이어가는 동안 어떻게 사람들의 삶에 스며들어 오늘날처럼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지를 쉽게 접할 수 있는, 규모는 작지만 읽을거리가 풍성한 전시회다.

ⓒ 김현자

다양한 한글 글씨체를 볼 수 있는 필사본(筆寫本) 소설들, 한글 소설이 유행했음을 알려주는 방각본(坊刻本) 소설들, 판소리로 재탄생한 소설들, 세책점(貰冊店)에서 한글 소설을 빌려다 보는 부녀자들과 담배 가게나 저잣거리에서 책을 읽어주는 강독사(講讀師) 이야기 등 다양한 우리 옛 소설들과 옛 소설을 즐겼던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구운몽> <심청전> <사씨남정기> <숙영낭자전> <조웅전> 등, 우리에게 유명한 작품을 더듬더듬 읽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도 몇 페이지를 읽어 봤는데 오늘날 우리의 말과 달라서인지 쉽게 읽혀지지 않았지만 더듬더듬 읽는 맛도 나름 좋더라. 그러나 구태여 읽지 않아도 옛 사람들의 다양한 한글 서체를 만날 수 있어서 좋은 것 같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책 읽는 여인, 김홍도가 그린 담배가게 풍경(보물 제526호), 병풍 1폭마다 소설의 중요 부분들을 그린 병풍 속 구운몽, 조선 후기 세책점, 그림으로 표현된 삼국지와 적벽가 등도 눈길을 끈다.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1층 역사관. 전시기간은 11월 1일까지이다.

덧붙이는 글 | ※ 2009년 10월 7일에 다녀왔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서울지하철 4호선 이촌역 2번 출구 방향에 있습니다.



태그:#한글날, #옛 소설, #국립중앙박물관, #패설, #훈민정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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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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