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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과 덕만은 성골, 미실과 유신은 진골이다.
 천명과 덕만은 성골, 미실과 유신은 진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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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만공주가 오랜 기간 마음속으로 품었던 왕권도전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혔다(MBC 드라마 <선덕여왕> 10월 6일 방영분). 이에 부마를 통해 부군을 삼길 원하던 문무백관들은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부마 후보를 아군으로 포섭하여 권력의 정점에 서려는 미실의 계획에도 차질이 생겼다. 물론 왕권을 노리던 김춘추도 크게 동요된다. 용춘은 성골이라는 명분으로 지지의사를 밝혔지만 썩 내켜하진 않는 모양새다.

덕만의 요청으로 여성 왕이 가능한지가 화백회의 안건으로 상정되었다. 논란의 핵심은 '여성'과 '골품'이다. 덕만은 성골로서 골품의 조건은 충족하지만 여자 왕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찬동하는 세력은 성골이 아닌 왕이 없었다는 이유로 덕만이 왕이 될 명분이 있다고 주장한다. 반대하는 세력은 성골남진인 특수한 경우 부마를 삼아 부군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치열한 토론 중 등장한 김춘추는 골품제도를 "천박하고 야만적인 제도"라 주장하며 '여성의 왕권'을 제치고 '골품제도'를 핵심 의제로 끌어낸다.

신라의 모든 왕은 성골이었다?

덕만의 왕권 도전을 지지하는 세력 뿐만 아니라 극 중 인문들이 전제한 픽션 속 팩트는 "성골만이 왕이 될 수 있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지배적인 학설을 따르자면 선덕여왕 이전에 성골로 불린 왕은 26대 진평왕 뿐이다. 신라 전체를 통틀어도 성골로 불린 왕은 진평왕, 선덕여왕, 진덕여왕이 전부이다. 이유인 즉 성골의 개념은 동륜태자에 이르러 생겨난 개념이기 때문이다.

본래 신라의 왕족은 성골과 진골이라는 구분된 개념이 아닌 통일된 개념이었다. 그러던 중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계의 후손들은 자신들이 왕실적통으로서 왕위의 대를 이을 것을 원한다. 진지왕이 폐위되자 백정(진평왕)은 왕위를 얻기 위한 명분 혹은 왕이 된 후의 정통성 강화를 위해 자신의 아버지 동륜태자를 직계로 내세운 것이다. 그래서 다른 진골들과는 구분되었고 이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 성골의 개념이라 한다. 즉 '성골'은 왕실적통인 동륜계라는 왕실 직계 진골을 나타낼 뿐 드라마처럼 왕이 될 수 있는 필수조건은 아니었던 것이다.

드라마에서 다루는 성골의 개념이 실제와 차이가 있는 것은 학설간 견해 차 때문이다. 골품제에 관해선 다양한 학설이 있는 데 그 중 대표적인 두 학설이 있다. 첫째는 성골은 부계와 모계가 모두 순수한 왕족이고 진골은 한쪽이 왕족이 아닌 것이라는 학설이다. 두 번째는 혈족집단의 분지화 과정에서 성립되었다는 학설이다. 학계에서는 분지화 과정에서의 성립, 즉 동륜계를 차별화하는 개념이 성골이었다는 두 번째 학설을 지배적으로 받아들인다.

그 근거로 성골과 진골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드라마에서는 성골만이 왕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진골인 미실은 왕을 꿈꿀 수 없다라는 내용을 시사하지만 적어도 사료상에서는 성골과 진골간의 차이를 찾아보기 힘들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관직에서의 진골은 성골과 마찬가지로 최고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성골의 특권이 명시되어 있지도 않다. 물론 당시 진골이 왕이 될 수 없었다는 내용도 찾아볼 수 없다. 때문에 적어도 제도상으로는 성골과 진골의 차이성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유추할 수 있다.

실재적 근거로는 진골인 김춘추가 왕위에 오를 때 별다른 반발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있다. 유물에서 나타난 근거로는 낭혜화상비문에 나타나는 골품제 관련 기록이 있다. 낭혜화상비문에는 '聖而眞骨'이라는 글귀가 씌여 있는데 성골과 진골을 따로 표현하지 않았다. 이는 상하의 차이로 인식될 수 있는 성골과 진골의 계급적 차이가 존재하지 않으며 같은 실체를 두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렇기 때문에 드라마처럼 성골이 아니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없다는 논리, 오직 성골이 아니라는 진골 세력이 신분의 벽을 체감하며 고뇌하는 모습은, 나아가 부모의 혈통만을 기준으로 성골과 진골의 차이를 두는 학설은 사실로 받아들이기에 다소 무리가 있는 것이다.

골품제는 신라의 근간이었을까?

드라마 선덕여왕 40회(10월 6일 방영)에서는 골품제는 신라의 근간이라는 대사가 유독 많다. 그러나 골품제가 신라사회의 중심적인 신분체제인 것은 맞지만 골품제의 시작과 신라의 시작은 일치하지 않는다. 골품제가 성립했다고 여겨지는 때는 박혁거세가 신라를 건국했던 때가 아닌 신라 중고기에 해당하는 514~654년 경이다. 이때는 귀족의 왕경인만을 대상으로 적용했으나 중대(654~780)에 이르러서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범위가 넓어지게 된다.

골품제가 정비된 배경은 신라의 체제변화와 관련이 있다. 6부 체제였던 신라가 법흥왕대에 이르러 율령 반포를 통해 일원적인 관료 형식으로 변화된다. 율령반포와 신분질서는 상관관계에 있으므로 법흥왕대에 이르러 골품제도가 성립되었다고 한다. 그 상관관계란 율령을 반포할 때 원래의 신라인과 경주지역으로 이주해온 지배층에 적용하기 위해 만들었음을 뜻한다. 즉, 법흥왕대 이전에는 골품제가 확고하지 않았거나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골품제가 신라의 근간이라는 드라마 속 표현과 의식 역시 허구라 할 수 있다.

신라만의 독특한 신분제도 '골품제'

신라의 골품제는 용춘의 말대로 신라의 근간이든, 김춘추의 말대로 천박하고 야만적인 제도이든 간에 신라만의 독특한 제도임에는 틀림 없다. 골품제는 신분을 골과 품으로 나누어 규정한다. 왕족을 대상으로 한것이 골제, 귀족과 일반백성을 대상으로 하는 두품제로 구분된다. 골품제도는 드라마에서 드러나는 관직 진출은 물론이고 혼인, 공복의 빛깔과 옷감의 종류, 신발의 재질, 관의 재질, 가옥, 수레, 장식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규제한다. 3두품 이하는 사실상 평민으로서 규제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고 한다.

골품제는 삼국통일 이후 내부적 변화를 겪었으며 신라의 멸망과도 직결된다. 최치원으로 대표되는 6두품들의 불만이 가득 쌓여 신라를 등지게 되기 때문이다. 신분제도로 인해 국가의 흥망성쇠가 판가름난 것이다.

드라마 선덕여왕 속 화백회의
 드라마 선덕여왕 속 화백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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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픽션일 뿐인데 일일이 왈가왈부하는 태도는 좋게 비추어 질 수많은 없다. 이 글 역시 '재미로 보는 걸 일일이 걸고 넘어지냐'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긴 힘들다. 역사적 사실을 연구하는 사학과 상상력을 살로 덧붙이는 서사의 영역이 엄연히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극, 특히 선덕여왕과 같은 시청률 높은 사극은 팩트와 픽션의 벽을 모호하게 해줄 염려가 있다. 때문에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올바른 의제를 설정해줄 필요성이 있다는 점 또한 간과해서는 안된다.


태그:#선덕여왕, #골품제, #진골, #성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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