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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부터 열리고 있는 정운찬 국무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뜻밖의 사실이 드러났다. 정 후보자가 백성학 영안모자 회장으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용돈' 명목으로 1000만 원을 받았다고 시인한 것. 이날 그의 답변을 요약하면 이렇다.

"해외에 나갈 때 한 두 번 걸쳐 '너무 궁핍하게 살지 말라'고 소액을 준 적이 있다. 두 번에 걸쳐 1000만 원 정도 받았다."

이날 청문회에서 정 후보자의 시인을 이끌어낸 강운태 민주당 의원은 애초 '세계적 Y모자 회장'이라는 익명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것이 '모자왕'으로 불리는 백성학 회장을 가리킨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정 후보자가 백 회장으로부터 1000만 원을 받았다고 시인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1000만원 수수건'은 백 회장의 '인맥관리의 힘'이 유감없이 드러난 사례라는 평가가 많다. 특히 정 후보자가 총리 내정을 계기로 여권의 잠재적 대권주자로 자리잡았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흥미롭다.

검찰 진술 "의대 교수들을 지원해 총장으로 선출했다고 말해"

신현덕 전 경인방송 공동대표는 지난 2006년 12월 27일 검찰조사에서 "백성학 회장이 '정운찬이 서울대 총장이 될 때 내가 의대 교수들 지원해 총장으로 선출하게 했다'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신현덕 전 경인방송 공동대표는 지난 2006년 12월 27일 검찰조사에서 "백성학 회장이 '정운찬이 서울대 총장이 될 때 내가 의대 교수들 지원해 총장으로 선출하게 했다'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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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후보자는 21일 청문회에서 "백 회장은 형제 같은 사람으로 수십 년을 같이 했다"고 말했다. 그만큼 친밀한 관계를 맺어온 지 오래됐다는 얘기다. 두 사람이 알고 지낸 지는 20년이 넘은 것으로 알려졌다.

22일 <오마이뉴스>가 입수한 검찰 수사자료에는 2006년 12월  27일 신현덕 전 경인방송 공동대표가 이렇게 진술한 것으로 나와있다.

"(2006년) 7. 20 조선호텔 일식집에서 백성학 회장과 저녁을 먹었는데 이때 백 회장이 미국과 세계를 연결하는 조직으로 자기가 세계를 움직인다고 말하였고, SBS가 보도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딸 기사가 월간 조선 조갑제와 배영준의 작품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운찬이 서울대 총장이 될 때 자기가 의대 교수들을 지원하여 총장으로 선출케 하였다고 말하는 등 국내외 정세를 저에게 말하고 헤어졌습니다."

이러한 진술과 관련해 신 전 대표는 22일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당시 검찰에서 진술한 것 외에 지금 내가 다시 발언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백 회장을 아는 한 인사는 "몇 년 전 백 회장이 사석에서 '우리 쪽에서 정운찬이를 서울대 총장으로 만들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고 전했다.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였던 정 후보자는 2002년 7월부터 2006년 7월까지 서울대 총장을 지냈다. 이후 그는 서울대 총장 경력을 바탕으로 잠재적 대선주자로 급부상했다.

"백 회장 등의 도움으로 서울대 총장 될 수 있어 감사"

그렇다면 신 전 대표의 검찰 진술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것일까? 최근 발간된 월간 <신동아> 10월호 보도가 그 의문에 답을 주고 있다.  

정 후보자의 '정치적 멘토(mentor)'인 김종인 전 민주당 의원은 <신동아>와 한 인터뷰에서 "박용현 (서울대) 병원장에게 '의과대 교수 표가 정운찬 교수에게 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백 회장에게 요청했고, 백 회장은 이 요청을 박 원장에게 전달했다"며 "박 병원장이 실제로 정 교수를 도왔다고 본다"고 말했다. 

김 전 의원의 증언은 신 전 대표가 검찰에서 진술한 내용과 일치한다. 특히 <신동아> 보도에 따르면, 백 회장은 지난 4월 30일 서울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열린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 창업 50주년 축하연'에서 "내가 앞장서서 (박용현 병원장에게 부탁해) 정운찬 교수가 서울대 총장이 되도록 뛰었다"고 '지원사실'을 공개했다.

이와 관련, 백 회장은 "정 후보자가 한 공개석상에서 '백 회장 등의 도움으로 서울대 총장이 될 수 있어 그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고 말한 적이 있어 이 문제가 외부에 알려졌다"고 말했다고 <신동아>가 전했다.

당시 축하연에는 정 후보자가 직접 참석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는 22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이를 인정했다.

강운태 민주당 의원이 "(백성학 회장이) '내가 앞장 서서 저기 있는 정운찬 교수가 서울대 총장이 되도록 적극 뛰었다'고 말했다"고 하자, 정 후보자는 "어렴풋하게 기억난다"며 "가볍게 이해했다"고 말했다.

정 후보자는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D그룹(두산그룹)에 계신 분(박용현 회장)에게 가서 '정운찬하고 나하고 친하니 한 표 찍어줘라'고 말했다"면서도 "하지만 (기업) 회장이 총장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답변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두산베어스 팬인 정 후보자가 대학 재학시절 두산그룹의 전신인 OB맥주로부터 장학금을 받았다는 점이다. 다만 그는 "프로야구가 생기면서 대학시절 장학금 줬던 회사의 구단에 친밀감 느껴서 오늘날까지 팬이 됐다"며 "두산과 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백성학 회장은 국내외 유력인사 마당발

결국 정 후보자와 수십년 관계를 유지해온 백 회장이 '정운찬 총장 만들기'를 위해 평소 친분이 두터운 박용현 당시 서울대 병원장에게 지원을 부탁했고, 박 병원장의 지원에 힘입어 2002년 7월 총장에 선출될 수 있었다는 얘기다. 강운태 의원은 "서울대 병원 소속 서울대 교수가 가장 많다"고 말했다. 1200여 명의 교수 중 서울대 의대 소속 교수는 300여 명 정도로 알려졌다.

'정운찬 총장 만들기' 총대를 멘 박용현 전 서울대 병원장은 박승직 두산그룹 창업주 손자이자 두산그룹 초대 회장을 지낸 박두병 전 회장의 아들이다. 그는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뒤 서울대 의대 외과학 교수와 서울대병원 기획조정실장, 진료부원장 등을 거쳐 11~12대 병원장을 지냈다. 두산건설 회장과 전경련 부회장을 거쳐 지난 3월부터는 두산그룹 회장을 맡고 있다.

두산그룹과 백 회장의 관계와 관련해 한 인사는 "두산그룹이 종합상사로 수출을 할 때 미국내 인맥이 많은 백 회장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귀띔했다.

또 박 회장에게 '정운찬 지원'을 요청했던 백성학 회장은 '유력인사 마당발'로 잘 알려진 입지전적 인물이다. '영안모자'를 세계적인 모자회사로 키워 '모자왕'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2006년~2007년 중요한 국가정보를 미국에 유출했다는 '미국 스파이 의혹 사건'에 휘말렸다.

흥미로운 사실은 지난 2007년 1월 검찰이 압수한 '회장 정책 파일'에 국내외 유력 인사들의 명단이 총 망라돼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릴리·존 사노·샤힌 등 미국 인사와 HC(이회창)·DJ(김대중) 등 국내 인사를 관리하는 '중점관리 파일', 록펠러·존 맥케인·그레그·YS(김영삼)·이인제 등에 관한 내용이 담겼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타 VIP 관리파일' 등이 포함돼 있다. '국내 VIP' 부분에는 국내 정계·관계·재계 인사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특히 백 회장은 이명박 대통령을 2003년부터 알고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백 회장은 검찰 조사에서 "2003∼2004년 안중근 의사 기념관 건립관계로 만났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대통령은 서울시장과 한나라당 대선후보 시절 백 회장에게 당시 라이스 국무부장관, 럼스펠드 국방부장관 등 미국측 고위인사들과의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요청한 사실이 검찰조사로 드러나기도 했다.

이와 함께 백 회장의 미국 인맥에는 존 볼튼(전 국무부 차관), 제임스 R 릴리(전 주한 미 대사), 리차드 롤리스(전 국방부 아시아·태평양 담당 부차관), 젭 부시(전 플로리다 주지사, 부시 대통령 친동생), 도날드 그레그(전 주한 미 대사), 테레스 샤힌(전 대만대표부 대사), 다니엘 아놀드(전 CIA 태국 지부장), 존 사노(전 CIA 한국 지부장) 등이 포함돼 있다. 이들이 주로 CIA, 국무부, 국방부 등에서 고위간부로 근무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민주당 "1000만 수수 뇌물죄 적용 검토"... 정운찬 "직무 관련성 없다"

한편 정세균 민주당 대표는 이날 정 후보자의 1000만 수수와 관련해 "국가공무원법상의 뇌물죄에 해당하는지 적법성 여부를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 대표는 "지금까지 제기된 문제만 가지고도 국민의정부, 참여정부 청문회에 의해 축적된 평가기준으로 본다면 적격이라고 하기에 어려운 상태"라고 지적했다.

박지원 정책위의장은 "서울대 총장이면 엄연히 공무원인데 1000만 원을 받았다면 이는 사법처리 대상이므로 총리로서 자격을 상실했다"며 "스스로 용퇴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고 압박했다.

최재성 의원도 청문회에서 "교육공무원징계관련 규칙을 보면 1000만 원 이상 받은 것은 청렴의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파면감"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정 후보자는 "잘한 것은 아니지만 제 경우 뇌물죄가 성립하려면 직무 관련성과 대가성이 있어야 한다"며 "하지만 서울대 교수와 (영안모자) 회장은 아무런 직무 관련성이 없다"고 반박했다.


태그:#정운찬, #백성학, #박용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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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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