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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미국 LA에 사는 내 바로 아래 누이동생이 6년 만에 다시 고국을 찾고 친정을 방문했습니다. 지난 1일 아침 인천공항에 내렸다가 7일 오후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 역시 금세 지나갔고, 또 찰나였습니다. 오는 것과 가는 것이 '동시(同時)'라는 사실을 실감시키며….(지난 7일 인천공항에서 동생을 배웅하고 온 후로 또 금세 일주일이 흘렀습니다. 그 시간 역시 순식간이요, 찰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친정 8대조 할아버지의 효(孝)와 할머니의 열(烈)을 기리는 합문인 태안군 근흥면 두야리 소재 정려문에도 6년 만에 다시 찾아 참배할 수 있었다.
▲ 8대조부모 효열정문 친정 8대조 할아버지의 효(孝)와 할머니의 열(烈)을 기리는 합문인 태안군 근흥면 두야리 소재 정려문에도 6년 만에 다시 찾아 참배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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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오래 전 미국 시민이 되어 20년 이상 미국에서 사는 누이동생은 지난 2003년 9월 노친의 팔순 생신 때 친정에 온 적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5년여 살다가 미국으로 옮겨갈 때 잠시 친정을 다녀간 후, 미국 생활 15년 만에 노친의 팔순 생신에 맞춰 친정을 찾은 것이었지요.

15년 만에 친정을 찾은 누이를 맞고, 또 순식간에 일주일이 지난 후 다시 동생을 보내고 나서 울적한 심사를 달래며 그 해 9월 두 개의 글을 썼습니다. <15년 만에 귀국한 누이를 다시 배웅하고>와 <시인과 장미꽃 33송이>라는 글입니다. 그 글들은 2003년 9월 23, 24일 먼저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 '사는 이야기' 난에 올려진 다음 여러 사이트에도 올려졌습니다.       

오늘 6년 전의 그 글들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그때 글에도 일주일의 시간이 순식간이었고, 오는 것과 가는 것이 '동시'였다는 표현이 있더군요. 우리네 인생 역시 얼마를 살든 모두 찰나의 삶을 살뿐이라는 얘기도 있고….

 태안군 태안읍 남산리에 있는 태안천주교회 공원묘지 안의 친정 아버님 묘소 앞에서 기도와 절을 올린 다음 친정 아버님께서 생전에 즐겨하신 막걸리를 부어 드렸다.
▲ 성묘 태안군 태안읍 남산리에 있는 태안천주교회 공원묘지 안의 친정 아버님 묘소 앞에서 기도와 절을 올린 다음 친정 아버님께서 생전에 즐겨하신 막걸리를 부어 드렸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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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역시 세월의 덧없음과 허무를 잘 알기에, 또 자신의 뜻과는 아무 관계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유를 하느님 신앙 안에서 찾고 있기에, 동생의 일주일 친정 생활은 그대로 신앙생활이기도 했습니다.

동생은 미국 LA의 회계사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회계 능력 때문인지 교적을 두고 있는 한 한인성당의 사무장 일도 본다고 하더군요. 회사 근무에다가 성당 사무장 일에다가 집안 실림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라고 했습니다.

집안 살림도, 올해 연세 94세이신 시아버님을 모시는 일이며, 건강이 온전치 않은 남편을 보살피는 일 등으로 여간 분주한 게 아닌 모양이었습니다.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시아버님은 구순을 훨씬 넘기신 연세에도 식사를 잘 하시고, 지금도 술과 담배를 '적당히' 즐기신다고 하더군요. 식성은 다소 까다로우신 편이어서 며느리가 담근 김치가 아니면 드시지를 않아 꼭꼭 김치를 담가야 하고, 치아가 좋지 않으셔서 김치를 잘게 썰어 드려야 하고….


 태안군 태안읍 남산리, 남면 진산리, 근흥면 안기리와 두야리 사이로 쏘옥 들어와 있는 호수 같은 장면수 바다는 우리 남매의 어린 시절 추억들이 물비늘처럼 피어나는 곳이다.
▲ 장명수 바다 태안군 태안읍 남산리, 남면 진산리, 근흥면 안기리와 두야리 사이로 쏘옥 들어와 있는 호수 같은 장면수 바다는 우리 남매의 어린 시절 추억들이 물비늘처럼 피어나는 곳이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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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동생의 시아버님은 옛날 경남 마산의 경남대 학장을 지내시고, 일본 경도대학에서 오랫동안 영문학을 가르치신 배덕환 박사님인데, 5개 국어에 능통하시다고 합니다. 요즘엔 러시아어를 공부할 겸 러시아 서적들을 읽고 번역도 하며 소일하신다고 합니다.

누이동생의 시어머님은 마산 출신 제1호 여의사로 마산에서 병원을 운영하시다가 오랫동안 소록도에서 생활하며 봉사진료를 해오신 분입니다. 1980년대 어느 핸가, '용신봉사상'을 수상하여 언론에도 소개된 적 있는 전풍자 님이신데, 10여 년 전에 고인이 되셨지요.

 장명수의 잔잔한 물을 밟으며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했던 추억을 떠올린 동생은 오랜 세월 어디에 가서 무얼 하다가 왔는지 모르겠다며 울먹이기도 했다.
▲ 장명수 해변 장명수의 잔잔한 물을 밟으며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했던 추억을 떠올린 동생은 오랜 세월 어디에 가서 무얼 하다가 왔는지 모르겠다며 울먹이기도 했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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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교사였던 누이동생은 남편이 태안여자중학교 음악교사로 재직하던 시절에 남편과 만났습니다. 1977년 결혼하고 삶의 자리를 마산으로 옮기면서 교직을 떠났습니다. 경남대 사학과에 편입학하여 과 수석으로 졸업한 다음 중등교원으로 진출할 생각이었다가 일본에 가서 살고자 하는 남편 뜻에 따라 자기 뜻을 접어야 했습니다.

남편은 음악 공부를 위해 일본에서 몇 년 산 다음 애초엔 독일로 갈 생각이었다는데, 독일이 아닌 미국 LA로 자리를 옮겼고, 건강 문제로 인해 제대로 공부도 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세월만 잃게 되고 말았지요.

동생에게는 남편을 음악가로 대성시키고 싶었던 소망이 사라진 자리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일과 시부모 봉양과 남편 건강 뒷바라지와 집안 살림, 그리고 가난한 살림에도 애써 대학까지 가르쳐주신 친정 부모에게 보답을 드리지 못한 죄책감이 큰짐으로 남게 되었고….

프랑스 소르본대학 출신으로 미국에서 대학교수를 하는 시누이와 천주교 마산교구 사제이신 시동생이 한 분 계시는데, 시동생 신부님이 올해 미국 LA의 어느 한인성당 주임으로 오셔서 동생은 알게 모르게 위안이 된다고 하더군요. 부친이 워낙 고령이시고, 단 하나뿐인 친형도 건강 문제가 있는 데다가 환갑 줄에 들게 되어서, 시동생 신부님이 자원하여 미국으로 오신 것 같다며, 자신이 사무장으로 일하는 성당과 시동생 신부님 성당은 한 시간 거리라고 하더군요. 

 5일 저녁에는 친정 붙이들과 함께 노친을 모시고 만리포 해변을 찾았다. 2007년 12월 7일 유조선 기름유출 사고 피해가 가장 극심했던 만리포 해변이 원래 모습을 회복한 것을 확인하는 기쁨도 컸다.
▲ 만리포 해변 5일 저녁에는 친정 붙이들과 함께 노친을 모시고 만리포 해변을 찾았다. 2007년 12월 7일 유조선 기름유출 사고 피해가 가장 극심했던 만리포 해변이 원래 모습을 회복한 것을 확인하는 기쁨도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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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은 친정에서 생활하는 일주일 동안 태안성당 평일미사에 매일 참례했습니다. 첫날인 1일 화요일 저녁에는 미사 후에 나와 아내가 함께 참여하는 레지오 '샛별' 쁘레시디움 주회에도 참석했답니다. 나는 그 날 오후 서울에 가서 용산미사에 참례하느라 레지오 모임에 빠질 수밖에 없었는데, 내 자리를 누이동생이 메워준 셈이 되었지요. 그리고 동생은 '샛별' 쁘레시디움 부단장인 내게서 주회 참석 확인 사인을 받더군요. 자신이 참여하는 미국 LA 한인성당 레지오 쁘레시디움에 보고를 해야 한다고….

동생은 친정에 있는 동안 한방병원에 입원해 계신 사촌 큰오빠 문병도 하고, 다른 사촌 오빠들 댁에도 찾아뵙고, 8대조 효열정문이며, 선산이며, 태안성당 공원묘지 안에 잠들어 계신 선친과 가운데 올케도 찾아보았지요.
          
성묘를 한 날 저녁 무렵에는 옛날 우리 어렸을 적에 자주 가곤 했던 장명수 바다에도 가서 잠시 아련한 추억에 잠겨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옛날 초등학생 시절 아버지와 함께 말미잘을 찾아 장명수 해변을 오래오래 걸었던 날로 돌아가기도 했고, 많이 바뀌고 변한 오늘의 장명수 해변 풍경 속에서 옛날의 풍경들을 떠올려보기도 했지요.

파도가 없는 바다인 장명수의 호수 같이 잔잔한 썰물에 발을 담그기도 한 동생은 누구보다도 장명수를 그리워하는 부천의 라일운 시인과 통화를 하면서, "내가 어디에 가서 오랜 시간 무엇을 하다가 왔는지 모르겠다"며 울먹이기도 하더군요.

 노친을 모시고 6일(주일) 아침 6시 미사를 지낸 다음 대성당 제대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동생은 태안성당 새 성전 건립사업에 기꺼이 참여하여 대성당 2층 발코니에 모셔지게 될 남편과 자신의 수호성인(클레멘스/세레나) 성상 값 600만원을 봉헌했다.
▲ 고향 성당 노친을 모시고 6일(주일) 아침 6시 미사를 지낸 다음 대성당 제대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동생은 태안성당 새 성전 건립사업에 기꺼이 참여하여 대성당 2층 발코니에 모셔지게 될 남편과 자신의 수호성인(클레멘스/세레나) 성상 값 600만원을 봉헌했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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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3년의 글에도 썼던 얘기지만, 나는 베트남 전장에서 받는 전투 수당을 찾아서 공주교대에 다니는 동생에게 보내준 적이 한번 있었지요. 당시에는 몰랐는데, 동생은 그 돈을 은행에서 찾아 가지고 가다가 그만 소매치기에게 털리고 말았답니다. 그때의 비통함과 상심을 오래 감추고 있다가 한참의 세월이 흐른 후에 고백을 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도 그때의 일을 얘기하게 되더군요.

동생은 이번에도 제자들을 두 명 만났습니다. 태안초등학교 6학년 여자학급 담임 시절 제자들인데, 농협 상무와 유치원 원장으로 일하는 사람들이지요. 벌써 대학생 자녀를 둔 엄마들이 되었는데, 옛날 초등학생 시절 담임 선생님의 영향으로 일찍이 천주교 신자가 되어 '성가정'을 이루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또 어떻게 옛 은사의 귀국 사실을 알았는지 연락을 해와서 동생은 6년 만에 다시 옛 제자들과 만나 바닷가에 가서 생선회로 저녁 대접을 잘 받았지요.

6일 오전 노친을 모시고 가족 모두 덕산온천 목욕행사를 가졌다. 그리고 집에 와서 잠시 동안 옛날 사진첩들을 보며 오늘과는 너무도 다른 옛날 우리 가족들의 모습에 신기해하기도 했다.
▲ 옛날 사진첩 6일 오전 노친을 모시고 가족 모두 덕산온천 목욕행사를 가졌다. 그리고 집에 와서 잠시 동안 옛날 사진첩들을 보며 오늘과는 너무도 다른 옛날 우리 가족들의 모습에 신기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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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동생은 최근 태안교육장으로 부임한 교육대학 남자 동기도 만나고, 교육장이 보내준 차를 타고 가서 교육청 구경도 했습니다. 교육장이 된 동기와 동생은 과거 태안초등학교 6학년 담임을 할 때 서로 이웃 반이어서 가장 얼굴을 많이 보는 사이였다고 합니다. 다른 학급 교사들이 서로 '잘해 보라'는 의미 있는 말을 하기도 했고….

동생은 교육장이 된 동기가 많이 부러운 눈치였습니다. 동생은 교육대학 졸업과 동시에 발령을 받아서 두 개 학교를 거친 다음 태안초등학교로 왔는데, 1977년 결혼과 함께 교직을 떠날 때 많은 이들이 아쉬워했습니다. 연구점수와 근무평가 등에서, 동기들 중에서 가장 많은 점수를 쌓아가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대로 교직에 있었더라면 무난히 교장도 되고 교육장도 될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오빠와 많이 비슷해서, 그것이 승급에 장애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1972년 유신헌법 국민투표 때 아버지보다는 오빠 말을 따라 반대표를 던짐으로써, 태안의 3% 반대쪽에 속했던 이력도 있고….)

동생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며칠 후 내게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2003년에는 친정 방문 후 미국에서 보낸 메일에 '일주일의 전설'이라는 표현이 있어서, 그 '전설'이라는 단어가 묘한 아픔을 안겨주었던 기억이 있는데, 이번 메일에는 '인생을 헛살았다'는 표현이 있어서 더욱 가슴을 아리게 하더군요.

"돌아오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고, 떠나기 싫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아예 고국에 나가 어머님 곁에서 몇 달 함께 지내고 싶은 마음이 다시 간절해지는 것이…돌아보니 지난 20여 년 간 고국에 간 것이 딱 세 번이었습니다. 어머니께 평생 너무 큰짐을 지워드리고 효도를 하지 못하였으니, 저는 인생을 헛살았습니다. 하느님 말씀 한치도 허투로 듣지 말고 그대로 사는 것이 바로 복된 길, 후회 없는 길, 실패하지 않는 삶의 길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동생은 다시 일주일 동안의 '전설'을 안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홀로 되신 고령의 시아버님과 건강이 원만치 않은 남편이 기다리고 있는 자리로….

"이곳은 무탈하고, 어제 저녁에는 아버님 모시고 할머니 제사를 약식으로 모셨고, 저 없는 일주일 동안 홀쭉 살이 여윈 클레멘스가 집안 대청소를 하고 기다려준 덕에 쾌적한 상태로 직장과 성당을 오고 갈 수 있습니다."

고1 시절에 미국 고모를 처음 보았던 내 딸아이는 대학 4년 시절에 다시 보게 된 고모를 6년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인천공항에까지 함께 와 배웅을 했다.
▲ 고모와 조카 고1 시절에 미국 고모를 처음 보았던 내 딸아이는 대학 4년 시절에 다시 보게 된 고모를 6년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인천공항에까지 함께 와 배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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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도 크고, 이런저런 어려움도 클 테지만, 동생은 그 모든 회한과 어려움을 하느님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지하여 하나하나 헤쳐나갈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러다 보면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요.

모두 함께 어언 오후의 산그늘이 점점, 또 부쩍 길어지는 세월 속을 가고 있지만….


태그:#노친 병환, #누이동생, #친정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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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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