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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불황이 심할수록 서민들은 더욱 어렵기 마련이다. 장사를 천직으로 여기며 부평시장 안에서 식자재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강원상회'를 운영하는 노기정(39)씨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에게도 잘나가던 시절이 있었으나 경기침체와 유통환경 변화로 애를 먹고 있다.

 

노씨가 가장 먼저 손꼽은 '최근 장사가 잘 안 되는 이유'는 대형마트의 성장이다. 그로인해 8년 전부터 감소하기 시작한 매출이 최근 경기침체가 겹치면서 더 줄고 있다는 것. 게다가 동종업체도 늘어 만만치 않다.

 

낙천적인 성격의 그가 밝힌 나름대로의 처방은 버티기와 고객에게 잘해주기다. 그는 "별수 있나요? 우선 이 시장에서 버텨서 살아남아야죠. 그래야 훗날을 내다볼 수 있잖아요"라며 "그리고 손님들에게 잘해주는 방법밖에 없어요"라고 호방하게 웃었다.

 

"군에 있을 때 휴가 나와도 가게로"

 

경상남도 함양이 고향인 노씨는 열아홉에 인천으로 올라왔다. 다행히 누나가 인천에서 장사를 하고 있던 터라 이곳 부평시장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0년 터울의 매형 김경일(49)씨가 어느 정도 터전을 닦아 놓은 뒤라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만만치는 않았다.

 

스무 살도 안 된 앳된 청년이 처음부터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장사가 손에 익지 않았을 뿐더러 바쁠 때라 심부름하기에도 급급했다. 장사가 손에 익을 만한 때는 세월이 조금 더 지나 그가 군대에서 제대하고 결혼한 후쯤이다.

 

노씨는 "부평시장이 잘 나갈 때죠. 정신없었습니다. 그저 이일 저일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 내가 뭘 하겠다, 해서 한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라며 "바쁜 탓도 있었지만 그래도 장사가 재미있었어요. 군대 가기 3일 전까지 여기서 일하다 고향 내려가 부모님께 인사하고 입대했죠. 군대에서도 휴가 나오면 으레 가게로 와 일하고 들어가곤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장사하기로 마음을 굳힌 것은 군에서 제대할 무렵이었다. 보통 남자들이 청년시절 가장 고민이 깊을 때가 제대 무렵이다. 1994년, 그 역시 인생의 진로를 놓고 이 궁리 저 궁리 하던 중 장사를 제대로 배워 한번 해보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는 "사실 제 생각도 있었지만 매형과 누님이 더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해요. 일을 잘 하니까 기다리고 있었겠죠? 제대하고 왔을 때 누구보다 반겨줬습니다"며 "군 입대 전 3년 넘게 가게 일을 했고 휴가 나와서도 가게 일 했으니 체득된 게 있었겠죠? 이 일이 적성에 안 맞았으면 아무래도 다른 일 알아봤을 텐데 그렇지 않은 걸 보면 천직이 맞아요"라고 웃었다.

 

"떼인 돈만 모아도 1억은 넘을 것"

 

제대 후 매형과 누나를 도와 처음부터 다시 차근차근 일을 배워갔다. 허드렛일부터 시작한 그였기에 일을 배우는 게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게다가 장사가 잘 될 때니 일하는 게 오히려 신나고 즐거웠다. 손님을 대하는 방법도 하나 둘 늘어가고, 대처능력도 쌓여갔다.

 

노씨는 "장사가 쉽다고는 생각 안했지만 결혼하고 났더니 장사를 쫌 알겠더라고요. 배달 일에서 벗어나 직접 손님을 상대하다보니 이 사람 저 사람, 별의 별 사람을 다 만나죠. 사람마다 다 틀리죠. 결혼하고 났더니 그런 게 보이더랍니다"라고 한 뒤 "그런데 장사를 좀 더 잘 해 볼라고 하니 유통환경이 변하기 시작하더라고요"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유통환경의 변화는 다름 아닌 대형마트의 급격한 성장과 지역상권 잠식이다. 아울러 경쟁업체도 많아지면서 어려움은 두 배로 늘었다.

 

그는 "우리가게는 식자재를 전문으로 하는 곳이다 보니 주부들이 많았죠. 지금도 식당이나 음식점 등에 주로 물건이 많이 나가는데 그 때는 일반 주부들이 더 많았습니다"라며 "학생들이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닐 때 이곳은 늘 북적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대형마트가 떡하니 들어서자 거짓말 안보태고 발길이 뚝 끊겼어요. 그리고 전에는 집에서 잔치를 많이 했는데 이젠 그러지도 않고, 잘 나가던 시절이 그만 종치고 만 거죠"라고 웃으며 전했다.

 

강원상회의 어려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97년 IMF 외환위기로 실업자들이 대거 발생했다. 이들이 퇴직금을 털고 대출금을 얹어 마련한 게 대부분 음식점이었다. 음식점의 과잉과 더불어 경기침체는 이들 자영업자에게 또 다른 시련을 안겨주었고 이는 강원상회로도 이어졌다.

 

노씨는 "그래도 2000년대 초반까지는 버틸 만했던 것 같아요. 물론 지금이 더 어렵긴 하지만 그때는 뭐가 문제였냐면 외상 떼이는 것이었어요. 수금하러 갔을 땐 이미 야반도주하고 없더라고요"라며 "막상 만나도 사정을 들어보면 진짜 돈 나올 때가 없는 거예요. 별수 있나요? 못 받지. 7년 넘게 단골로 여긴 사람도 야반도주 해버렸습니다. 많게는 몇 천에서 몇 백 작게는 몇 십 만 원을 못 받았는데, 그런 가게가 지금 더 많이 늘었어요. 자영업자들의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고 말했다.

 

 

"그래도 장사가 내겐 천직... 좋은날 올 것"

 

아무리 어려워도 낙천적인 성격의 그는 굴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옆에는 매형 김경일씨가 든든한 버팀목으로 지키고 있기도 했다. 대형마트에 상권 내주고 경기도 안 좋고, 돈도 떼였지만 살길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노씨와 매형 김씨는 식자재 유통 전문경력을 살려 급식세계에 도전했다. 학교급식은 물론 단체급식시장을 겨냥해 이곳저곳 문을 두드려가며 그동안 구축한 인맥을 토대로 가능한 곳부터 강원상회 식자재의 우수성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 같은 노력은 백령도 납품으로까지 이어졌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일의 분업화가 이뤄졌다. 매형 김씨는 주로 대외적인 활동이 강해 비즈니스와 원거리 배달 일, 그리고 회계업무 등을 맡았다. 반면 모든 물건의 입고와 출고 등 꼼꼼한 부분과 함께 지역 내 배달은 노씨의 몫으로 떨어졌다.

 

그는 "백령도와 김포, 강화까지 배달을 나가요. 백령도가 아니라 더 아래 섬이라도 일이 있으며 가야하는 것 아닌가요?"라며 "손님은 누구나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장사만 그런 게 아니잖아요"라고 말했다.

 

장사를 천직으로 알며 낙천적으로 생활하는 그에게도 지금 시기는 분명 어려운 때다. 그는 이 시기를 버텨야만 좋은 날을 맞이할 수 있다는 생각에 오늘도 500여개 넘는 물건 값을 외우느라 정신없고, 들어오고 나가는 물건 땜에 더욱 분주하다.

 

그는 "몸은 힘들더라도 옛날로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장사꾼들이야 장사 잘 되면 그처럼 좋은 일 없잖아요"라며 "결혼 전에는 손님하고 많이 싸웠는데 이제 안 그럽니다. 손님에게 잘해줘야 해요. 그러면 기억하고 다시 찾습니다. 내일은 어떨까, 하고 눈감고 오늘은 어떨까, 하고 눈뜨는 인생이지만 이 일이 분명 내게는 천직입니다. 그래서 이 천직을 벼랑으로 내모는 대형마트는 반드시 규제해야 합니다. 언젠가는 꼭 좋은 날 올 것입니다"라고 호방한 웃음을 날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부평신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자영업자, #대형마트, #부평시장, #노기정, #강원상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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