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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들의 배는 눈부신 햇살 표류하는 북태평양 어디쯤, 깊은 사유(思惟)의 눈물로 역주행하는 10월의 굴곡을 지나 이 시대 화두(話頭)의 날카로운 소리 별빛으로 걸러내고 심해에 잠든 바다의 심장마저 거친 쌍끌이 투망 속에 건져 올린다. 어둠을 품은 등대의 불빛 뒤로 한 채 이제 속 깊은 신앙의 이력은 최후의 한 점 고독이 되어 미끄러운 물보라 날리며 우리들의 넓은 가슴 속에서 부서진다. 은빛 싱싱한 상상력들 피어나듯 은비늘 머금은 갑판 위, 새벽의 끝에 서서 바다의 거대한 거리를 잡고 마지막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바다-항해일지> 유진형

그리고 하늘
▲ 바다 그리고 하늘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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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출은 진 씨의 유품을 라면 박스에 넣고 밧줄로 꽁꽁 묶었다. 그리고 일단 진 씨의 유품을 캐비넷에 넣어두었다. 유품이라고 하기엔 너무 보잘 것 없다. 검은 비닐 가방에 낡은 작업복 한벌과 헤어진 내의 두벌과 수건 한장, 그리고 오래되어 보이는 성경책 한권, 또 꽤나 시간이 지난 신문지와 스포츠 주간지 밖에 없었다.

그리고보니 진씨는 그 흔한 핸드폰 하나 없었다. 그렇다고 가족이나 친구나 하다못해 술집 아가씨와 주고 받은 편지나 메모수첩 따위도 없었다. 석출은 굵은 이마의 주름살이 절로 구겨졌다. '39살까지 살아온 이 인생의 밑천이 이게 다 인가...'

석출로서는 어부, 진씨의 죽음은 해양경찰청에 익사사고 경위서를 써내면 된다, 하지만 선장, 맹석출로서는 그게 다가 아니다. 3년이나 한 배에서 지낸 인연 그게 그게 아니다 싶었다. 석출은 어떻게든 진 씨의 가족을 찾아서 그의 시신을 인계하고 싶었다. 그러나 가장 가까워 보였던 갑판장도, 또 동료 어부들도 진씨의 개인적인 정보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의논한 듯 함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며칠을 바다 속을 뒤집듯이 헤매며 진씨의 시신을 겨우 찾아 냉동창고에 보관 한 뒤였다. 오씨가 선장, 맹석출에게 악을 쓰듯이 대들었던 것이다.  평소라면 석출은 오씨는 가만두지 않았을 터다. 그러나 분위기가 분위기라서, 석출은 잠자코 듣고 있었던 것이다.

" 선장요 ! 마 죽은 놈은 죽은 놈이고...살 놈은 살아야 안 되겠능교 ? 죽은 놈 때문 며칠이나 고기 안잡고 수색했시면 마 선장 보고 누가 원망 하지 않심더. 마 이게 자업 자득이라는 거 아니겠능교 ? 혼자 독불장군처럼 굴더니 그렇게 된 거 아닝교 ? 미친 놈 죽고 싶어 환장하지 않았으면 폭풍 부는 밤에 와 갑판 올라갔겠능교 ? 마 죽고 싶어서 안 죽었겠능교 ? 마 인자 딱 신경불 끄고, 살 놈 좀 살려 주이소. "
"아니, 그럼 오씨는 진씨가 자살했단 말인가 ? 그리고 살 놈을 살려 달라니 ? 그건 무슨 해괴한 소리냐 ?"
"선장요. 선장은 그럼 그 치가 자살 할 거라는 눈치도 못챘능교 ? 배라고는 안 타봤다 카던데 왜 배를 탔을 낀교 ?  안그렁교 ? 갑판장요 !"
그때 진씨의 죽음에 대해 시종일관 함구를 하고 있던 갑판장의 쌍눈썹이 뱀꼬리처럼 올라갔다.
"야 !오씨 ! 니 찢어진 입이라고 말 함부로 하나 ? 목숨이 두개가 아니면 니 일이나 잘 하세요 !"
그러자 오씨도 지지 않고 대답했다.
"마, 갑판장요 ! 그럼 천벌 받심더. 하늘이 다 보고 있심더. 모두들 다 그러는 게 아니란 말임더....흑흑흑..."
오씨의 오열에 모두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아니, 오씨, 자넨 왜 울고 이러나 ? 다 선장 잘못이네. 이게 다 선장 못난 탓이야."
맹석출은 모두 무능한 선장인 자신의 탓이라고, 분위기를 수습코자 했다. 그러자 갑판장이 석출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선장요. 난 아무 죄 없심더. 그러니 오씨 말 듣고 날 진씨 죽음에 끌어 붙일 생각일랑 하지 마소. 에이 재수 옴 붙은 것들...퇩퇩 "
갑판장은 공연히 긴 대나무 작살을 오씨 곁에 끌고와서 던지고 선실로 사라졌다. 정말 오씨의 말대로 진씨는 자살한 것일까. 진씨의 자살에 갑판장이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석출은 머리가 아팠다. 그래 이미 진씨는 죽었다. 죽고 사는 것이 하늘의 뜻이다....그래도 진씨는 아직 젊은 것이다. 서른아홉....그 나이까지 어디서 무얼하고 대체 살아온 사람일까. 달랑 주민증 하나 믿고, 배에 태운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날 밤, 일찍 조업을 마치고 모두들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니까 진씨는 모두들 잠자리에 든 시각에 갑판에는 왜 올라간 것일까. 나중에 보니 갑판에 굴러다니는 소주병이 나왔는데 아무도 임자가 없으니, 그 빈 술병 임자는 진씨인 것이다. 술을 먹고 바다에 뛰어든 것인지 아니면 발을 헛딛어 바다에 빠진 것인지, 술에 취한 진씨를 누가 밀어버린 것인지, 목격자가 없는 것이다.....

익사의 경우, 대개 남겨진 유품 속에 가족사진 따위나 편지가 있기 마련이고, 하다 못해 전화 번호를 적어 둔 수첩 정도는 나온다. 그런데 진씨의 유품에는 아무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석출은 성경 책 속에 무엇이 있나 몇 번 뒤적이었으나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평소 성경책을 자주 읽고 외웠는지 빨간 볼펜으로 밑줄이 그어진 데가 많았다.

구마다 정든 불빛
▲ 항 구마다 정든 불빛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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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새가 그물 치는 것을 보면 헛일이겠거늘 그들의 가만히 엎드림은 자기의 피를 흘릴뿐이요 숨어 기다림은 자기의 생명을 해할 뿐이니 무릇 이를 탐하는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잠언 1장-17;20)

평소 실어증 환자처럼 그렇게 말이 없던 진씨의 성경책 속에서, 석출은  익사 사고의 원인을 찾으려 애를 쓰는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치듯 놀랬다. 타살이라면 복잡해 진다. 그리고 진씨를 누가 무슨 원한으로 죽인단 말인가. 내 배에서 그럴 일은 없다...그러나 성경책 속에 밑줄 그어진 성경귀절이 혹시 진씨의 죽음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하고 석출은 몇번이나 반복해 읽었다. 그러나 난해하기 짝이 없는 성경 귀절을 무신자인 석출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오씨의 수상한 언행이 마음에 걸렸다.

석출은 그렇게 탐정처럼 이런 저런 상황들을 머릿 속에 그리면서, 진씨에게 무심했다고 뒤늦은 후회를 했다. 사실 석출이 진 씨를 배에 태운 것은 힘께나 써보여서였다. 그리고 그 육중한 체격 속의 '과묵함' 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혼자 감당하기 힘든 어떤 고통이 있었다면...왜 내게 손을 내밀지 않았을까. 아니 석출은 먼저 그에게 손을 내밀어주지 못한 것이 가슴이 찡하게 아파왔다. 자신도 언제 진씨처럼 되지 말라는 법이 있단 말인가. 

양
▲ 해 양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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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면 위에는 물새 몇 마리가 날개를 접고 몇 시간째 끔쩍하지 않고 있었다. 석출은 문득 죽은 아버지를 생각했다. 아버지도 바다에서 돌아가셨다. 가만히 생각하면 바다에 많은 이들을 보낸 것이다. '고기 잡이'라는 그 하나의 도구로 살아온 자신의 목숨도 언제 바다가 될지 알 수 없다 생각하니 석출은 허망했다. 

갑판에는 장 씨가 검은 장화를 신은 발로 파득거리는 상어의 등을 지그시 눌러 도끼로 토막내고 있었다. 갑판 내벽에 상어 토막은 패어져 가지런히 장작토막처럼 쌓여갔다. 감 씨가 그걸 부지런히 어창으로 갖다 날랐다.

머리 토막만 남은 상어는 아직 숨을 놓지 못하고 파득거렸다. 장 씨는 그런 상어 토막을 바라보며 주머니의 담배 꺼내 피가 잔뜩 묻은 손으로 성냥불을 그었다. 그러나 바람은 성냥불이 일기도 전에 꺼져버렸다. 장 씨의 손은 성냥불을 컬 때마다 가늘게 떨렸다.

술 힘이 아니면 일을 하지 못하는 장 씨이다. 석출은 장씨를 지켜보면서 생각했다. 장씨에게는 동료 진씨의 죽음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모두들 동료의 죽음에 너무 태연하다. 어부의 주검은 바다에서 일상이나 마찬가지다. 그저 물고기 한마리 바다에 넣어 준 것처럼 말이다. 먼 수평선 어선들이 부지런히 그물을 끌고 있는게 보였다. 삼삼오오 물새들이 하늘을 가로 지르고 있었다. 석출의 입에서 처량한 유행가 한 조각이 흘러나왔다.
-계속

당신과 나사이에 저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것을
해저문 부두에서 떠나가는 연락선을
가슴아프게 가슴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갈매기도 내마음같이 목메어 운다
<가슴아프게>-남진 노래          



태그:#바다, #해양, #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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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곧 인간이다고 한다. 지식은 곧 마음이라고 한다. 인간의 모두는 이러한 마음에 따라 그 지성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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