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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 보통 우리는 공익이라는 말을 TV에서 자주 듣는다. 어떤 캠페인을 벌일 때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문구 '공익광고위원회'. 그리고 또 하나 있다. 바로 참 공익근무요원.

 

그러나 공익광고가 추구하는 공익을 촘스키가 이야기하는 공익에 비교해본다면 우리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공익이라는 단어가 매우 한정되고 좁은 영역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금세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 사회의 건전함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벌이는 공익광고. 모든 한국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작아보이게 만드는 촘스키의 공익이 대체 무엇이기에 한정되고 좁은 영역이라고 하느냐고?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전 세계인들의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스케일부터가 국내에서 국외로 커져버리는데 어찌 촘스키의 공익이 더 위대해 보이지 않을 수 있을까?

 

이렇게 촘스키가 내세우는 공익의 근원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론'에 입각한 원칙이 존재하고 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를 공익과 같은 크기를 가진, 즉 '='을 만족하는 것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완전한 참여민주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물론 여성과 노예를 배제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목표는 공익이어야 합니다. 이런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상대적인 평등, 적절하면서도 '충분한 재산', 그리고 구성원 모두의 '지속적인 성장'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19쪽)

 

국내의 공익. 그리고 전 세계의 공익

 

그런데 이 공익이라는 것을 우리나라 하나만 대입해놓고 볼 때와 전 세계인들을 대입해놓고 볼 때 엄청난 차이가 있는데 혹시 짐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나라의 공익이라는 것은 보통 우리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 모든 행위들이 정당성을 가지게 된다.

 

그 말은 반대로 우리만 잘 살게 되면 그만이지 다른 나라의 상황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로도 해석이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다른 나라의 자원과 노동력을 착취해도 우리의 수익에만 도움이 된다면야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것이 바로 좁은 영역의 공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촘스키가 주장하는 세계의 공익에서는 우리만 살자고 다른 이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행위를 불허한다. 즉, 미국은 자신이 1900년대 초반에 보호무역으로 힘을 길러놓고서는 이제 와서 제3세계의 국가들에게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라며 자유무역을 강요하는 것은 어폐에 맞지 않다는 이야기다. 

 

"신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제국주의 정책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즉 타인에게는 자유 시장을 강요하고 나는 철저히 보호받겠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부자들은 온갖 혜택을 누리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자유 시장 논리를 강요하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입니다." (130쪽)

 

촘스키는 우리가 그렇게 긍정적으로 부르짖는 신자유주의를 이렇게 해석한다. 리카도의 절대우위, 비교우위의 이론에 따라서 모든 국가가 자유무역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해석은 힘 있고 돈있는자들의 더 많이 얻으려는 탐욕에 의해서 무참히 깨져버리고 만다. 그렇지 않다고? 리카도의 비교우위가 타당하고? 한번 생각해보시라.

 

우리는 우리의 뱃속 채우기에 급급하지 타국의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하게 될지 신경이나 쓰는가? 고양이 앞에 생선이 놓여있는데, 그것을 반만 먹고 다른 고양이가 먹도록 남겨두는 고양이가 어디 있는가? 같은 논리다. 강자가 약자의 문을 열고 자유무역을 강요할 때는 그렇게 되는 자체가 이미 강자에게 모든 자원을 침탈당한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강자와 약자의 힘 차이가 더욱 커지면 커질수록 그러한 비극은 극적으로 커져버린다.

 

거대한 공룡, 미국

 

한번 쯤은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난하는 수 많은 책들에게서 미국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무슨 짓을 저질러왔는지 본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책들에서 수도 없이 인용되는 촘스키의 이야기를 이 책을 통해서 촘스키의 직접적인 대화체로 접할 수 있었다. 촘스키는 미국에 의해서 국부에 커다란 손실을 입은 많은 국가들의 참혹한 현장을 우리에게 낱낱히 조명해주고 있었다.

 

책 전체가 질문자의 질문에 대한 촘스키의 답을 실은 '인터뷰'를 책으로 구성했기 때문에 어떤 사건과 인물에 대한 기본적인 언급은 생략되는 부분이 많았지만 그런 사건들을 인터넷을 통해 찾아보고 먼저 인지하면서 읽는다면 이 책을 훨씬 이해하기 쉬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단기 투기자금이 쏟아져 들어갔습니다. 투기거품이 그저 거품이었을 뿐입니다. 경제가 눈에 띄게 나빠졌습니다. 모두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국제금융기관의 경제학자들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멕시코의 경제 붕괴를 촉발한 원인 제공자로 낙인찍히고 싶지 않아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121쪽)

 

"쿠바는 미국 경제에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경쟁자들이 전통적으로 미국시장이었던 쿠바에 진입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데이비드 록펠러와 그의 친구에게는 달갑게 여겨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 (123쪽)

 

"베트남이 미국의 힘에 철저히 순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미국 기업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그럴듯하게 베트남을 고립시켰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에 들면서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미국의 경제봉쇄를 무시하면서 베트남의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123쪽)

 

이외에도 석유이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중동지역의 분쟁. 석유뿐인가? 전 세계의 이권이 걸린 곳에는 미국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이와 같이 미국이 휩쓸고 간 비극적인 현재가 자리하고 있었다. 

 

글로벌 기업의 합세 그리고 언론

 

지난번 <운동화 전쟁>이라는 책을 통해서 나는 어떻게 나이키가 아디다스를 물리치고 세계 점유율 1위를 달성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상세히 알 수 있었는데, 핵심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나이키는 아디다스가 가지고 있는 높은 인건비라는 약점을 파고들었다. 나이키는 미국이 구축해놓은 저개발국가로 진입하여 매우 낮은 인건비로 대량 생산을 했으며, 그렇게 벌어들인 이익을 광고라는 미디어산업에 쏟아 부어 자신들의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했다.

 

이렇게 국민의 세금으로 떠받혀진 기업들의 자본(산업화 초기의 정부지원이 있었고, 또한 경기침체기에 도산을 막기 위해서 쏟아 붓는 공적자금은 모두 우리의 세금으로 이루어진다.)이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서 전 세계로 흘러들어가며 낮은 인건비가 가능한 제3국의 시장에 그들이 겨우 먹고 살 정도의 자본만을 투입하면서 노동력을 갈취하고, 대부분의 이익금을 투기, 광고, 스폰서 유치에 할애한다.

 

그렇게 글로벌 기업들은 부를 집어 삼키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지 골몰하지, 촘스키가 이야기하는 공익의 개념과는 전혀 상반된 길을 걸어가는 중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을 위협할 만한 다른 거대 기업과의 전쟁에 대비해서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고 있고, 그러한 상황의 가장 큰 피해자는 노동자 계급이었다.  즉, 기업들의 움직임이란 공익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익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거대 공룡에 맞서 우리 개개인이 무엇이 할 수 있을지 촘스키는 같이 생각해보자고 한다. 그리고 한 가지 처방전을 우리에게 내려준다. 그것은 바로 '행동'이었다. 그리고 '투쟁'이었다. 그리고 이미 우리들은 '투쟁'으로 이뤄낸 값진 성과가 있다.

 

그것은 바로 '민주화 운동'이었고, 최근에 들어와서는 '촛불시위'였다.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세대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한 결과 지금의 평화를 만끽하고 있으며, 촛불을 들고 비폭력으로 투쟁한 결과 우리의 건강권을 잠재적으로 위협하고 있었던 '미국산 소고기'의 수입조건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회의 약자를 위해서 존재해야할 의무를 가진 시민단체의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몇 차례 신문기사화 되었고, 그들의 도덕성과 투명성에 대하여 의문이 드는 것은 상당히 우려되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조직 내에서 약간의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그것을 좋지 않은 방향으로 사용하려드는 행위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 부족한 것이 많다. 궁금한 것이 많고 공부해야 할 것이 많다. 그러나 나는 촘스키를 통해서 조금 더 넓은 의미의 공익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리고 이 세계를 이끌어가는 이들이 '넓은 공익'을 지키고 있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가 귀담아 들을만한 이야기를 촘스키는 제공하고 있다. 그는 우리들에게 투쟁이 앞으로 나아가야할 목표의 방향을 다음과 같이 일러준다. 그의 이야기를 반드시 명심하고 있을 것이다.

 

"꾸준한 투쟁, 때로는 암울하게 보였던 좌절을 딛고 힘겹게 투쟁한 덕분에 이런 모든 변화가 가능했습니다. 물론 이런 새로운 변화가 때로는 왜곡되고, 때로는 억압 수단으로 돌변하기도 합니다. 또한 출세지향주의와 자기 권력의 확대를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전반적 변화는 원대한 인류애를 목표에 둔 것입니다.

 

불행히도, 이런 변화의 물결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핵심부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주된 기관들이 이런 변화를 인정하고 지원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권력과 사회에 대한 지배력까지는 건드리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의 사회 지배력은 오히려 증대되었습니다. 결국 새로운 세계관으로 권력의 실질적인 분산까지 이루어내려면 더 큰 투쟁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 (207쪽)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네이버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촘스키 세상의 권력을 말하다 1

노암 촘스키 지음, 강주헌 옮김, 시대의창(2004)


태그:#촘스키, 세상의 권력을 말하다1, #노암 촘스키, #시대의창, #단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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