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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이라고 하면, 고작 <움직이는 하울의 성> <벼랑 위의 포뇨> 등을 제작한 미야자키 하야오 정도를 떠올리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애니메이션작가라는 말을 듣고 찾아가는 동안에도 사실 걱정이 앞섰던 게 사실이었다.

 

'애니메이션에 대한 내 무지가 탄로 나면 어떡하지?'

 

그래도 궁금한 것은 많았기에, '이해를 못하면 다시 묻고 또 물으면 되겠지…'하는 투철한(?) 기자정신으로 무장한 채 그를 만나러 갔다. 바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마련한 미디어아트전 <꿈꾸는 정원>에 초청된 지역 작가 탁영환(41) 씨였다.

 

"수묵 애니메이션이라고 아시나요?"

 

'미야자키 하야오, 미야자키 하야오, 미야자키…' 만을 되뇌던 내게 그의 첫말은 청천벽력({靑天霹靂)과도 같았다.

 

"음…. 그건 먹으로 그리는 애니메이션인가요?"

"네. 맞아요."

 

(휴우~) 다행히(?) 이야기는 순조롭게 시작됐다.

 

영문학과 학생, 일본에서 애니메이션을 배우다

 

우선 탁영환 작가는 어째서 자신이 애니메이션을 배우게 됐는지부터 설명했다.

 

"대학에서는 영문학을 전공했어요. 조금 뜬금없죠? 하하. 원래 중학교 때까지 그림을 그렸었는데, 집에서 그림은 배고픈 직업이라며 공부 쪽으로 선회를 요구했어요. 그래서 글을 쓰고 싶은 마음에 영문학을 전공했는데, 우연찮게 광고 제작 일을 하게 됐습니다."

 

대학시절, 광고공모전에 입상한 탁영환 씨는 그걸 계기로 영상광고 제작 분야 쪽에서 일을 하게 됐다. 졸업 후, 서울에서 영상광고를 제작하는 감독으로 데뷔를 한 것이다. 이후, 1997년에 전주에서 지인들과 함께 광고제작 회사를 창업한 그는 약 4년간 더 관공서와 향토기업의 홍보영상 제작, CF제작 등의 일을 하며 현장 경험을 쌓았다.

 

"그러던 어느 날 뭔가 더 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원래 영상이나 광고 쪽을 체계적으로 배운 게 아니어서 그런지 일을 하면 할수록 느껴지는 그런 게 있더라고요. 그래서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에 일본 유학길에 올랐죠."

 

일본 유학을 결심한 탁영환 씨는 자신이 해오던 광고 분야가 아닌 영화와 애니메이션과 관련된 영상 분야를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이유는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 였다.

 

"아, 미야자키 하야오요?" (짐짓 아는 척)

 

"네. 사실 서울에서 일할 때 활동했던 동호회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을 많이 보여줬어요, 그때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정식으로 수입되지 않을 때였는데, 미야자키 하야오 등의 작품을 보면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보고 싶은 막연한 꿈이 생겼던 거죠."

 

귀국 후 지역작가로 남다

 

2000년 공부를 위해 바다를 건넜던 그는 5년 후, 다시 고향 땅을 밟았다. 그는 당시 일본에 남아 취업을 하게 될 수도 있었지만, 일종의 '문화충격'에서 비롯된 자신의 '꿈'을 가지고 귀국을 선택했다.

 

"처음에 저는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 애니메이션을 보고 그런 걸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일본에서 공부를 하면서 실험적인 영상과 작가주의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문화충격을 받았어요. '아, 이런 세계도 있구나. 영상으로 이런 창의적인 작품을 만들 수도 있구나.' 제가 배운 것을 한국 학생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 귀국을 선택하게 됐습니다."

 

탁영환 작가 역시 귀국 후, 서울로 올라가야 할지 아니면 고향인 전주에 남아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기회의 폭, 가시적인 홍보 효과, 콘텐츠 접근성, 각종 사업 연계성 등의 이유를 들어 주위에서는 서울로 올라오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탁영환 작가는 전주를 선택했다. 서울에는 자신이 올라가지 않더라도 많은 분들이 학생들에게 가르침을 주겠지만, 상대적으로 지역에서는 새로운 장르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희소할테니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결국 소개로 들어오는 강의가 대부분 전라북도권 위쪽에 위치한 대학들이더라고요. 지역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쳐보고 싶었는데, 뜻대로 안된 경우랄까요? 하하."

 

이어 그는 "사실, 몇 년 간 외국에서 살다보니 그냥 마음 편히 고향에서 살고 싶었다"는 마을 덧붙이기도 했다.

 

"애니메이션 + 전주 = '수묵 애니메이션'"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그가 전주를 선택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 되었다. 왜냐면 그 스스로도 이야기 하듯, 지금 그가 도전하는 수묵애니메이션은 바로 전주라는 고향을 작품에 접목시키기 위해 고민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장르이기 때문이다.

 

"전주는 유서 깊은 전통도시잖아요. 또 한지로 유명하고요. 여기에 살다보니 그런 전통과 한지 등의 소스를 어떻게 작품에 넣을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뭐 꼭 '전통을 애니메이션과 접목시켜야겠다'라고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런 자연스러운 고민 속에서 수묵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를 발견하게 된 것 같아요."

 

전북지역에서는 유일하게 수묵 애니메이션을 선보이고 있는 탁영환 작가는 수묵의 장점으로 '자유스러움'을 꼽았다.

 

"종이에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색을 칠하는 기존 방식이나 디지털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붓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면 붓 터치 하나로 선과 면, 공간이 만들어 지잖아요. 수묵이란 거는 면과 선의 구분이 없죠. 그런 자유스러움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어려움과 까다로움도 많았다. 지우개로 지울 수 없는 한계가 있었고, 계산이 조금만 벗어나도 다시 그려야 했다. 게다가 전문적으로 그림을 배우지 않았던 탓에 오로지 자신의 필력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화, 수묵화 그리시는 분들이 보면 '그림 참 그렇다'고 얘기하실지 모르겠어요. 하하. 그나마 움직이는 애니메이션이다 보니 표가 덜 나는 거예요."

 

그는 현재 각각 7분, 5분 내외의 <질주>와 <주유>라는 작품을 수묵애니메이션으로 제작, 지난 12일부터 전주영화제작소 1층 기획전시실에서 진행되고 있는 미디어아트전 <꿈꾸는 정원>을 통해 선보이고 있다.

 

"전주에서 태어나 전주에서 살고 있는 작가만이 담아낼 수 있는 그런 작품을 구상했다"는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처음에는 낯설었던 수묵 애니메이션이 어느새 친근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전주를 배경으로 한 애니메이션 만들고 싶다"

 

앞으로 그에게는 크게 두 가지의 꿈이 있다. 우선 하나는 지금 만들고 있는 실험적인 영상과 애니메이션처럼 작가주의적 작품관을 가지고 창의적인 작품을 계속 만들어 가는 것이다. 사람 만나고 사람과 이야기하길 좋아한다는 탁영환 작가는 "실험적인 애니메이션을 만들더라도 꼭 사람이야기를 하고 되더라"며 어떤 작품을 만들더라도 자신의 정체성이 보여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한편, 그의 또 다른 꿈은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상업적인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다만, 상업적 애니메이션을 만들게 됐을 경우에는 꼭 배경을 전주로 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일본에서 만들어지는 현대물의 경우 <시간을 달리는 소녀>처럼 최근에는 흔히 볼 수 있는 건물과 풍경 등을 아주 리얼한 배경으로 삼는 게 흐름이에요. 저 역시 제가 자라며 보아온 전주를 배경으로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물론 너무 가볍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으면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이야기로요."

 

연륜이 쌓여가면서 보여 지는 전주의 숨겨진 아름다움과 전통성이 작품 하는데 에너지를 준다는 그. 앞으로 애니메이션 하면 미야자키 하야오 보다 탁영환이라는 이름과 수묵 애니메이션이 먼저 떠오를 것만 같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선샤인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수묵 애니메이션, #전주, #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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