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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8일(화) 서울을 갔습니다. 대학교 1학년생인 아들 녀석을 데리고 오후에 대림동 강남성심병원에 가서 '병사용 진단서' 떼는 일을 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님의 서거 소식을 병원에서 들었습니다. 저녁에는 딸아이와 아들 녀석을 데리고 다시 '용산미사'에 참례했습니다.

 

 여섯 분의 사제께서 미사를 공동 집전하시는 가운데 주례를 하시는 청주교구의 김남오 신부님은 "다섯 분의 용산참사 희생자들과 함께 오늘 선종하신 김대중 토마스 모어 전 대통령님을 이 미사 중에 기억하겠습니다"라는 말로 분명하게 미사 지향을 알리시더군요. 그리고 미사 중 '축성례' 이후의 '전구' 부분에서 "오늘 주님께서 불러 가신 김대중 토머스 모어의 영혼도 기억하소서"라고 기도했지요.

 

 그러니까 나는 김대중 전 대통령님이 선종하신 날 저녁 '용산참사' 현장에서 처음 김대중 토마스 모어 형제님을 위한 미사를 지낸 셈입니다. 그것도 특별하다면 특별한 일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다음날(19일) 낮에 집에 내려왔습니다. 그새 밀린 일들이 있어서 바삐 처리를 하고 나니 너무 피곤하여 우리 성당의 저녁미사에는 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인 어제(20일) 아침미사에 참례하였습니다. 주임 신부님이 휴가 중이시라 보좌 신부님이 미사를 지내시는데 "김대중 토마스 모아 전 대통령님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미사 중에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어느 신자가 김대중 토마스 모어 전 대퉁령님의 영혼을 위해 미사를 봉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례 사제께서 스스로 위령미사를 봉헌한 것이었습니다. 젊은 보좌 신부님이 참으로 고맙게 느껴지더군요.        

 

 나는 어제 집에다 늘 준비해놓고 있는 미사예물봉투를 하나 꺼내어 약소하지만 3만원을 넣었습니다. 3만원은 현재의 내 미사예물 기준입니다. 아내로 하여금 예쁜 글씨로 '김대중'이라는 이름과 '토마스 모어'라는 세례명을 적게 하고, '연미사'임을 표시하게 하고, 날짜와 시간을 적게 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지난번 노무현 유스토님 위령미사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예물봉투에 내 선친의 함자도 함께 적었습니다. 봉투에 김대중 토마스 모어, 지동환 안셀모, 두 분의 이름이 나란히 적히고, 또 사제의 입에서 두 분의 이름이 나란히 불리어지는 것에 각별한 느낌이 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오후에 아내와 함께 태안문예회관 소공연장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아 조문을 한 다음 태안성당 사무실에 들러 미사예물봉투를 맡겼습니다.

 

 나는 18일 오후 김대중 전 대통령님의 서거 소식을 들은 순간 장례 기간 안에 김대중 토마스 모어 형제님을 위한 '미사 봉헌'을 생각했습니다. 미사 봉헌을 하기 전에는 그를 회고하는 글을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미사 봉헌부터 하고 난 다음에 그에 관한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거지요.

 

 오늘 오전 10시 30분 미사에 아내와 함께 참례했습니다. 병환 중이신 노친을 모시고 가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우리 태안성당의 매주 금요일 오전 10시 30분 미사는 레지오 단원들을 위한 미사이고, 미사 후에 각 쁘레시디움 주회가 있어서 신자들이 많이 오시지요. 많은 신자들이 참례한 가운데 김대중 토마스 모어 형제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니 더욱 기쁜 마음이었습니다. 또 미사 끝 무렵에 신부님이 "태안문예 소강당에 분향소가 마련되어 있으니 많이들 가셔서 조문을 하세요"라고 말해서 여간 고맙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나는 오늘까지 세 번 김대중 전 대통령님을 위한 미사에 참례한 셈입니다. 용산 '남일당 성당' 미사, 우리 태안성당에서 주례 사제 스스로 봉헌하신 미사, 그리고 내가 미사예물을 드리고 청원한 미사에 참례했으니, 내 나름으로는 서거하신 김대중 전 대통령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셈일 것 같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많이 기도하고, 적당한 날에는 미사도 봉헌하겠지만….

 

 오늘 내가 청원하여 봉헌한 김대중 전 대통령님을 위한 미사에 참례하고 와서 비로소 그 분에 관한 글을 씁니다. 이렇게 그분의 영혼과 관련하는 말을 몇 마디 적으면서, 11년 전인 1998년 충남의 여러 지역신문들에 썼던 야인 시절의 김대중님에 관한 글 하나를 소개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야인 시절 모습에 대한 기억

 

 

 벌써 13년 전인 1985년 10월 어느 날 동교동을 방문하여 김대중 선생을 직접 뵌 적이 한 번 있다. 85년이라면 무시무시한 5공 정권의 전성기로서 많은 국민이 한숨을 쉬며 살던 때였고, 그해 가을은 김대중 선생이 또 한 차례 '연금 생활'을 하던 시기였다. 그때 내가 서울에 간 것은 고장의 <흙빛문학> 3집을 만드는 일 때문이었다. 서울에서 여러 날 묵으며 책 만드는 일과 돈 만드는 일을 싸잡아 하던 나는 당시 흙빛문학회원이었던 태안 원북면 출신 이윤달씨와 만나 함께 동교동을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동교동 자택에서 맨 먼저 만난 이는 지금은 국회의원인 김옥두 비서였다. 나는 82년도 동아일보 신춘문예 출신 작가라고 내 신분을 밝히고 정중히 면담을 요청했다. 김 비서는 지금 선생님께서 지하 서재에서 집필 중이시라며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지하로 내려갔다. 나는 그때 그 '집필 중'이라는 말에서 신선하고도 정다운 감흥을 맛보았다. 잠시 후 뜰로 올라온 김 비서와 10분 정도 대화를 나누며 기다렸는데, 김 비서는 정원의 나무 하나 하나에는 예춘호 선생의 정성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지하 서재에서 나와 계단을 오르는 김대중 선생은 한 손에 지팡이를 쥐고 있었고 불편해 보이는 걸음걸이였다. 그가 현관에서 거실로 오를 때는 김 비서가 구두 뒤축을 잡아주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아릿한 아픔을 느꼈다. 그가 지난 세월 온몸으로 겪었던 참혹한 고통의 실상이 고스란히 투영되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소파에 앉은 선생은 내 한자 이름자를 물었다. 그리고 '빛날 요'자가 '빛광 변'인가 '날일 변'인가 물었다. 그러더니 좋은 느낌을 주는 이름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윤달씨는 줄곧 뜰에서 김옥두씨와 함께 있었고, 나 혼자 김대중 선생과 한 시간 정도 대화를 나누었다.

 

 선생은 내가 작가라는 사실을 감안해서인지 주로 문학 방면으로 화제를 이끌어갔다. 나는 그런 그에게서 배려의 자세를 확연히 느낄 수 있었고, 그가 지닌 문학적 식견에 크게 감탄했다. 그가 무척이나 책을 많이 읽었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문학 작품도 그렇게 많이 읽었으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하였다. 그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빅톨 유고와 에밀 졸라를 얘기했고, 박경리의 <토지>와 황석영의 <장길산>을 얘기했다. 그리고 내 등단 작품인 중편소설 <추상의 늪> 내용에 관심을 표하며 꼭 한번 읽어보겠노라고 했다.

 

 나는 그가 문학 작품들을 많이 읽은 사실에 큰 고마움과 다행스러움을 느꼈다. 문학 작품을 많이 읽었다는 것은 감동할 줄 아는 가슴을 지녔다는 것과 감동 경험을 많이 쌓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그가 타인에 대한 깊은 동정심과 슬픔을 지니고 눈물의 의미를 아는 사람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대화 중에 지금은 국회의원인 한영애씨가 잠시 다녀갔고, 나중에 변절자가 되어버린 송천영 의원이 와서 잠시 내 옆에 앉았다가 갔다.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나서 송구한 마음을 안고 일어서려고 하니 선생이 물었다.

 

"혹시 <옥중서신>이라는 내 책을 읽었습니까?"

"미처 못 읽었습니다. 죄송스럽습니다. 나가는 즉시 사서 읽겠습니다."

"내게 책이 있으니 한 권 선물하지요."

 

 그리고 선생님은 다른 방으로 가서 붓으로 벼루의 먹물을 찍어 책에 사인을 했다. 한 시간 전에 들었던 내 이름자를 다시 확인하지도 않았다. 책을 받아드는 순간 나는 그의 글씨가 참으로 보기 좋은 명필임을 한눈에 느꼈다. 앞표지 다음의 책장에 다음과 같은 글자들이 쓰여져 있었다.

 

 事人如天 池耀夏同志淸覽 一九八五年 十月 金大中

 (사인여천 지요하동지청람 1985년 10월 김대중)

 

 

 그런데 먹물이 이내 마르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앉아 10분 정도를 더 얘기를 나누었는데, 나 혼자만 그런 귀한 선물을 받아서 이윤달씨에게 적이 미안한 마음이었다.

 

 다음날 버스를 타고 내려오면서부터 나는 <김대중옥중서신>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그가 교도소 안에서 쓴 '옥중단시'들이며, 부인과 아들들에게 보낸 수많은 편지들은 하나같이 심금을 울리는 내용이어서 수없이 감탄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10여 년 동안 고이 간직하고 있던 그 책을 나는 지난해 12월 19일 아침, 그의 대통령 당선이 확정되었을 때 책장 안에서 꺼내어 내 자식들에게 보여 주었다. 초등학교 1학년 아들녀석은 별다른 기색이 없었지만 4학년 딸아이는 뭔가를 느끼는 눈치였다. 김대중 당선자가 역사에 길이 빛날 훌륭한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어린 딸애의 눈에도 가득 어려 있었다.

 

 (1998년 <서령신문> 2월 19일. <홍성신문> 2월 26일. <태안신문> 2월 27일)


태그:#김대중, #동교동, #옥중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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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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