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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낳은 산모의 85%는 어떤 형태로든 우울증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감정의 변화도 심하고 이유 없이 눈물이 나기도 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합니다. 산후우울증은 출산여성 보통 10명 중 4명 꼴로 발병하고, 드물지만 자살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산모, 그리고 남편, 산후도우미의 이야기를 통해 산후우울증을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보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둘째 아이를 낳았을 때 산후우울증이 더 심하게 왔다(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 없습니다).
 둘째 아이를 낳았을 때 산후우울증이 더 심하게 왔다(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 없습니다).
ⓒ 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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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이 밭에서 일하다 무더위 때문에 쓰러져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던 지난해 7월. 내가 폭염에 의한 사망 관련 뉴스를 봤던 곳은 산후조리원 휴게실이었다. 사람이 죽을 정도로 더울 때 나는 아이를 낳았다.

옷을 갈아입어도 두 시간만 지나면 다시 땀으로 축축해질 정도로 덥고 습한 날씨였지만, 산후조리원에서는 긴 팔 원피스 잠옷 안에 얇은 내의를 입고, 운동선수용 손목보호대를 끼고, 발목을 덮는 양말을 신고 있어야 했다.

겉보기에는 합격점을 줄 수 있는 산모 차림이었지만 정작 조리원에서조차 산후조리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다. 첫 아이 때는 갓난아기 수유와 산모 몸조리만 하면 됐었다. 그러나 둘째아이 때는 수유와 몸조리는 물론 첫아이의 정서도 살펴야 했다.

첫 아이가 동생이 태어난 뒤로 이불 위에 서서 오줌을 싸는 등 퇴행현상을 보였기 때문인데, 산후조리원 규정상 아이를 데리고 올 수 없었다. 결국 담당 간호사에게 통사정을 했고 다른 산모들이 꺼리는 방을 썼다. 도로에서 제일 가까워서 시끄럽고, 좁은, 맨 구석방에서 보름 내내 쿠하(큰아이)와 함께 지냈다.

둘째 아이 낳고 성큼 찾아온 산후우울증

산후조리원에서 더위보다 견디기 힘든 건 창밖의 풍경이었다. 내가 머물던 곳 건너편에는 세무서와 크고 작은 빌딩들이 있었다. 오전 9시와 오후 6시 전후로 사무실에 들락날락 하는 여직원들이 보였다. 부러웠다.

검정색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브랜드 로고가 어지럽게 프린트된 노트북 가방을 매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모습을 본 아침. 세상에 나온 지 겨우 열흘 된 아이의 젖을 떼고, 나도 세상으로 나가 다시 일하고 싶어졌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갓난아기를 안고 젖을 먹이는 순간은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은 기쁜 시간인데도 그런 충동이 들었다.

조리원에 있는 동안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 자주 들었다. 아기를 만나러 수유실에 갈 때는 꼭대기에 올랐다가, 좁은 방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수유를 마치고 신생아실에 아기를 맡기고 돌아올 때마다 나는 불안했다. 첫 아이 때도 비슷한 베이비 블루스(산후 우울증 중에 가장 약한 단계)를 겪었지만, 둘째 때는 그 강도가 심해지고 기간이 길어졌다. 예쁜 아이를 둘이나 두고 하는 고민은 누구에게 말하기조차 부끄러웠다. 유치한 불안은 종종 눈물이 되었다.

'두 아이 양육에 치여 앞으로 족히 20년은 내 인생이랄 것 없이, 꼼짝없이 엄마 역할에 집중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에 괴로웠다. 아기를 키우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지금 돌이켜보면 헛웃음만 나오는 생각이지만, 그 때는 그런 불안감이 머릿속에 꽉 차 있었다.

그런 생각을 멈추기 위해 아무 책이나 들고 읽었다. 낮에는 쿠하와 그림책을 읽다가, 가족들이 찾아와 쿠하를 데리고 외출하면 또 다른 책을 읽었다. 그리고 밤에는 기사를 썼다. 출산 직후에 자판을 치거나 책을 읽는 게 좋을 리 없지만, 종일 누워 있으면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반면 기사를 송고하면 기분이 좋아졌다. 적어도 글을 쓰는 동안에는 우울한 기분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고, 뭔가 일을 한 것 같아서 꿀잠을 잘 수 있었다. 

<오마이뉴스> 책동네에 기사가 채택된 다음날에는 바로바로 원고료를 확인했다. 전에는 1년에 두어 번 원고료를 찾았다. 그 모습을 남편이 봤다면, 당장 기자회원 아이디를 삭제하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편히 쉬려고 하루에 10만원씩 낸 휴식처에서 산후조리는커녕 쿠하가 잠들면 몰래 방에서 빠져나와 휴게실에 있는 컴퓨터로 새벽까지 기사를 썼으니 말이다.

자신 위해 사는 이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한여름에 하루 세끼 밥상을 매번 다른 반찬으로 받아먹는 호사를 누리면서, 무더위에 일하느라 고생하는 남편에게 우울하다는 내색을 하기 미안했다. 오전 7시에 남편이 출근하면 30분 정도 베란다 난간에 기대어 선 채 출근하는 이웃들을 내려다보곤 했다. 교복을 입고 버스정류장으로 뛰어가는 아이, 블라우스 단추를 채우며 서둘러 시동을 거는 여자, 남편을 출근시켜주느라 자다 말고 운전대를 잡은 아줌마 등 사람들의 평범한 아침 시간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서울대공원에서 보리를 직접 만져보고 있는 아이.
 서울대공원에서 보리를 직접 만져보고 있는 아이.
ⓒ 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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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후조리원에서 나와서  한 달 동안 여동생이 집안일을 대신했다. 아기 목욕부터 식사준비와 빨래, 청소, 첫아이 돌보기까지 모두 해줬다. 심지어 복부 마사지도 해주고, 산욕기 체조도 시켜주고 말벗도 되어주었다. 고마웠다. 동생이 아니었다면 몸도, 마음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내 손발이 되어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침마다 드는 불안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근거 없는 불안은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방해했다. 유학 간 친구들이 국제전화로 축하인사를 건넸는데, 그녀들의 생활이 부러운 나머지 20분 넘게 통화를 하고도 전화를 끊고 나서는 무슨 말이 오갔는지 도통 기억하지 못한 적도 있다.

출산 후에 우울증을 겪으면서 가장 피해를 본 사람은 남편과 쿠하였다. 밤새 보채는 아이와 씨름하다가 뜬 눈으로 맞이했던 아침, 밤새 잘 자다가 애들이 보채는 소리에 선잠이 깬 남편이 짜증스런 목소리로 "차라리 회사 숙소로 가는 게 낫겠다"고 말했다. 아픈 아이를 안고 쩔쩔매며 한숨도 못잔 나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잠투정이나 하다니.

잠결에 튀어나온 말이지만 화가 났다. 말수가 적은 남편에게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무조건 이혼하자고 들볶았다. 또 어떤 날은 둘째 아이가 돌이 지나고 젖을 떼면 나 혼자 외국여행을 떠날 수 있게 해 달라고 다짜고짜 요구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적절한 위로와 대안 제시로 우리 사이를 지켰다.

우울증으로 고생한다면, 주변에 도움 청하라

백일이 지나 바깥출입이 잦아지면서 한결 나아졌다. 아이들에게 보여준다는 핑계로 미술관이나 도서관 나들이를 하면서 바깥바람을 쐬거나, 동생들에게 쿠하와 함께 외출해 달라고 부탁하고 둘째아이에게 전념하는 기회를 자주 가졌다. 팔다리가 퉁퉁 부어서 양파 한 개 까는 것도 귀찮은 날이면 반찬이 잘 나오는 동네 식당에서 백반으로 대신한 게 도움이 됐다.

아이 첫돌이 얼마 전에 지났다. 1년이 지나고 돌이켜보니, 출산 후 석 달 동안 가까운 사람들에게 참 못되게 굴었다. 일부러 작정하고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둘째 아이를 낳고 몸 추스르고 마음 다잡는 게 쉽지 않았다. 몸도 힘들었지만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서 고달팠다.

요즘 인터넷에 임신, 출산 후에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올린 글을 보면 남의 일 같지 않다. 옆에 있다면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려 주고 싶다. 더불어 산후우울증을 앓고 있는 이들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하고 싶다. 사소한 투정처럼 여겨져 민망해도 혼자 앓지 말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적극적으로 도움을 청하라고.


태그:#산후 우울증 , #출산 , #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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