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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지박 회원들과 함께 선생님 사인을 받는 중이다. 맑은돌이라는 별명과 함께 특유의 글씨체로 예쁘게 써 주셨다.
▲ 지금은 사인중! 함지박 회원들과 함께 선생님 사인을 받는 중이다. 맑은돌이라는 별명과 함께 특유의 글씨체로 예쁘게 써 주셨다.
ⓒ 정민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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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창문 쪽으로 흔들의자를 옮겼다. 창을 등지고 앉으니 햇살이 등 뒤에서 읽고 있는 책 위로 쏟아졌다. <고산자>를 읽고 있었는데, 어느 한 순간 눈물이 나더니 투두둑 떨어졌다. 아이들은 엄마의 그런 책읽기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평소라면 쉴 새 없이 쏟아졌을 질문도 삼가고 각자 앉아서 역시 책을 읽었다.

책은 어느 순간 내게 가장 조용한 시간을 만들어준다. 우리 집 바로 앞(주차하기가 좋아 주로 장사하는 차들이 잘 머문다)에서 들리는 "고장 난 컴퓨터 팔아요"나, "창문에 모기장 쳐요"라는 확성기 소리도 아주 멀리 들을 수 있다. 살아 온 인생 과정 중에서 고민했던 문제들을 책 속에서 발견하고, 그 고민의 해결 방법 또한 책 속에서 알게 되면 그 순간 책은 그야말로 스승님이다. 그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렇게 <고산자>를 행복하게 읽은 다음 아이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역마살이라는 말이 싫어서 은연중 잘 쓰지 않는 말이지만, 여행을 좋아하고, 길에서 길로 다니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보면 나 역시 길에서 에너지를 얻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집에서 나오면서부터 머릿속에 지도를 그린다. 어떤 길로 가야 보다 빠르고 편하게 갈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함이다. 집을 나서기 전 언제나 지도를 먼저 보고 길을 검색한 후 어떻게 갈 것인지를 결정하며 가는 것은 자가용이 없는 우리 집만의 오래 된 습관이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남산 도서관이다. 한국정책방송국에서 방송하는 <북카페>에서 오늘은 소설가 박범신 선생님을 모시고 <고산자>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오후 6시부터 남산 도서관 독서모임 <함지박> 회원들과 함께 한다고 해서 아예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요즘 저녁시간에 계속 아이들만 남겨두는 일이 생겨서 미안하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박범신 선생님을 직접 만날 수 있는 자리라서 기회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아이들은 같이 참여 못하고 밖에서 기다리느라 조금은 지루한 시간을 보냈지만, 마지막에 악수하고 아이들에게 환하게 웃어주셔서 흐뭇한 시간이 되었다.

<흰 소가 끄는 수레>부터 사실 선생님 글은 내게 '사랑과 인생'이라는 주제에서 벗어나 '나이를 떠나서 읽을 수 있는 글'로 다가왔다. <고산자>는 우리 집 아이들이 십대후반이면 읽으라고 권할 것이다. 어쩌면 그 이전에 아이들이 먼저 꺼내서 읽을지도 모르겠다.

<고산자>를 읽으면서 행복한 그 순간이 좋았다는 말씀을 드리며, "박범신 선생님은 요즘 어느 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인가요?"라고 질문을 하니 이런 대답을 들려주신다.

절필을 한 후 히말라야를 열 번도 넘게 갔는데 주로 걷는 일이었다고 한다. 한 달쯤 걸으면 약 10킬로그램 정도가 빠지는데, 몸은 몹시 고되지만 정신은, 머리는 텅 비는 순간이 있다. 바로 그 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마찬가지로 소설을 쓸 때도 그런 순간이 있어 쓰면서 환호성을 지를 때가 있다. 고산자가 혜련 스님을 찾으러 갈 때 길을 찾아다니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그런 장면을 쓰는 순간이 행복한 순간이다.

집에 가는 길. 문이 열리면 나보다 책이 먼저 앞장서 내릴 것이다.
▲ <고산자> 책 표지 집에 가는 길. 문이 열리면 나보다 책이 먼저 앞장서 내릴 것이다.
ⓒ 정민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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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자>는 359쪽의 장대한 내용이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진다. 고산자 김정호의 어린 시절과 아버지, 사랑하는 여인과 딸, 친구들 이야기가 나온다. 내가 눈물을 흘린 것은 고산자의 인생과 사랑하는 여인 혜련 스님의 인생이 너무 가엾고 안타깝고 목이 메도록 슬펐기 때문이다. 궁금한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고산자의 인생부분을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엮은 것인가?

얼마 전 정운현 선생님 블로그 <보림재>에 갔다가 김삿갓에 관련된 글을 읽었는데, 바로 그 부분이 책 187쪽과 188쪽에 나온다. 난고가 취해서 불쑥 던지는 말이 고산자 지도에 대마도가 있느냐? 라는 문제에서 시작해 독도까지 연관된다. 존재하는 섬을 왜 지도에 그려 넣지 않았느냔 질문에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나온다. 오늘날 반크가 독도를 세계에 알리고 잘못된 정보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인터넷의 힘이 크다. 마찬가지로 고산자가 독도를 대동여지도에 그려 넣을 수 없던 이유는 목판본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설 속에서 난고와 고산자의 만남을 그려 넣을 수 있었던 것은 선생님의 상상력이라고 한다. 고산자에 관련된 역사사실이 전혀 없는데, 근거도 없이 상상력만으로 글을 쓸 수는 없었다. 그래서 18C후반 정치, 문화, 사회를 아우르는 책들로 인문학적 공부를 한 후 배경과 환경을 갖추고, 김삿갓과 고산자의 인생을 비교하여 두 사람 인생의 밑바닥에 흐르는 인생에 대한 갈망, 혁신에 대한 갈망으로 상상력을 채워 넣었다고 한다.

159쪽에는 고산자와 혜련 스님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나는 그 부분을 읽으면서 책 밑에 이렇게 적었다. '왜 이 부분이 이렇게 슬플까?'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두 사람의 인연을 비단 짜듯이 그려놓았다. 물은 땅 밑으로도 흐르고, 땅 위로도 흐르지만 종국에는 하나의 물길로 만난다. 길도 마찬가지고, 인연도 마찬가지 아닐까? 피하고 싶어도 눈앞에 나타나고, 만나고 싶어도 발밑에 숨어 알아볼 수도 없다. 이 남녀 사이의 사랑 앞에서 난 왜 외할머니를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선생님은 <고산자>를 젊은이부터 어르신들까지 고른 연령대가 읽어주길 바란다고 한다. 처음에 한자가 나와서 글이 무거울까 걱정해서 한글 문장만 읽어도 뜻을 알 수 있도록 썼단다. 사람은 누구나 깊은 갈망(사전 의미는 '목마른 사람이 물을 바라듯이 간절히 바람'이다)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데 <고산자>를 읽고 스스로 가지고 있는 갈망의 목소리를 들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고산자>를 떠나보낸 요즘은 슬프고, 아름답고, 한 밤에 읽고 싶은 책을 쓰고 싶다고 한다. 이야기의 모델은 없고 상상 속 내용이란다. 선생님은 내가 태어났을 때 대학교를 졸업하셨다. 하지만 흰머리가 이마 앞부분을 살짝 빛내고 있는 선생님 모습은 눈빛이 빛나는 우아한 청년처럼 보였다. 우리 집 두 아이를 환하게 웃어주시며 반겨주실 땐 맘씨 좋은 할아버지였지만 두 아이 모두 할아버지로 느끼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 똘망이는 <고산자>를 잠시 읽어보고, 밤톨이는 지하철노선지도를 보며 왔다.

객관성을 엄격히 유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고산자. 실제생활에서 사용할 지도를 그리고자 했던 고산자. 이모티콘같은 기호를 처음으로 사용할 줄 알았던 창의력. 악연이라도 사람 알아볼 줄 아는 김성일. 사랑하는 모든 것을 떠나보낸 후 진정한 수행자의 길을 가는 혜련 스님. 스님을 어머니로 두었으나, 천주교신자가 되는 순실. 난고, 위당, 혜강, 내용에는 등장하지 않으나 간단한 문장으로 집어넣은 정약용, 이중환, 유재건, 조식, 황진이, 유성룡...

한 편의 드라마를 눈앞에 보는 것처럼 읽으면서도, 많은 이야기들이, 스스로 삶을 돌아보게 만들고, 앞으로의 인생철학을 고민하는데 이정표를 세우게 해 주는 책. <고산자>를 권한다. 인생이라는 길에서 우린 <고산자>와 함께 역사에 버림받지 않고 걸어갈 수 있으리라.

방에서 문을 통하지 않고선 나갈 수 없듯이 사람이란 길을 통하지 않고선 어디든 갈 수 없다. -공자 <논어> - 책 속 338쪽에서

덧붙이는 글 | 8월 12일 케이티브이 오후 5시 북카페에서 방송합니다.
박범신 선생님의 솔직한 여러이야기를 들어보시죠.



고산자 - 2009년 대산문학상 수상작

박범신 지음, 문학동네(2009)


태그:#박범신, #김정호, #고산자,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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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위생사 . 구강건강교육 하는 치과위생사. 이웃들 이야기와 아이들 학교 교육, 책, 영화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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