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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은 동쪽으로 흐른다
 
서울이 고향인 나는 청계천에 대한 아주 희미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데, 생각하면 그 청계천의 아득한 기억이 늘 서울 지역에 대한 그리움의 원천이 되는 것을 깨닫곤 한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이북 사람인데 6. 25 전쟁 이후, 동대문 시장에서 옷 장사를 해서 생활터전을 잡으신 분이다. 나는 외할머니의 등에 업혀 어머니 젖을 얻어 먹으러 종종 개천 다리를 건너 갔는데, 그 어린 눈빛에 비치던 맑고 푸른 천변의 누옥들이 잊혀지지 않았다. 
 
이제는 상전벽해처럼 변해 버린 청계천 상가를 거닐 때면 늘 내가 그때 본 청계천 푸른 물빛과 자취 없는 신당동 산 16번지 적산가옥 한채를 떠올리곤 한다. 청계천은 서울의 핏줄과 같은 공간이다. 청계천이 만약 복원되지 않았다면 지금의 서울은 얼마나 답답할까.   
 
청계천을 잘 다스린 세종 임금
 
옛부터 군왕의 능력은 치수와 관계되고, 치산치수를 잘 다스리는 군왕을 명군이라고 칭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세종 대왕은 청계천에 많은 애정과 관심을 쏟은 분이다. 서울은 물의 도시, 산의 도시다. 서울 청계천은 조선의 수도를 정할 때 풍수학상으로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외수 한강이 동에서 서로 흐르는 것에 대응하여, 도성 한가운데 흐르는 내수 청계천이 한강과 반대로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있다는 점이 상당히 고려되었다고 한다.
 
이제 청계천은 서울 시민들의 놀이 문화의 새로운 공간, 서울 시민들의 정신적 쉼터가 되었다. 과학의 힘을 빌려 깨끗한 청계천속에 갖가지 물고기들이 헤엄치며 노닐고 있다. 그런데 왠지 낭만적인 분위기와 자연친화적인 환경과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풍수학상 내수 청계천이 한강과 반대로 흐르다
 
서울의 청계천 변은 옛날과 현재가 공존하는 전통이 깊은 동네이다. 이 곳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서울의 지리적 특성상 상대적으로 지대가 낮은 도성 한가운데로 물길이 모일 수밖에 없었는데, 조선왕조가 도성 안에 있는 수로를 정비하기 전에 이미 자연스럽게 물길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도성 한가운데 있었고, 오늘날과 같은 하수도 시설이 없었던 당시 청계천에는 온갖 쓰레기와 오물들이 흘러들 수밖에 없었다.
 
두 소년이 고무신을 벗어 들고 시냇물에 발을 담가 고기를 잡습니다. 지상의 원한이 스며 흐르는 정맥_그 불길하고 독한 물에 어떤 어족이 살고 있는지_시내는 대지의 신열을 뚫고 벌판 기울어진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산촌여정>-'이상'
 

서울의 기후는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봄·가을에는 건조하고 여름에는 고온다습한데, 청계천은 봄, 가을에 비가 적어 대부분 건천 (乾川).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철 우기에는 조금만 비가 와도 물이 넘쳐 홍수가 날 정도였다고 한다.
 

세종은 이에 청계천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전한다. 특히 종로 남북 쪽으로 늘어선 시전행랑(市廛行廊) 뒤편에 도랑을 파서 물길을 하천 하류에 바로 연결시켰다. 이것은 지천의 물이 한꺼번에 개천 상류로 몰려들어 넘쳐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도심 홍수를 예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풍수학상 청계천은 늘 깨끗하게 유지해야... 
 
또한 세종은 1441년(세종 23)에는 마전교(馬前橋) 서쪽 수중(水中)에 표석을 세웠다. 이 표석에 척(尺)·촌(寸)·분(分) 등 눈금을 기둥 위에 새겨, 수위를 측정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수표(水標)이다. 이 수표는 개천의 수위를 계수화하여 측정함으로써 사전에 홍수를 예방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당시 청계천의 성격을 두고 풍수학상의 명당수로서 늘 깨끗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명분론적 주장과 도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어 더러운 것이 많이 생기므로 이것을 배출할 하천이 있어야 한다는 현실적 주장이 맞섰다고 한다. 이 논쟁에서 세종이 후자의 주장을 받아들임으로써 청계천은 생활하천으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청계천 다리는 옛부터 사랑의 가교 역할
 
다리(橋)의 어원은 나무였다고 하겠다. 옛날 다리를 만든 재료는 나무, 교(橋)자만 보아도 나무 목(木) 변이다. 다리는 원래 분리된 두 세계를 연결하거나 분리하는 매개물로서 신과 인간의 경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옛날부터 이렇게 청계천은 마땅한 공공장소가 없었던 관례로 사랑하는 연인들의 약속장소이자, 만남의 모임 장소였고, 길 가던 사람들이 쉬어 가는 쉼터이기도 하였다. 다리가 있음으로 인하여 동네 이름이 생겨나기도 하였으며, 반대로 부근 동네 이름을 따서 다리에 붙이기도 하였다.
 
정월 보름날 수표교를 밟아야 다리병이 안난다
 
이 다리에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놀이가 생겨났으며, 웃음과 지혜가 담겨있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우는 아이를 보고 어른들은 청계천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우스개 소리 등 수표교에서 음력 대보름날 다리 밟기를 해야 그해 다리병이 나지 않는다고 믿어왔다고 한다.
 
이 수표교는 화감암으로 된 육각형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수중주석표'라고 한데서 수표교라 명명되었다고 전한다. 수표교는 광통교와 함께 가장 유명한 다리로 1420년(세종2)에 만들어졌다. 당시 이곳에 마전(馬廛)이 있어서 마전교라고 불리웠다. 수표교의 원형은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장충단공원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이외, 하랑교는 '하랑위'의 집이 있었기 때문에 하랑교라고 불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콘크리트 다리로 개축되었다고 한다. 효경교는 다리 부근에 소경이 많이 살았다 하여 '맹교(盲橋)', '소경다리'라고도 불렀다. 마전교는 다리 부근에 우마를 매매하는 마전 (馬廛)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오간수문은 청계천 물이 성밖으로 빠져나가도록 하기 위하여 성벽 아래에 설치한 수문 (水門)이 다섯개라 '오간수문'이다. 성벽을 지키거나 수문을 관리하기 위하여 그 앞에 긴 돌을 놓아 다리의 기능을 병행하도록 하였다. 1908년 일제에 의해 파괴되고, 다시 다리가 놓여졌고, 그후 오간수교(五間水橋)라고 불리운다. 

1960-70년대에는 청계천변 동대문 상가, 평화 시장 등 근대화 상징이었다. 공구·의류 등 여러 가지 산업이 집중되면서 공해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나타나서, 자연환경을 복원시키고 역사문화를 복원한다는 취지에 복원된 청계천은 이제 서울 시민의 쉼터와 각광 받는 21세기 새로운 문화공간이 되었다.
 

빨랫터처럼 정겨운 생활문화공간이 되었으면... 
 
조선시대 당시 9개의 다리에서 22개의 다리가 놓여진 청계천,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은 빌딩 사이로 청계천은 서울의 핏줄처럼 흐르고 있다. 그러나 인공적으로 미화된 청계천에서 그 옛날 청계천의 흙의 향수를 느낄 수 없으나,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말처럼 청계천은 미래를 향해 변화무쌍하게 흐를 것이다. 어떤 날은 시로 어떤 날은 그림으로 또 어떤 날은 추억의 '빨래'들이 펄럭이는 그 빨랫터처럼…느릿느릿 발목이 시리도록 저물도록 청계천변 추억의 속도로 걷고 걷는다.

덧붙이는 글 | 서울시 청계천 자료  참고


태그:#청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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