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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한 사람이 하룻동안 움직이는 거리는 얼마나 될까. 국민기초생활보장 1종 수급자인 임재신(39.충남 천안시 신방동)씨는 컴퓨터가 있는 방, 그리고 거실, 침실을 오가는 것이 동선의 전부이다. 그나마 혼자 힘으로는 움직일 수도 없다. 휠체어를 사용해도 누군가의 조력이 있어야 한다. '희귀병' 때문이다.

임씨가 앓고 있는 희귀병은 '진행성 근이양증.' 근육병의 일종으로 근육의 힘이 점차 빠져나가 몸이 굳어져 팔과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고 심한 경우 생명까지 잃을 수 있다. 딱히 치료법이 없는 희귀 난치성 질환. 희귀병의 영향으로 지체 1급의 장애까지 안고 있다.

컴퓨터를 사용할 때도 마우스에서 손을 떼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도와줘야 한다. 혼자 힘으로 몸을 가눌 수 없는 재신씨에게 외출은 엄두가 나지 않는 일. 그러나 며칠전 집안 탈출을 감행했다. 가까운 곳도 아니다. 태평양 건너 다른 나라 미국이다.

진행성 근이양증에 장애인인 임재신씨의 미국 여행

공항 출국장에서의 기념 촬영 모습. 왼쪽 첫 번째가 임재신씨이다.
 공항 출국장에서의 기념 촬영 모습. 왼쪽 첫 번째가 임재신씨이다.
ⓒ 윤평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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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신씨는 지난 10일부터 21일까지 미국을 다녀왔다. 혼자 가지 않았다. 두 명의 활동보조인과 다른 장애인 두 명도 동행했다. 라스베가스, 그랜드캐년 등을 둘러봤다. 1인당 여행경비는 200만원. 4명은 자비로, 재신씨를 비롯해 4명의 경비는 풀뿌리희망재단이 부담했다.

재신씨의 미국 여행 아이디어는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사회재단인 풀뿌리희망재단에서 내놓았다.

풀뿌리희망재단 유삼형 사무국장은 "작년 연말쯤 장애인도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할 수 있는 일에 써 달라며 익명의 시민이 1000만원을 재단에 기부했다"고 말했다.

기부를 받았을 때 유 국장의 머리 속에서는 임재신씨가 떠 올랐다. 진행성 근이양증이라는 희귀병에, 장애라는 이중의 짐을 지고도 임씨는 천안지역 시민단체들의 홈페이지 기획과 관리를 맡는 등 공익적인 활동에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임씨의 미국 여행을 성사시켜 근육병 환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근육병 환자에게는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는 선입관을 깨고 싶다는 바람도 생겼다.

올해 1월부터 미국 여행 준비를 위한 논의를 시작했다. 미국에서도 임씨의 여행을 돕겠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실제로 이번 여행에서 LA의 재미동포들은 현지 일정에서 선뜻 차량을 제공하고 운전까지 담당했다.

처음 계획상에는 여행 시기가 더 빨랐다. 봄부터 재신씨 건강이 급격히 안 좋아지며 여행 여부 자체가 불투명해졌다. 오른쪽 어깨는 습관적으로 탈골됐다. 임씨의 건강이 12시간의 장거리 비행을 감당하기에 무리라는 목소리도 있었다.

가장 큰 용기를 낸 것은 역시 여행의 당사자인 임재신씨. 주변 걱정을 덜고 지난 열하루간 입출국과 현지 일정을 큰 탈 없이 소화했다.

"이전까지 한번도 비행기를 타 본 적이 없습니다. 수면제를 처방받아 비행기 안에서 줄곧 잠을 청했지만 움크린 자세로 있다보니 목이 아프고 고통이 컸죠. 현지에서는 활동보조인 두 명이 계속 돌봐줘서 오히려 한국보다 편한 점도 있었습니다."

가슴이 확 트인 그랜드캐년, 그리고 '딸과의 여행'

재신씨와 딸 주현의 모습.
 재신씨와 딸 주현의 모습.
ⓒ 윤평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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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여행길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곳은 '그랜드캐년.'

"전망대에서 그랜드캐년의 광활한 전경을 보는 순간 가슴이 확 트이는 것 같았습니다. 몸이 자유롭기만 하다면 행글라이더를 타고 하늘에서 그랜드캐년을 보고 싶더군요. 그랜드캐년까지 자동차로 가며 사막을 지났습니다. 잠깐 비가 왔죠. 사막에서 비를 맞는 것도 하나의 축복이라고 하더군요."

이번 여행은 또 하나의 숨은 의미도 있었다. 바로 '딸과의 여행'이다.

임재신씨는 스물 세살 때 군대에 갔다가 처음 몸의 이상을 느꼈다. 훈련소의 교육 프로그램을 다른 동기들처럼 소화할 수 없었다. 국군통합병원에서 1차 진찰 뒤 대학병원에서 '진행성 근이양증'이라는 확진을 받았다.

이듬해 봄 의가사 제대 후 대학에 복학했다. 건강이 안 좋아져 공부를 마치지는 못했다. 95년 12월에 결혼, 한해 뒤 딸이 출생했다. 99년 장애판정을 받고 휠체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내와는 2000년 헤어졌다. 싱글 대디가 된 재신씨에게 딸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가장 가까운 활동보조인이다.

"아이가 커 갈수록 제 몸은 더 굳어지고 일상생활을 위해서는 딸의 도움이 더 필요해졌죠. 요즘도 활동보조인이 방문하는 시간은 하루 6시간이 전부입니다. 아이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이죠. 활동보조인이 없는 시간은 딸 아이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아이는 아빠의 휠체어를 밀고 심부름을 도맡으며 컸죠."

생과 사, 한번의 이별은 불가피하지만 시기가 빠를 수도 있을 것이라는 미안함에 재신씨는 아이에게 엄격한 편이었다. 딸은 그런 아빠가 힘들었을까. 사춘기에 접어들며 아빠와 나누는 말수가 크게 줄었다. 어디서 매듭을 풀어야 할지, 임씨 자신도 답답했다.

예전에도 장애인캠프에 딸이 동행한 적은 있지만 이번처럼 아침에 눈을 떠 저녁에 잠들 때까지 딸과 일정을 같이한 여행은 처음. 여행 초반과 달리 돌아오는 날에는 한결 가까움이 전해졌다.

임재신씨는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선물이 딸과의 시간이었다"며 "더 많은 장애인들이 이런 행복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천안지역 주간신문인 천안신문 536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진행성근이양증, #임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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