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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인기를 끌었던 MBC 드라마 <마지막 승부>
 큰 인기를 끌었던 MBC 드라마 <마지막 승부>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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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MBC 드라마 <마지막 승부>는 전국을 농구 열기에 빠트렸다. 장동건, 손지창, 심은하, 신은경과 같은 풋풋한 당대의 청춘스타들이 총출동한 이 스포츠 드라마의 인기는 실로 대단했고, 드라마를 본 시청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농구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때마침 대학농구계에는 슈퍼스타들이 쏟아졌다. 연세대에는 문경은, 이상민, 우지원, 서장훈 등이, 고려대에는 전희철, 김병철, 양희승, 현주엽 등과 같은, 실력과 스타성을 겸비한 걸출한 인재들이 활약하며 실업팀을 능가하는 실력으로 '농구대잔치'를 장악해 나갔다.

게다가 만화계에서는 <슬램덩크>가 대히트를 기록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크게 성공한 다케히코 이노우에 작가의 농구만화 <슬램덩크>가 만화잡지 <소년 챔프>에 연재되고 엄청난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만화에 푹 빠진 청소년들은 시간만 나면 농구공을 튀겼다.

<마지막 승부>와 <슬램덩크>, 거기에 마이클 조던의 신기에 가까운 플레이에 매료된 사람들은 농구장을 찾아 농구대잔치를 관람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직접 농구공을 들고 농구코트를 찾았다. 농구공은 불티나게 팔렸고,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NBA 카드나 선수들의 이름과 등번호가 적힌 티셔츠, 유명 메이커의 농구화 하나 정도는 갖고 있는 게 하나의 유행이 됐다. 가히 농구 붐이었다.

<마지막 승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스포츠드라마 붐

최근 조기종영 된 MBC <2009 외인구단>.
 최근 조기종영 된 MBC <2009 외인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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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스포츠 드라마가 성공했던 케이스는 <마지막 승부>가 거의 유일했고, 이후 제작되는 거의 모든 스포츠 드라마는 쓰디쓴 실패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사랑은 블루>(수영), <도전>(조정), <슈팅>(축구), <아이싱>(아이스하키), <때려>(권투) 등등. <마지막 승부>의 성공 이후 다양한 종류의 스포츠 드라마가 제작됐지만 대부분 부진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사회적 파급력도 제로에 가까웠다.

이런 스포츠 드라마 필패의 기류는 최근 들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얼마 전 종영된 MBC 주말드라마 <2009 외인구단>(이하 <외인구단>)은 저조한 시청률로 조기종영되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국가대표팀의 베이징 올림픽 우승과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준우승으로 인해 높아진 야구 인기, 80년대를 강타했던 동명 원작의 힘을 등에 업고 높은 주목 속에 시작한 <외인구단>은, 그러나 방영 내내 한자리 대 시청률에 머무르며 부진했다.

종영이 가까워진 MBC 수목드라마 <트리플> 역시 부진하기는 마찬가지다. 김연아라는 세계적인 선수로 인해 이제는 가히 '국민 스포츠'로 자리 잡은 피겨 스케이팅을 다룬 드라마라는 점에서 스포츠 드라마의 계보를 잇는다고 볼 수 있는 <트리플> 역시 12회가 끝난 지금까지 한자리 대 시청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피겨 스케이팅이라는 화제성도, 스타 PD인 이윤정 PD와 화려한 출연진의 약발도 전혀 먹혀들지 않고 있다.

스포츠 드라마의 부진, 이유가 뭘까?

MBC 수목드라마 <트리플>
 MBC 수목드라마 <트리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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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드라마가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독 부진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문제가 있겠지만, 우선 공감할 수 없는 정서를 꼽을 수 있다. 드라마의 전반을 관통하는 정서, 코드가 시청자가 바라보는 지향점과는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의 욕망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면서 드라마가 가진 '대리만족'의 기능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외인구단>이다.

<외인구단>은 이현세 화백의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을 원작으로 한다. 83년 출판된 <공포의 외인구단>은 영화 및 소설로 만들어졌을 정도로 높은 인기를 누렸다. 80년대를 강타했던 <공포의 외인구단>의 작품성과 대중성은 이미 충분히 검증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리메이크된 드라마는 실패했을까? 문제는, <공포의 외인구단>이 무려 20여년 전의 작품이라는 데 있다.

야구와 엄지가 전부인 오혜성, 그의 뒤에는 손병호 감독이 있었다. 그는 오혜성에게 야구든 사랑이든 자신의 것을 지키고 싶으면 강해지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오혜성과 팀원들을 무인도에 데리고 가서 지옥훈련을 시킨다. 오혜성은 마동탁에게서 야구를 이기기 위해,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처절할 정도로 희생을 감수한다. 이는 70~80년대를 살아간 기성세대의 사고방식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 시절을 관통하는 사회적 정서는 그런 것이었다. 높은 노동시간과 상대적인 저임금에 시달리면서도 성공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정서, '나'의 희생을 '조직'의 발전에 연결시키는 전체주의적 사고가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성공과 출세가 최우선이던 때였고, 사랑을 위해서 자신을 아낌없이 내던지는 지고지순한 순애보가 통하던 때였다. <공포의 외인구단>의 오혜성에 환호하던 80년대는 그런 시절이었다.

21세기엔 도저히 이해 안 가는 80년대 오혜성

그러나 이제 시대는 바뀌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는 더 이상 성공이나 출세에 연연하지 않는다. 적당히 안정적인 직장에서 적당한 연봉을 받으면서 여가를 즐기고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데 주력한다. 자신의 희생을 통해 조직을 발전시키려는 생각 같은 건 없다. 꿈을 성취하려 하기보다는 안정을 우선으로 하고,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포기하는 희생을, 순애보를 믿지 않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이다.

그런 이들에게 80년대의 오혜성이 먹혀들 리 없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지옥훈련을 마다 않고 일부러 경기에서 패하는 오혜성을 좋다고 바라볼 시청자는 드물다. <외인구단> 실패의 원인 중 하나는 정서가 바뀌었다는 것을, 대중의 욕망이 달라졌다는 것을 짚어내지 못하고, 과거의 성공을 그대로 답습하려 한 기획과 제작에 있었다.

스포츠 드라마임에도 스포츠가 주가 되지 못하고 부가되는, 남녀 주인공들의 사랑 이야기에 양념 수준으로 전락한다는 것도 문제다. <외인구단>의 경우 회를 거듭할수록 야구는 뒷전으로 한 채 오혜성과 엄지, 마동탁의 삼각관계만 부각되었고, <트리플>은 그나마 양념 수준도 못 되는 처지가 됐다. 의붓남매, 친구와 친구 아내, 17년 지기 우정으로 대변되는 세 커플, 여섯 남녀의 사랑 이야기 속에 피겨 스케이팅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물론 <트리플>의 연출자인 이윤정 PD는 드라마 방영 전에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트리플>을 스포츠 드라마가 아닌, 사랑 이야기라고 못 박은 바 있다. 그러나 연출자의 바람과는 달리 언론은, 그리고 시청자는 <트리플>을 스포츠 드라마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니 한쪽에서 아무리 "<트리플>은 스포츠 드라마가 아니야!"라고 외치면서 사랑을 그려도, 다른 한쪽에선 "무슨 피겨 스케이팅 드라마가 이래?"라며 불평하게 되는 것이다.

잇단 실패에도 '스포츠' 미련 못 버리는 제작자들

복싱을 소재로 만든 SBS드라마 <때려>
 복싱을 소재로 만든 SBS드라마 <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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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드라마를 전문직 드라마의 한 갈래로 볼 수 있다면, 이는 최근 몇 년 사이 불어닥친 전문직 드라마에 대한 '사랑 논쟁'과도 연관 지을 수 있다. 케이블TV와 인터넷의 발달로 미드(미국 드라마)와 일드(일본 드라마)를 안방에서 볼 수 있게 된 시청자들은 과거와 달라진 눈높이를 갖게 됐다. 그들의 눈에 비친 외국 드라마들은 사랑 놀음을 곁가지로 치워 버리거나, 아예 배제한 채로도 충분히 재밌고 뛰어난 완성도를 자랑했다.

의학 드라마는 의사들이 병원에서 사랑하고, 법정 드라마는 변호사들이 로펌에서 연애하는 드라마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우리의 전문직 드라마는 '사랑 프레임'에 갇혀 있다. 최근 종영한 정치 드라마 <시티홀> 역시 극 후반부로 갈수록 '정치'라는 본연의 주제보다 남녀 주인공 사이의 사랑과 갈등에 초점을 맞췄다는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면서 나온 말이 '왜 우리는 <웨스트윙>같은 정치 드라마를 못 만들까?'하는 것이었다.

<하얀거탑>은 순도 100%의 전문직 드라마도 성공할 수 있다는 사례를 남겼다. 그러나 모든 전문직 드라마가 사랑 이야기 없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에서 남녀 주인공 간의 사랑과 갈등은 사건을 만들고 극에 긴장을 고조시키는 장치로써 빠지기 힘든 요소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양자 간의 균형이다. 혹평을 듣는 전문직 드라마일수록 그 안을 들여다보면 전문직은 흔적만 남아 있고 사랑만 가득하다.

SBS 월화 드라마 <자명고>의 후속작으로 방영 예정인 <드림>은 이종격투기 선수와 스포츠 에이전트의 이야기를 다룬 스포츠 드라마다. <드림>은 가수에서 연기자로 변신한 손담비를 비롯해 주진모, 김범 등이 주연으로 캐스팅되었고, 국내 최초로 스포츠 에이전트를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방영 전부터 높은 관심을 끌고 있다. 연달아 두 편의 스포츠 드라마가 부진한 가운데 시작하는 새로운 스포츠 드라마라는 점도 주목받는 이유 중 하나다.

<드림>뿐만이 아니다. <맨 땅에 헤딩>(축구), <버디>(골프), 그리고 피겨 스케이팅을 소재로 한 또 한 편의 드라마 <질 수 없어> 등 여러 편의 스포츠 드라마들이 만들어질 예정에 있다. 만들어지는 족족 실패하고 있는데도 이처럼 스포츠 드라마가 계속해서 제작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각본 없는 드라마'로 불리는 스포츠가 갖는 그 특유의 매력 때문으로 해석된다.

<드림> 등 후속 스포츠 드라마가 성공하려면

첫방송을 앞두고 있는 SBS 드라마 <드림>
 첫방송을 앞두고 있는 SBS 드라마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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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과 열정, 우정과 사랑, 냉정한 승부의 세계에서만 느낄 수 있는 긴장감, 그곳을 둘러싼 크고 작은 암투 등등, 스포츠의 세계에는 드라마틱한 극적 요소가 모두 담겨져 있다. 때문에 드라마 제작자의 입장에서는 스포츠란 소재가 주는 매력이 크게 느껴진다. 문제는 이런 것들이 드라마 내에 얼마나 잘 녹아 있는가 하는 것이다. 소재 자체가 주는 매력이 크다고 해서 드라마의 성공이 보장되진 않는다.

중요한 것은 스포츠 그 자체를 완성도 있게 그려내는 것이다. 메이저리그와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언제 어느 때고 볼 수 있게 된 요즘 시청자들의 안목은 과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높아졌다. 어설픈 컴퓨터 그래픽과 허술한 상황 설정은 채널을 돌리게 만들 뿐이다. 시청자들의 눈높이에 맞게 제대로 된 스포츠를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스포츠와 사랑, 양자 간의 균형을 잘 맞춰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게 되지 말아야 한다.

시청자는 냉정하다. 야구 드라마라는 말에 혹해, 여주인공이 피겨 스케이팅 선수라는 말에 혹시나 해서 TV 앞에 앉았다가도 재미없거나 어설픈 장면이 반복되면 언제든지 채널을 돌린다. <드림>이 꽃미남 배우와 섹시 여가수의 캐스팅으로 화제가 되었다곤 하나 드라마의 완성도에 따라 그 화제는 독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제대로 만들지 못한다면, 방영 전 숱한 화제를 뿌리고도 한자리 대 시청률에 허덕이는 전작들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태그:#스포츠 드라마, #마지막 승부, #외인구단, #트리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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