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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실업자지요, 뭐."

요즘 어떻게 지내시냐는 질문에 서울 마포구 아현뉴타운 3구역 상가 세입자 이길현(50)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씨가 운영하던 부동산은 지난달 9일 강제철거되었다. 하루아침에 일터를 잃어버린 부동산 사장님의 목소리에서는 착잡함과 무기력함이 느껴졌다.

아현3구역 상가세입자 이길현씨가 철거된 부동산이 있던 자리를 가리키고 있다.
 아현3구역 상가세입자 이길현씨가 철거된 부동산이 있던 자리를 가리키고 있다.
ⓒ 서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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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이씨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거침없이 말을 쏟아냈다. 재개발 조합 측이 제기한 명도소송 때문에 상가의 강제철거집행이 예고된 것은 지난달 1일. 철거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지난달 9일 오후 이씨는 두 시간가량 부동산을 비웠고, 그 사이 포크레인이 부동산을 덮쳤다. 이씨가 돌아오자 부동산은 골격만 남아 있을 뿐이었고, 내부에 있던 가구와 집기는 사라졌다. 이씨는 "아침부터 부동산 근처를 흘긋흘긋 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용역업체 사람들인 듯하다"며 "일부러 내가 자리를 비운 시간을 택해 철거를 해버린 것"이라고 말했다.

'명도소송'이란
부동산의 점유자가 임대인에게 자진하여 부동산을 인도, 또는 명도하여 주지 않는 경우에 법원의 판결을 통하여 강제적으로 부동산의 점유를 넘겨주도록 하는 재판절차를 말한다.

철거 당시 이씨는 상가 강제철거를 유예하기 위해 법원에 강제집행정지 신청을 해 놓은 상태였다. 명도소송 1심판결에 대한 항소 및 도정법 49조 6항에 대한 위헌제청신청 또한 법원에 계류 중이었다. 1차 철거 이후 감행된 또 한 번의 철거로 인해 부동산 건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금은 강제집행정지 신청과 항소, 위헌제청신청과 같은 법적 대응이 무의미해진 상황이다. 이씨는 "법적 대응 절차를 거치고 있는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법원에서) 집행문을 너무 성급하게 발급했다"며 "법원이 과연 공정한 판단을 한 것인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이씨는 명도소송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재판이 끝난 후에야 알았다고 한다. 법원이 명도소송 관련 통보를 우편으로 하지 않고 공시 송달(公示送達)했기 때문이다. '공시 송달'은 민사 소송법에서, 당사자 주거의 불명확성 등을 이유로 소송에 관한 서류를 전달하기 어려울 때에 그 서류를 법원 게시판이나 신문에 일정한 기간 동안 게시함으로써 송달한 것과 똑같은 효력을 발생시키는 송달 방법을 말한다.

평소 인터넷을 잘 이용하지 않던 이씨가 이 사실을 처음 안 것은 지난 4월 말경. 명도소송이 진행된 지 벌써 수개월이 지난 뒤였다. 옆에 있던 이씨의 아내 박영자(50)씨는 "재판이 끝나버린 것도 모르고 우리 부동산은 아직 괜찮다고 여겼던 것만 생각하면..."이라며 말을 흐렸다.  

법원이 제시한 공시 송달 사유는, 2009년 2월과 3월 두 차례에 걸쳐 관련 서류를 송달하려 했으나 수취인의 거주 여부가 명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씨는 이 부분에 문제가있다고 지적했다. 법원이 보내온 '송달현장 상황탐지 등 결과통보서'에는 "송달장소의 거주자(박자영, 집안에서 문을 열지 않으며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수취인은 지인이나 송달장소에 주소를 두고 있고 거주하지 않는다며 진술하므로 송달 불능하다(2009년 3월 3일)"라고 나와 있다. 즉 송달장소의 거주자인 '박자영'씨가(이씨의 아내 '박영자'씨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됨)가 '이길현씨는 이곳에 살고 있지 않다'고 말했기 때문에 공시 송달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공시송달 사유가 담긴 문서. 집안에서 말을 했던 사람의 이름이 '박자영'이라고 나와 있다. 이씨의 아내 이름은 '박영자'이다.
 공시송달 사유가 담긴 문서. 집안에서 말을 했던 사람의 이름이 '박자영'이라고 나와 있다. 이씨의 아내 이름은 '박영자'이다.
ⓒ 서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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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와 박씨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박씨는 "나는 저런 말을 한 적이 없고, 누군가가 우리집에 우편 배달을 하고자 한 적도 없다"고 말했다. 법원의 공시 송달 사유에 따르면, 박씨는 우편을 배달하러 온 사람에게 문도 열지 않은 채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그것도 '박영자'라는 자기 이름을 '박자영'이라고 잘못 말하고), '자신의 남편이 이곳에 주소는 두고 있으되 거주하지는 않는다'고 말한 셈이다. 이씨는 "철거 이후에 이런 절차상의 문제를 이유로 법원에 이의제기를 했으나 서류상으로 문제가 없다는 말만 들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철거를 영원히 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강제로 철거해버리는 경우가 어디 있냐"며 "이번 철거는 절차를 무시한 채 철저하게 일방적이고 폭력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부동산 건물이 완전히 무너져 버렸기 때문에 앞으로 법적 대응을 계속 한들 의미가 없다"며 "남은 것은 국가를 상대로 하는 손해배상청구소송밖에 없는데 쥐꼬리만 한 배상금 때문에 거액의 변호사비를 들일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이씨네 다섯 식구의 생계를 책임졌던 부동산은 이제 잔해만 남아 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이씨네 다섯 식구의 생계를 책임졌던 부동산은 이제 잔해만 남아 있다.
ⓒ 서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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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는 부동산이 철거된 이후 약 한 달간 수입이 끊긴 상태다. 생활비는 여기저기서 빚을 내 충당하고 있다고 한다. 이씨의 아내는 "초등학교 2학년과 5학년, 중학교 2학년생인 딸아이 셋의 학원비가 끊겨서 큰일이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현재 이씨는 주택을 보유하고 있어 아현3구역의 조합원이기도 한데, 조합원으로서도 걱정이 많다. 33평 아파트 분양권을 약속받았지만, 조합원이 부담해야 하는 추가분담금이 만만치 않은 데다가, 나중에 조합 측이 추가분담금을 부풀리는 사례를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이씨는 "조합원은 조합원대로 걱정이 태산이고, 세입자는 세입자대로 갈 곳이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이씨는 "이명박 대통령은 현대건설 아파트 짓고 청계천 만들 듯이 재개발을 밀어붙이고 있다. 대통령이라면 서민들의 아픔도 돌아봐야 한다"며 현 정부에 대한 불만도 내비쳤다. 아내 박씨는 "아이들에게 내가 쓴 유서를 보여주며 이런 나라에서 살 거라면 차라리 스님이 되라고 말했는데 그 심정이 오죽했겠냐"며 "이번 일을 겪고 난 후 대한민국은 민주국가도 아니고, 서민들의 인권도 없는 국가라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http://blog.naver.com/wien30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재개발, #뉴타운, #명도소송, #강제철거, #세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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