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기사 수정 ] 5일 오후 5시 40분
 

1.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인본주의'는 성리학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중국의 당나라까지를 경계로 한 고대는 '정복전쟁'의 시대입니다. 정복전쟁에서 절대가치는 '힘'입니다. 인간 존재는 그 힘 앞에 한없이 초라했습니다.

 

송나라가 어지러운 중원을 정리하고 통일을 이루었을 때, 이 시대는 끝이 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도 고려시대는 '힘의 시대'가 아니라 문민통치와 정신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귀족정치시대였습니다. 고려는 극단적으로 과거시험에서 무과가 없었습니다.

 

송나라 철학자들이 과거시대를 정리하고 새로운 시대의 지평을 열면서 만들어낸 철학체계인 '성리학'은 그래서 인간중심의 철학이었습니다. 이 위대한 우주의 중심은 인간, 엄격하게 말해서는 군자라고 일컬어지는 사대부였습니다.

 

성리학의 인본주의가 위협받은 것은 서구문물이 들어오면서부터였지요. 명나라 말기에 서양은 대항해시대의 절정기에 있었고, 청나라가 세워질 무렵, 서양은 합리적인 신학으로서 '과학혁명'을 목전에 둔 때였습니다. 그들이 동양을 압도한 문명은 정신문명이 아니라 '물질문명'이었습니다.

 

서양의 '물질문명'이 조선 사대부들에게 들어오면서, 호기심 많은 사람들을 자극했습니다. 이 자극을 받은 사람은 당연하게 이 물질문명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사람, 즉 서울에 사는 고관대작의 자제들이었습니다. 바로 그들이 공부하는 학교가 서울과 경기도의 서원이었고, 그 중에 석실서원이 있었습니다.

 

안동김씨의 사당에 불과하던 이곳이 조선역사의 주체로 떠오른 까닭은 그곳에서 '조선중화주의'가 싹트고 꽃피웠기 때문입니다.

 

 

2.

 

조선중화주의는 소중화주의와는 다릅니다. 소중화주의는 중국이란 절대문명을 중심으로, 두번째 문명국이라는 뜻입니다.

 

'소중화주의'라는 말이 강대국에 빌붙어 목숨을 부지하는 약소국의 비애를 상징하는 것처럼 들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조선이 징기스 칸 같이 대제국을 건설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꼭 그런 나라를 만들어야 뿌듯한 것은 아니니까요. 중세 서양에서 로마 가톨릭에 충성을 맹세한 주변 국가들이 전부 소인배가 되는 것이 아니듯 말입니다.

 

그래서 소중화주의가 조선시대 유림들을 단죄하는 논리가 된 것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검토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사상도 정책도 살아 숨쉬기 때문에, 때로는 남을 베기도 하고, 때로는 나를 베기도 하는 양날의 검이니까요.

 

고려시대가 끝나갈 무렵, 원나라 간섭기가 남긴 것은 '비합리성'이었습니다. 고려의 임금은 원나라에 잡혀가 곤장을 맞기도 했고, 간단하게 그 자리를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임금도 귀족도 자신의 군사를 거느리고 여염집의 부녀자를 탐했고, 평민을 노비로 만들어버렸으며, 농민들의 땅과 재산을 빼앗아버렸습니다. 여자들을 공녀로 보내는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인지 몰랐습니다.

 

이런 부조리하고 비인간적인 현실을 타개할 저항의 이데올로기로서 당시의 새로운 세력이 선택한 것은 '성리학'입니다. 성리학의 인본주의는 임금과 신하와 백성간의 관계를 힘의 관계가 아니라 합리적인 (법률)관계로 변신시켰습니다.

 

이 새로운 세력들은 조선을 세우고, <경국대전>을 완성함으로써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완성했습니다. 흔히 훈구파로 알려진 그들이 '경국대전 세대'로 불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성리학에 대한 높은 신뢰와 중국에 대한 무조건적 모방과 추종을 구분하지 못하는 실수를 거듭 범하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은 내부에 적을 두고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중국이 유일한 문명중심국이 아니란 것이 밝혀졌을 때 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소중화주의가 위기를 맞이한 것은 명나라가 멸망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물론 명나라의 멸망은 조선의 성리학자들에게 너무도 큰 충격이었겠지요. 그러나 중국대륙이 야만인에게 무릎 꿇은 역사가 어디 한두 번이어야 말이죠. 그들을 경악시킨 것은 바로 세계지도입니다.

 

세계지도. '만국곤여지도'라고 불리는 이 지도에서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비로소 세계가 둥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세계가 둥글다면, 그 중심이라는 의미의 '중국'도 '중화'도 의미가 없지 않는가!

 

이 정체성의 혼란 속에 갈등할 때, 석실서원은 스스로 '중화'가 되길 자처했습니다. 조선이 세상의 중심이다! 이것이 조선중화주의라고 불립니다.

 

 석실서원을 중심으로 벌어진 이 캠페인으로 조선의 언어, 조선의 지리, 조선의 풍경, 조선의 사람들은 모두 새롭게 평가되었습니다. 진경산수화가 탄생하고, 진경시가 탄생했으며, 언어학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조선의 역사와 지리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노론의 핵심들을 중심으로 벌어진 이 새로운 운동을 주도해 나간 것은 김원행입니다. 밀려드는 서구문물에 맞서 조선 성리학을 지켜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며, 오랜 은둔생활을 마치고 석실서원 원장으로 취임합니다.

 

바로 그때 한 소년의 운명이 바뀝니다. 서원의 꼬마 유생 홍대용은 그렇게 천문학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3.

 

중앙집권적 왕권국가의 군주는 천문학을 제왕의 학문으로 존중했습니다. 하늘의 아들인 천자라고 노골적으로 부르는 중국은 물론이고, 우리나라도 '민심은 천심'이며 따라서 하늘의 마음을 얻지 못한 군주는 자리가 위태로웠지요. 영의정이 관상감 제조(대표) 자리를 맡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관상감 관리는 잡과라고 불리는 과거시험을 치르고 들어온 중인관리들입니다. 그들에겐 세상을 전체적으로 볼 철학을 공부할 기회가 없었던 셈입니다. 반면 우주론을 연구하는 성리학자들은 중인관리의 기술적, 실험적 과정 자체를 전혀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고, 배우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론과 실험의 분리. 그것이 조선천문학의 현실이었습니다.

 

중국을 통해 서양천문학에 입각한 시헌력체계가 도입되면서 조선성리학자들은 당황했습니다. 우주의 학문을 표방한 '성리학'이 서양천문학 앞에서 무장해제 될 위기에 빠지면서 당시 집권 서인들에겐 과제가 주어진 셈입니다.

 

'성리학이 옳은가?'

 

이 위기에 대한 돌파구로서 서인들은 자신들이 몰락시킨 남인들의 이론을 받아들입니다.바로 '역학'입니다. 이 탄력성이 서인 장기집권의 원동력이기도 했습니다. 노론(서인)이 서양학문을 연구하고, 대응논리를 적극적으로 모색함으로써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보호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주의 생성원리를 다룬 주역을 연구하여 우주의 운동을 연구하는 학문을 역학이라고 부릅니다. 요즘은 이 역학을 '점성술'이나 '점'이란 말과 동의어로 쓰입니다. 물론, 역학의 출발은 '점'에서 시작되었습니다만, 이것은 동양 과학의 특수성 때문입니다.

 

서양은 날씨의 불확실성이 없어서인지 우주에는 불변의 진리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상업문명이 발달한 그리스에서는 모든 변화무쌍한 변화의 근본에는 '어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믿었지요 .바로 화폐처럼 모든 존재의 환산물로서 '그것'의 존재를 확신했던 것입니다. 이 '그것'의 자리에 '신'이 훗날에는 '법칙'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동양은 태풍, 홍수, 한발… 이런 자연재해에 맞서야 하는 농업국가이다 보니 모든 것은 불확실성에 놓였습니다. 그들이 이 불확실한 세계에서 진리를 찾아내는 방법은 '통계' 외엔 없었지요. 그 통계학이 '점'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우 과학적인 통계법칙을 '점술' 형태로 대치해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역학은 그런 바탕 위에서 발달해왔습니다. 통계가 변질되어 수비학이 되고, 수비학이 우주론이 되고, 우주론이 현실을 압박하면서 과학적 실험과 관측과는 더 분리되었지만 말입니다.

 

조선중화주의라는 말은 멋지긴 했지만 이론적 뒷받침이 불명확했습니다.

 

'왜 조선이 중심이 되어야하지?

 

둥근 세상에서 중심이 없다는 얘긴 어느 곳이나 중심이 될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왜 조선이어야 하지?'

 

"예(禮)"가 문명과 비문명을 가르는 기준이며, 중국 명나라의 멸망으로 이제 문명국은 조선뿐이라는 조선중화주의는 철학적 위기에 빠졌습니다. 중국 송나라시절, 이민족에게 핍박받는 중화민족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위해 주희가 개발한 이 '문명중화론'은 서양천문학이 들어오면서 그 근거를 잃어버렸습니다. 세상을 전부 해석해내지 못하는 철학은 철학이 아니니까요.

 

이 위기를 구해낸 사람은 바로 서인 김육의 후손인 김석문입니다.

 

4.

 

김석문은 우리나라 최초로 '지전설'을 주장합니다.

 

지구가 스스로 돈다!

 

세상에, 지구가 돌다니!

 

처음, 사람들은 김석문의 주장을 듣고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던 모양입니다. 오로지 그가 명문 청풍김씨 집안의 후손이라는 이유가 아니라면 미치광이란 소리를 들음직 했지요. 친한 벗의 도움으로 간신히 '역학도해'란 책을 남기지 않았다면 영원히 묻혀버릴 뻔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석실서원의 김원행은 이 주장을 보고 무릎을 쳤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원하던 답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석문의 지전설은 철저하게 성리학적 목적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김석문은 서양천문학을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선교사들의 우주체계는 티코 브라헤의 체계입니다. 이것은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 두었고, 대신 타협하여 수성과 금성을 태양 주위로 돌도록 한 것입니다. 중세카톨릭은 이 우주론을 받아들임으로써 코페르니쿠스체계에 대한 방어막으로 썼습니다. 태양은 다시 지구 주위를 돌고 있으니까요.

 

김석문은 한가지 의문을 가졌지요.

 

'왜 모든 둥근 것은 도는데 지구만 돌지 않지?'

 

우주에는 예외가 존재하면 안됩니다. 그것이 모든 우주론이 인정받는 기본전제입니다. 김석문은 지구가 둥글다는 지구설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구도 돌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지전설'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습니다.

 

이것은 조선중화주의를 완성시킬 수 있었습니다. 둥근 지구에는 중심이 없지만, 회전하는 지구에는 중심이 존재합니다. 회전중심! 김석문의 역학도해는 이 회전중심을 한 점으로 분명하게 잡아내고 있습니다.(황심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문명의 중심으로서 '조선중화주의'는 우주론적으로 증명된 것입니다. 즉, 세상에는 하나의 중심만이 존재하며, 그것이 바로 지구의 중심이자 우주의 중심인 '중화'라는 것입니다. 지리학에서는 중심이 없지만, 우주라는 철학적 공간에서는 분명한 중심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여기에 기름을 붓는 이론이 도입되었습니다. 서양과학의 도전에 맞서야 했던 명나라 성리학자 황종의에 의해 개발되고, 청나라의 매문정에 의해 완성된 이론은 이렇습니다.

 

'서양의 과학과 기술은 중국에서 비롯된다.'

 

다소 황당한 이 이론의 근거는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진짜 유학의 모든 고갱이들이 사라질 위기에 빠졌을 때, 일부 기술적 핵심이 아라비아를 통해 서양으로 건너갔으며, 그들이 이것을 갈고 닦아 다시 중국에 들어온 것이므로, 그들이 동양정신의 핵심인 주역체계를 모르는 한 그것은 앙꼬없는 찐빵과 같다… 뭐 이런 내용입니다.

 

이 이론은 성리학자들을 단숨에 사로잡았습니다. 특히,석실서원처럼 고관대작의 자식들이 즐비하여 청나라 여행의 기회를 잡아 세상물정을 보아온 사람들에게 더욱 달콤한 사상이었지요. 김원행의 노력에 힘입어, 그리고 역학에 관심을 가진, 소론의 일부, 남인의 일부 학자들을 중심으로 열풍처럼 번졌습니다. 황윤석, 서명응, 서호수….

 

이런 역학 열풍이 불어닥칠 때, 단 한 사람, 홍대용은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5.

 

홍대용은 서양과학의 핵심이 '실험과 관측과 기하학'이란 것을 완벽하게 파악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동양의 위대한 중세과학이 서양과학에 그 자리를 내주어야 했던 이유라고 밝힌 그 이유를 홍대용은 한치도 어긋나지 않게 밝혀냅니다.

 

조선천문학이 최후의 유학자이면서 양반과학자 이순지를 끝으로 위대한 황금시대인 세종시대를 마감한 이후 다시 이론과 현실의 접점이 만들어진 순간이기도 합니다.

 

홍대용의 일생은 실험과 관측과 기하학 연구에 바쳐집니다. 그리고 끈질긴 연구 끝에 우주에는 중심이 없다는 것을 찾아내었습니다. 왜냐하면 '한없이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이 무한우주론은 모든 행성, 항성, 위성들의 평등성에 기초해서 만들어졌습니다. 김석문의 지전설을 받아들인 그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지구도 돌고 있다면 그것은 우주에 있는 하나의 둥근 별에 불과하고, 그렇다면 저 태양과 달과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지구에 사람이 살 듯, 태양에도 달에도 그세계를 살아가는 생명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지나칠 정도의 확신을 가진 우주평등론이 홍대용 천문학과 우주철학의 핵심입니다.

 

이로써 왕을 정점으로 질서를 가지고 층층구조를 가진 중세성리학적 우주관도 무너졌습니다. 모든 우주가 고정적이고 위계를 갖듯이 신분도 영원하다고 보았던 우주관의 붕괴는 가히 근대를 이끌어내는 혁명적 폭발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홍대용의 새로운 우주관은 변화를 필요로 했던 도시인들을 자극했습니다. 박지원은 자신의 소설 주인공으로 다양한 신분을 가진 '인간'을 등장시켰습니다. 거지에 불과하지만 그 어떤 양반보다 인간적 의리가 돋보이는 이야기나, 양반에 대한 비판, 상업에 대한 새로운 접근 등은 단순한 소설가의 취향이 아니라 철학적 흐름을 이끄는 거두다운 상상력의 표현이었습니다.

 

신분적으로 억압받던 박제가는 상업과 공업을 통해 새로운 조선을 만들어내려고 하였고, 이덕무와 그의 손자 이규경 또한 서얼에 불과했지만 백과사전을 통해 세상 만물에 평등한 지위를 부여했습니다. 이들 북학파가 '평등한 세상'을 꿈꿀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홍대용의 무한우주론이 가져온 힘이었습니다.

 

평등사상에 대한 홍대용의 철학적 믿음은 아마 그가 굉장한 음악가였기 때문에 얻어낸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슬(비파) 연주에서는 조선 최고였습니다만, 사람들은 천한 음악가 노릇을 하는 그에게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꺼이 천민에게도 음악을 가르쳐주었고,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그의 집에서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연주하는 악기사이에는 구별이 있지만 차별은 없는 법이니까요.

 

지난 2005년 한국 연구진이 발견한 소행성은 국제천문연맹으로부터 '홍대용'이라는 이름으로 헌정받았습니다.

 

조선시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한 천문학자의 위대한 이름은 하늘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태그:#홍대용, #조선중화주의, #석실서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