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쯤은 홍대 앞 근처에 '인디'라는 단어가 식수되던 때이기도 하다. 지금도 내가 기타를 치고 있는 밴드 3호선버터플라이 역시 그 무렵에 시작된 인디 밴드다. 나는 홍대 앞의 '인디'라는 낱말과 함께 나의 30대를 보냈고 그만큼 잊혔거나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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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호선버터플라이 <홍대 앞 새벽 세시> 출판기념회에서 공연하는 인디밴드 3호선버터플라이. 사진 오른쪽 기타리스트가 저자인 성기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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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에서 공연을 하거나 놀고 나온 후, 새벽 3시에 나는 물건들과 겹치는 수많은 사람들을 봤다. 그들의 운명은 비닐봉지의 그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순간적인 사운드에 몸을 맡긴 뮤지션이나 순간적인 소비에 활용되는 물건들, 그 공간을 누비는 수많은 젊은 눈동자들을 봤다. 그걸 꼭 덧없다고 할 필요도 없고, 잘났다고 할 필요도 없다. 우린 매일 그렇게 살고 있다. 편의점에서 너를 보았고 홍대 앞에서 너를 보았다."(3호선버터플라이 기타리스트 성기완, '<홍대 앞 새벽 세시> 책 머리글'에서)홍대 앞 새벽 세시, 인디 문화 10년의 기록2009년 제6회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노래상, 최우수 록 음악상을 거머쥔 장기하가 있기 전에 "어딘가 예술적이고, 어쩐지 괴짜 같고, 멋이 있고, 전위적일 것 같은"(<홍대 앞 새벽 세시> 46쪽) 홍대 앞 문화가 있었다. 장기하도 지금처럼 '장기하와 얼굴들'로 뜨기 전에는 '눈뜨고 코베인(2002년에 결성된 홍대 앞 인디밴드)'에서 건반을 맡았던 연리목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장기하는 홍대 앞에 있고, 홍대 앞 인디문화도 살아 있다. 시시각각 변해 온 것은 홍대 앞 인디문화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평가일 뿐이다. 홍대 앞 인디문화는 대중에게서 잊혔을 때도 자라고 있었다.
10년 넘게 지속된 홍대 앞 인디문화의 역사와 함께 한 밴드 3호선버터플라이의 기타리스트 성기완이 홍대 앞 인디문화의 10년을 돌이켜보며 책 한 권을 썼다. <쇼핑 갔다 오십니까?>, <유리 이야기>, <당신의 텍스트>라는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한 성기완의 시선으로 홍대 앞 인디문화 10년사를 맛있게 버무린 책 <홍대 앞 새벽 세시>가 나왔다. 홍대 앞 출판사 '사문난적'에서 이 책을 펴냈다.
홍대 앞에도 족보가 있다
홍대 앞 인디문화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 나왔다는 것은 나와 같은 편리한 키치적 문화소비자에 대한 기습 공격이다. 홍대 앞에서 약속을 잡고 홍대 앞에서 술을 마시면서, 늘 홍대 앞의 왠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즐기면서도 진짜 '홍대 앞'과는 늘 낯선 거리를 유지했던 나. 홍대 앞에는 매일 밤 기록되는 수많은 야사(野史)는 있을망정 정사(正史)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나, 홍대 앞을 뻔질나게 다니면서도 늘 홍대 앞 문화를 잊어버린 나의 책임이다. 90년대 중반, 홍대 앞 펑크 클럽 드럭이 쏟아내는 에너지 방사능에 감염된 채 살았으면서도 크라잉넛이 TV에 심심찮게 출연하던 시절 이후부터는 그 에너지의 본원을 잊고 살았던 나.
그런데 대중들 속에서 시시때때로 멀어질 때도 홍대 앞 아방가르드 홍대파, 오방파 뮤지션, 펑크족, 신발만 쳐다보면서 악기를 연주하는 슈게이징 뮤지션, 인디라는 개념을 개발한 먹물족, 들이대는 힙합족, 첨단 일렉트로닉 하우스 음악을 즐기는 클러버들은 사람과 사람, 사건과 사건 속에서 만나 홍대 앞 역사를 쓰고 있었다.
"그렇게 홍대 주변이라는 공간과 거기서 만난 사람들은 그 때는 치명적이지 않았지. 그러나, 나도 모르게, 아마도, 우리들은 어떤 예감을 했을지도 몰라. 우리들은 우리가 모르는 예감을 자주 하는 편인 거 같아. 홍대 앞에서 너를 만났어."(<홍대 앞 새벽 세시> 22쪽)성기완의 인디문화 리믹스 <홍대 앞 새벽 세시>는 10년 넘게 홍대 앞에서 살아 온 뮤지션이자 시인이며 대중문화 평론가이며 영화 음악감독까지 한(싱글즈, 미스터 소크라테스, 플라이 대디, 라듸오 데이즈 등) 성기완이 기록한 홍대 앞 사람과 사람, 사건과 사건들을 에세이 형식으로 기록한 책이다. 39개의 에세이로 구성돼 있지만, 홍대 앞 인디문화의 생성과 발전 과정을 엿볼 수도 있고, 그 문화의 속살까지도 느껴볼 수 있다.
홍대 앞 인디밴드의 시대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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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킹스턴 루디스카 <홍대 앞 새벽 세시> 출판기념회에서 공연하는 킹스턴 루디스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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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홍대 앞 아방가르드족도 아니고, 오방파도 아니고, 펑크족도 아니고, 클럽 마니아도 아닌 나는, 90년대 중후반에 대학을 다닌 우리들은 왜 홍대 앞 에너지 방사능에 오염되어 살았었나? 우리들은 어떻게 늘 낯설기만 한 홍대 앞 문화로 걸어 들어갔으며, 어딘가 예술적이고, 어쩐지 괴짜 같고, 멋이 있고, 전위적일 것 같은 홍대 앞 식구들은 어떻게 세상으로 걸어 나왔나?
"크라잉넛 <말달리자> 노래의 톤은 절망적이다. 그런데 1990년대는 사실 젊은이들에게 그리 절망적인 시기는 아니었다. 신세대네, X세대네 하는 말이 나왔고 10대들에게 그들 나름의 느낌의 자유와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 불충분한 상태로나마 인정되고 어른들에게 이해되던 때였다.…그런데도 크라잉넛은 절망적이다. '이러다가 늙는 거'란다. 말하기도 싫은지 자기가 한 말에 대고 '닥쳐'하고 외친다.…곰곰 생각해보면 X세대 이후의 자유 공간은 보다 넓은 굴레에 불과할 뿐이다. 오히려 신세대는 그 굴레에 더욱 철저하게 얽혀있고 더욱 철저한 소비의 노예일 뿐이다. 어쩌면 그들이 얻은 자유란 고작 예쁜 핸드폰을 고를 수 있는 자유일지도 모른다."(<홍대 앞 새벽 세시> 89~90쪽)맞다. 홍대 앞 인디문화가 비주류인 이유는 내가 그들을 잘 몰라서가 아니다. 그것이 비주류인 이유는 늘 주류 문화에 대한 비판자, 도전자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90년대 중반 이후의 학번들, 혹은 386 이후의 젊은이들은 고작 예쁜 핸드폰을 고를 자유만 누리며 살게 됐으면서도 늘 탈출을 꿈꿨던 것이 아닐까? 주류 문화에 익숙한 우리가 홍대 앞 문화로 걸어 들어간 이유는 거기에 문화 혁명가들이 만들어놓은 탈출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열심히 해드뱅잉 하던 10여 년 전 나와 마주치다7월 1일, 홍대 앞 '클럽打(타)'에서 아주 특별한 공연이 있었다. <홍대 앞 새벽 세시>의 출간을 기념하는 홍대 앞 인디밴드들의 무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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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신혜밴드 <홍대 앞 새벽 세시> 출판기념회에서 공연하는 황신혜밴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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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민들레 코러스>라는 첫 음반을 낸 휘루와 역시 최근에 <스카픽션>이라는 앨범을 발매 한, 자메이카 음악 역사에서 레게의 뿌리인 스카에 초점을 맞춘 그룹 킹스턴 루디스카, 그리고 10년의 홍대 앞 인디문화를 만들고 지켜 온 황신혜밴드와 3호선버터플라이가 <홍대 앞 새벽 세시> 출간에 대한 축사와 함께 열정적인 공연을 선보였다.
걸어 다닐 수 있는 통로만 제외하고는 관객으로 꽉 찬 공연에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 말고도 나에겐 이 무대에 대한 특별한 감동이 있었다. 그 날 '클럽打'에서 10여 년 전 아마도 대학 축제로 기억되는 무대에 초대된 황신혜밴드의 열정적인 공연 앞에서 격렬하게 해드뱅잉을 하고 있던 나와 마주쳤던 것이다.
그 시절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고 록 음악이 흐르는 술집에서 얼마 되지 않는 상식으로 커트 코베인과 너바나, 지미 핸드릭스, 라디오헤드, 메탈리카 등을 이야기하며 일탈을 꿈꾸던 나. 그리고 우리들.
그 때 내 머리카락을 온통 뒤엉키게 하고, 내 머리 위에 물을 뿌려대던 홍대 앞 인디밴드들이 아저씨가 돼서도 여전히 열정적인 모습 그대로 무대 위에 섰다. 나는 잊고 있었지만 홍대 앞 인디는 소멸하지 않고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10여 년 전, 나는 아마도 이렇게 떠들었을 것이다. 그들이, 그 인디들이 주류 문화를 전복하고 새로운 주류가 되어야 해!
덧붙이는 글 | 임세환 기자는 얼마 전까지 인터넷신문 프로메테우스 정치부 기자로 일했으며 17대 대선 때는 금민 사회당 대통령 후보 공보비서로 일했습니다. 이 글은 임세환의 블로그(blog.daum.net/altpress)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