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만 대표의 작업실 선반에 놓여있는 수많은 더미(dummy)들

▲ 이창만 대표의 작업실 선반에 놓여있는 수많은 더미(dummy)들 ⓒ 김준희


"비무장지대 안에 위치한 최전방경계초소. 밤이면 쥐죽은 듯이 조용한 이곳에서 수색견이 맹렬하게 짖어댄다. 궁금함에 초소 밖으로 나온 한 사병은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다. 자신의 고참인 병장이 피투성이가 된 수색견의 목을 입으로 물어뜯고 있었는데…."

지난해 개봉했던 공수창 감독의 영화 <GP506>의 한 장면이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이 장면에 등장한 개는 진짜 개가 아니다. 특수분장 전문 프로덕션 LCM의 대표인 이창만(41)씨가 만들어낸 '창조물'이다. 이창만 대표는 우레탄을 사용해서 개의 형체를 만들고 거기에 털을 입혔다. 그리고 물엿과 색소를 섞어 만든 피를 뒤집어 씌워서 죽은 개를 완성했다.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이 대표의 작업공간 한쪽에는 아직도 이 개가 있다. 목이 없는 채로 피묻은 몸통만이 선반 위에 놓여있다. 영화에서 관객들에게 몇 초 동안 강렬한 장면을 선사하고 나서 이제는 폐기처분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귀신의 집' 저리가라... 시체 천국을 찾다

 영화 <GP506>의 한 장면.

영화 의 한 장면. ⓒ (주)모티스


이 대표의 작업실에는 이외에도 수많은 시체(?)들이 널려있었다. 도끼로 목이 잘려나간 시체, 부러진 갈비뼈를 몽땅 드러낸 시체 등. 사정을 모르고 이 집에 들어오는 사람들이라면 '화들짝' 놀랄 만도 하다. 오래전 놀이동산에 있던 '귀신의 집'에 등장하던 모형을 보는 것만 같다.

물론 이 대표가 만든 시체들은 그런 모형보다 한결 더 섬세하고 인간에 가깝다. 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이런 모조 인간들을 '더미'(dummy)라고 부른다. 더미의 얼굴을 만져봤더니 사람 피부의 감촉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설마, 사람의 피부로 만들진 않았을 테고, 뭘로 만들었기에 이렇게 비슷할 수 있을까?

"일반 마네킹은 보통 FRP(fiber glass reinforced plastic, 유리섬유강화플라스틱)로 만들죠. 이런 더미는 실리콘으로 만들고요. 차이가 많이 납니다. 실리콘으로 만들면 땀구멍 하나하나까지 표현이 가능하고 피부 감촉까지 살릴 수 있으니까요."

이 대표는 현재 국내 특수분장 계의 베테랑 중의 한 명이다. 앞서 언급된 <GP506>을 포함해서 <범죄의 재구성><알포인트><여고괴담3 : 여우계단> 등이 그가 특수분장을 담당했던 대표적인 영화다. 최근에는 <작전><마린보이>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그는 93년부터 분장 일로 경력을 쌓다가 특수분장으로 입지를 굳혔다.

"분장과 특수분장의 차이라면, 분장은 일반적인 화장을 생각하면 돼요. 그리는 거죠. 예를 들어서 젊은 배우가 노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했을 때, 분장은 얼굴의 주름살 같은 것을 그리죠. 반면 특수분장은 그런 주름살이나 노화된 피부를 입체적으로 만들어 냅니다. 넓게보면 분장에 포함되지만, 일반적인 분장보다 더 정교하고 기술적인 노하우가 많이 필요한 분야라고 보면 됩니다."

드릴링 머신 다루는 것도 모자라 해부학까지

 이창만 대표의 작업실. 이 대표 오른쪽엔 각종 공구들이 걸려 있다.

이창만 대표의 작업실. 이 대표 오른쪽엔 각종 공구들이 걸려 있다. ⓒ 김준희


이 대표는 이 일을 하게 된 계기가 '재미있어서'라고 한다. 어릴 때부터 무언가 만드는 것을 좋아했는데, 막상 시작해보니까 점점 더 흥미가 생기더란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보다 더 새로운 것을 만들고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낀 것이다. 그가 말하는 우리나라 특수분장의 역사는 약 20여 년, 기간이 그리 길지 않은 만큼 이 분야를 '공부'하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저는 특수분장을 처음에 학원에서 배웠어요. 제가 알기로 우리나라에 한 군데 있어요. 그런데 학원에서 배우는 것은 특수분장에 대한 포괄적인 개념이고, 실무에 이용할 기술적인 부분은 몇 년에 걸쳐서 본인이 스스로 공부해야 합니다. 미국에는 관련 서적들이 많이 나와 있어요. 그런 서적들을 찾아서 보기도 하는데, 이론 공부는 초기 2~3년으로 끝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자신이 창조적으로 접근해야죠. 아무튼 끊임없이 공부해야 합니다."

넓은 작업실을 둘러보니, 한쪽에는 수많은 화학약품들이 있다. 더미를 만들 때 쓰거나 프로스테틱스(prosthetics) 작업에 사용하는 약품들이란다. 이 대표의 옆에는 망치와 톱, 낫을 포함, 온갖 공구들이 있다. 또 안쪽에는 공장에서 사용할만한 드릴링 머신같은 기계도 보인다.

특수분장에 정통하기 위해서는 이런 도구와 기계도 모두 사용할 수 있어야 하고, 여러가지 화학약품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난도질 당한 시체 더미를 정교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해부학에도 능통해야 한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이 일을 하려면 거의 만물박사 수준이 되어야 할 것 같았다.

사과드립니다
이 기사 중간에 '<미녀는 괴로워> 가 이창만 대표의 작품'이라는 중간제목은 사실과 다르기에 수정했습니다. 해당기사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일부 실수가 있었습니다. 이창만 대표와 해당 관계자, 독자 여러분께 혼란을 드린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특수분장도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더미 만드는 기술과 기계장치 기술, 그리고 가장 어려운 프로스테틱스 기법 등이 있다. 프로스테틱스? 뭔가 좀 생소하다. 이 대표는 "프로스테틱스는 해석하자면 '보철 기술' 정도가 될 것"이라며 "피부 위에 실리콘을 포함한 다양한 재료를 붙이거나 해서 사람의 외모를 변형시키는 것이다, 물론 관객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라고 설명해줬다. <미녀는 괴로워>에서 뚱뚱해진 김아중, <범죄의 재구성>에서 1인 2역을 했던 박신양을 생각하면 된다. 기계장치 기술은 예를 들자면, 사지가 잘려서 누워있던 시체가 움직이는 장면을 찍을 때 필요하다. 완성된 더미 안쪽에 기계장치를 넣어서 작동하게 하는 것이다. <GP506>에서 허리가 잘린 채 두 팔로 필사적으로 기어가던 병사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기계장치에 대해서도 많이 알아야 해요. 물론 기계 분야의 전문가를 불러다가 일을 맡길 수도 있겠죠. 그런데 그런 전문가는 기계에 대해서만 잘 알지, 그걸 영화적인 비주얼로 표현하는 방법은 모르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먼저 알아야 합니다. 하나의 기계를 만들어서 영화적으로 어떻게 쓰는 게 효과적인지 기계 전문가를 만나서 설득을 해야죠. 그럴 경우 나름대로의 시스템이 꾸려지는 겁니다."

 냉장고 위에 올라가 있는 더미

냉장고 위에 올라가 있는 더미 ⓒ 김준희


더미를 하나 만드는 데 보통 1~2천만 원 가량의 비용이 들어간다고 한다. 물론 더미를 시체로만 이용하는 것은 아니다. 총격을 받아서 얼굴 한쪽이 날아가 버리는 장면을 찍을 때도 사용한다. 일반적인 장면에서는 배우가 연기를 하는데, 얼굴에 총을 맞는 짧은 장면에서만 해당 배우를 정교하게 본떠 만든 더미로 대체한다.

워낙 섬세하게 만든 더미라서 일반 관객들은 더미라는 사실조차 구별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폭력의 수위가 높은 장면, 팔다리가 잘린다거나 몸통에 칼이 꽂히는 장면도 더미를 이용해서 촬영한다. 하지만 영화 촬영이 전부 끝나면 이 더미들은 모두 그냥 폐기처분된다.

"한 번 사용한 더미를 다시 사용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 더미들 얼굴이 다 연기자들 얼굴이거든요. 다른 영화에서 쓸 수가 없습니다. 더미 만들 때 들어간 돈이 아까워서 재활용하고 싶기도 한데 방법이 없어요. 그리고 이 더미 만들 때 사용하는 틀이 있어요. 그 틀을 만드는데도 한 2~3백 만원 정도 들어요. 그 틀도 한 번 쓰고 다 그냥 버리는 거예요. 버리는게 좀 아까워서 나중에는 더미들 보관을 잘해서 전시회를 하는 것도 구상 중입니다."

이창만 "특수분장은 '맨정신엔 못하는 일'"

 마당에 있는 더미. 멀리서 보면 마치 진짜 사람 같다.

마당에 있는 더미. 멀리서 보면 마치 진짜 사람 같다. ⓒ 김준희


이 대표는 그동안 작업을 하면서 소품들도 많이 만들었다고 한다. 폭력장면에 등장하는 가짜 쇠파이프나 알루미늄 방망이, 인체에 피해를 안주면서 쉽게 깨지는 가짜 소주병, 독립영화 <우유와 빵>에서는 커다란 바위도 만들었다고 한다. 가짜 바위를 어떻게 만들면 되는지 알려주는 매뉴얼 같은 것은 없다. 그러니까 평소에 끊임없이 공부하고 고민하면서 자신을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 대표는 이 분야를 배울만한 나라로 미국을 꼽았다.

"미국은 워낙 그런 장르의 영화가 많잖아요. 조금 과장하자면 자고 일어나면 발전해 있어요. 그리고 미국은 그런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요. 우리나라는 한 사람이 모든 걸 다 잘해야 됩니다. 프로스테틱스도 잘 해야되고 기계장치도 그렇고. 그런데 그러기가 쉽지 않거든요. 대신에 미국은 그런 것들이 분업화되어 있어요. 석고 개는 사람은 석고만 개고, 기계 담당하는 사람은 기계에 집중하고. 물론 거기도 전체를 총괄하는 사람은 있겠죠. 미국이랑 비교했을 때 개인이 가지고 있는 기술이 크게 떨어진다고는 생각 안 합니다. 다만 미국이 가지고 있는 시스템을 따라갈 수 없다는 거죠."

 영화 <알포인트>의 한 장면.

영화 <알포인트>의 한 장면. ⓒ 씨앤필름

영화의 완성도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이 특수분장이지만, 아직까지 국내 영화제에는 관련 상이 없다고 한다. 컴퓨터그래픽, 특수효과, 특수분장 이런 영역을 묶어서 '기술상'으로 선정한다. 이 대표는 "기술적인 부분의 수상분야가 좀 더 세분화되면 좋을 것"이라고 아쉬워 했다.
이 대표가 가장 최근에 작업한 영화는 <이태원 살인사건> <요가학원>이다. 올 여름에 개봉하는 영화들인데, 여러가지 색다른 시도를 많이 해본 작품인 만큼 재미있게 볼 수 있을거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특수분장 일에 관심이 있는 젊은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해줬다.

"제가 이 일을 시작한 지 16년 째인데, 저는 '이 일은 맨정신에 못하는 일이다'라고 말해요. 우리들은 일을 하고 고정된 월급을 받는 개념이 아닙니다. 어떤 영화가 있을 때 사람들이 저를 불러서 일을 맡기기를 기대하려면 제가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거든요. 저를 쓰게끔 제가 계속 발전해야 하니까요. 그러려면 정말 이 일을 좋아해야 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니까 적극적으로 계속 공부도 해야 되고요. 경제적인 수단으로 이 일을 택하면 안됩니다. 정말 이 일에 매력을 느껴서 열심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수분장 더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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