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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글 <뉴라이트의 예술 말살 책동 '한예종을 도살하라'>를 보자(진중권, <오마이뉴스> 2009).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주도로 세워진 한예종은 그 설립과정부터 기존 사립예술대학들의 질시와 견제를 받으면서도 지난 14년간 질적으로 엄청난 성장을 거뒀다. 우리도 '세계적인 예술가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설립 취지에 한예종은 충분히 부응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이론과의 존재에 딴죽을 걸며 황지우 총장을 사퇴시키고 한예종을 구조조정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예종의 이론과에는 정부에 비판적인 좌파 이론가들이 진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한예종 영상이론과 학생들이 개편에 반대하는 서명을 받고 있다.
 한예종 영상이론과 학생들이 개편에 반대하는 서명을 받고 있다.
ⓒ 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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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와 뉴라이트의 일관성 없는 행태

뉴라이트와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정치적/이념적으로 악용해서는 안된다고 누차 천명했다. 시민들이 모일 때마다 정부와 우파는 시민의 정치적 배후를 의심했고, 누군가 이념적으로 그들을 조종하고 있다는 음모론을 제기했었다. 시민의 배후에 그런 조직이 있다면 마땅히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비록 촛불시위가 자발적인 것이었다는 정황적 증거가 뚜렷하지만, 이념적/정치적 배후를 걱정하는 정부와 뉴라이트 단체들의 기우는 이해할 만한 것이다.

문제는 정부와 뉴라이트 단체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와 촛불시위에 가져다 댄 비판의 칼날이 한예종 사태에서는 그대로 자신들에게 돌아온다는 점을 모른다는 것이다. 전임 대통령의 서거에 모인 시민들의 이념적/정치적 배후를 비판하는 세력이 이념적/정치적인 이유로 한예종을 척결하려는 것은 초등학생에게도 어이없는 모순이다. 왜 어떤 사안은 정치적인 악용을 우려하면서, 다른 사안에는 정치적 악용을 자행하는가. 이명박 정부에겐 정책적/도덕적 일관성이 없다. 결국 가장 이념적인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정부가 비난하는 좌파세력이 아니라 정부 그 자신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당시부터 대학의 자율화를 말했다. 교육제도의 개선은 국가의 장기적 발전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천명한 이명박 대통령은 정부가 대학을 내버려두는 것이 지난 30년간 잘못된 교육정책을 바로잡는 가장 손쉬운 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학 자율화의 기본은 '대학 교육의 자율화'가 아닌 모양이다. 이명박 정부는 30년간 한국 대학의 발전을 저해한 요인이 '입시제도에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대학자율화의 또 다른 이름은 '대학 입시 자율화 3단계 정책'이다.

한국의 대학들 중에 세계적인 대학이 없는 이유는 대학입시제도에 자율성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한국 대학교육의 문제는 뽑는 데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면서 막상 가르치는 데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교육이 사람을 만든다. 이 말은 좌파든 우파든 모두 동의하는 테제다. 강남의 사교육 시장에서 엄청난 돈을 투자해 현행 입시제도에 맞춤 교육을 받은 아이들만 상위권 대학에 진입시키겠다는 입시자율화는 대학의 무능을 스스로 드러내는 우회적인 표현방법일 뿐이다. '우리는 너무나 못나서 질 좋은 학생을 뽑아놓지 않으면 대학을 발전시킬 수 없다'라는 교육적 무능을 솔직히 시인하는 셈이다.

한국의 대학들은 생물학적 결정론을 신봉하는 세력집단이다. 학생들은 육질이 좋은 송아지와 같은 취급을 받는다. 대학생들의 실력은 이미 고등학생 때 결정되어 있는 것이고, 대학은 그 육질을 선별하는 교육기관이다. 사태가 이 지경이라면 대학은 그냥 교육기관이라는 명칭을 버리는 것이 옳다. 육질 좋은 쇠고기를 감별하는 기관은 더 이상 교육기관이 아니라 감별기관일 뿐이기 때문이다. 정말 대학은 병아리 감별사일 뿐인가.

진정한 대학자율화는 입시자율화가 아니다. 대학의 자율화는 일정한 역량을 갖춘 이들을 골고루 뽑아 놓고 이들을 누가 더 우수한 인재로 길러낼 것인지를 가리는 경쟁에 그 핵심이 있다. 정부가 할 일은 대학의 운영에 자율권을 주고 대학이 제대로 된 교육을 실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 뿐이다. 그 자율권은 입시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대학의 진정한 가치는 교육기관이라는 그 말 속에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가 할 일은, 이명박 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경쟁'이라는 말을 입시가 아닌 대학교육에 적용하는 것이다. 대학은 자신들이 가진 교육철학과 교육관으로 경쟁하고 정부는 이를 공정하게 평가하고, 우수한 대학에 더욱 많은 지원을 해주면 그 뿐이다. 그것이 대학자율화다.

과학의 발전에서 대학과 정부의 역할

과학의 발전에서 대학이 끼친 영향력을 평가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이 말은 즉, 대학이라는 제도의 설립이 과학자라는 '창조적 소수'를 기르는 데 있어 언제나 가장 효율적인 기관은 아니었다는 말과 같다. 13세기부터 설립된 유럽의 대학들이 학문의 부흥을 이룬 것 같지만 지속적인 것은 아니었다. 17세기에 이르러 대학은 왕권과 교회 권력과 결탁했고 현재 우리가 역사에서 볼 수 있는 자유사상가들은 별도의 모임을 조직하고 대학 밖에서 활동했다.

갈릴레이가 가장 좋은 예다. 갈릴레이의 위대한 업적들은 파두아대학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반동분자'들의 모임인 '아카데미아 델 시멘토'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갈릴레이는 결국 파두아 대학을 떠나 플로렌스로 가서 투스카니 대공의 개인수학자로서 그의 위대한 저술들을 출판한다. 17세기를 구분짓는 위대한 과학자들 중 대학교수의 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과학혁명은 대학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대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난 것이다.

특히 갈릴레이의 위대한 업적을 시기한 것이 교회의 성직자들로부터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라 갈릴레이의 반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불안을 느낀 대학 교수들에게서 나왔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사실이다. 한예종의 '창조적 소수'들을 시기하는 사립예술대학 교수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왕권과 교회에 예속된 대학에서 불만을 느낀 자유사상가들은 독일에서는 '소시에타스 에로네티카'를, 영국에서는 '로얄 소사이어티'를 조직했고, 이러한 모임들은 17세기 중엽을 거치며 학회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하지만 자발적인 조직이었던 학회가 대학과 연계되기시작하면서 다시금 타락하고, 18세기에 이르면 제도권 대학에 대한 반발이 곳곳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그중의 하나가 스코틀랜드 버밍엄의 만월회였다. 결국 대학은 19세기 말엽에 가서야 제대로 조직을 이루고 대학 중심의 학계는 20세기 이후에야 가능해졌다.

갈릴레이와 같은 '창조적 소수'는 정부의 이해관계에 의해 움직이는 대학제도로부터 탄생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참여했던 '반동분자'들의 모임, 그리고 투스카나 대공과 같은 뜻있는 독지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유럽처럼 오래된 대학제도의 실험을 거치지 못한 우리는 입시정책이라는 잘못된 화두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지난 30년간 제대로 된 교육실험을 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결국 교육의 상당부분이 모두 정부에 귀속되었고, 대학과 같이 자율적인 고등교육기관조차 정부에 목을 매는 신세로 전락해버렸다.

우리에게 '베를린 학파'와 같은 학풍의 건설은 요원한 일

그 결과는 우리가 가진 상위권 대학들의 세계적 경쟁력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학문연구 기관으로서 대학이라는 기능과, 사회준비인을 배양하는 기관으로서 대학 기능이 적절히 조화되지 않은 채, 후자만을 쫓아온 결과가 바로 현실인 셈이다. 결국 대한민국의 대학엔 학풍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극적인 상황이 초래되었다. 우리에겐 '시카고 학파'도 '베를린 학파'도 없다. 그저 서울대학과 지방대학이 존재할 뿐이다.

필자의 눈에 '창조적 소수'를 천명한 한예종의 지난 14년은 우리에게도 하나의 학풍이 예술이라는 분야에서 사상 최초로 생겨나리라는 하나의 희망이었다. 비록 역사적 실험과 정책입안자들의 무지로 관 주도 형식을 빌릴 수밖에 없었지만, 총장의 헌신적인 노력과 구성원들의 열정이 어떻게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대학을 만들 수 있을지를 가능케 하는 위대한 실험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그 위대한 실험을 부수려 한다. 갈릴레이를 질투해 그를 종교재판에 세웠던 낡은 대학교수들처럼, 사립예술대학의 교수들은 질투에 눈이 멀어 정부에 동조하고 있다. 그들의 질투는 한예종의 실력을 방증하는 것이다. 너무나 뛰어난 성과들을 올리고 있기에 그들의 눈밖에 난 것이다. 우리는 다시 중세로 돌아가고 있다.

정부, 민영화 그리고 제3의 길

뉴라이트는 한예종을 민영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근본적으로 필자도 한예종과 같이 위대한 대학이 정부의 이념적/정치적 공격을 받느니 차라리 민영화로 자율성을 꾀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뉴라이트 세력이 주장하는 민영화는 어린 아이를 전쟁터에 내보내는 것처럼 책임감 없는 헛소리다. 교육재원의 대부분이 정부로부터 지급되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결국 민영화를 위한 자본을 어디서 충당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300억이라는 국가의 세금이 들어가는 한예종이 아무리 밉더라도 14년간 쌓아온 그 경험과 노력이 보존될 뒷길은 터주어야 한다.

유럽의 과학혁명의 배경에는 과학자들과 자유사상가들의 자발적인 조직을 후원하던 뜻 있는 독지가나 귀족들의 존재가 있었다. 유럽의 과학혁명은 그런 독지가와 귀족들의 후원으로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서구전통은 현대에 이르러 비영리 민간재단, 즉 제3섹터형 기구로 정착한다. 우리에겐 구미에 존재하는 제3섹터의 지원이 미미하다.

예를 들어 분자생물학의 혁명을 이끌었던 록펠러 재단과 같은 자본, 백신개발에만 투자된 빌게이츠재단과 같은 자본이 대한민국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김석현, 혁신정책Brief 2005). 이 말은 천민자본주의 대한민국에서 이제야 논의되는 노블리스 오블리주와도 통하는 일이다. 서구대학과 학문적 발전의 주춧돌인 비영리 민간재단의 지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우리 현실에서 한예종의 민영화를 논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특히 민영화의 의미가 단순히 한예종을 상업논리가 지배하는 민간자본에 귀속시키는 일이라면 이는 더욱 경계해야 할 일이다. 예술의 가치는 상업적으로만 환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영리민간재단의 가치는 그들의 활동이 말 그대로 '비영리적'이라는 데 있다. 300억을 사회에 기부하겠다던 대통령의 사회환원도 제때 이루어지지 않는 한국적 천민자본주의 속에서, 기초학문과 기초예술의 보장은 아직 정부가 떠맡아야 하는 일이다. 우리가 스크린쿼터를 지켜야 했고 이로부터 한국영화의 부흥을 얻었던 것과 같은 논리라는 말이다. 결국 정부는 미국과 같은 비영리재단의 증진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이명박 정부를 비롯해 대한민국의 역대 정부들은 그런 철학과 비전을 가져본 적이 없다.

한예종은 대한민국 교육제도의 모순을 드러내는 희망의 상징이다

결국 한예종 사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상징적이다. 첫째, 대학자율화라는 이명박 정부의 기조가 가진 오류를 그대로 보여주는사건이다. 교욕의 자율화로 급성장을 이룬 한예종에 대한 정부의 탄압은 현 정부의 자율화 정책이 결국은 입시지옥을 만드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아님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일이다.

둘째, 학벌중심사회라는 대한민국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정부의 철학적 무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대학졸업장을 포기하고 오직 실력으로만 승부하겠다는 한예종의 '창조적 소수'들이 만들어낸 위대한 승리는 간판과 학벌로 서열화된 대한민국에 던지는 희망적인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셋째, 대학교육에 있어 정부의 역할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점에서 한예종사태는 상징적이다. 정부의 이념과는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자본이 부재한 대한민국의 현실 속에서, 한예종 사태는 자본을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학문적/교육적 성과가 정부에 의해 무참히 짓밟힐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다.

넷째, 위의 이유들과 더불어 이제 우리도 학문과 교육의 발전을 위해 기업이 나서야 한다는 장기적 전망으로서 상징이다. 대한민국의 기업들에게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수없이 외쳐도 부족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정부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국가는 우파 자유주의자들도 바라는 세상이 아니다. 따라서 작은 정부를 추구하는 이명박 정부는 비영리재단과 같은 대안을 모색하려는 시도를 보여주어야 한다. 뉴라이트 세력도 마찬가지다. 정부주도를 탈피하는 길이 반드시 민영화로 흐르는 것은 아니다. 정부와 시장의 사잇길은 존재한다. 자본주의의 본령인 미국에서 가장 번창한 비영리재단의 예는 이 땅의 우파들이 얼마나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으로만 사고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한예종이 국립대학으로 출발한 것이 비극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에서 그만한 자본이 투입될 수 있는 출처는 정부뿐이다. 그리고 파국은 다시금 정부로부터 왔다. 이 사태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장기적인 교육정책의 수립이 무조건 정부 주도로만 가서는 안 된다는 데 있다. 정부에 모든 짐을 떠넘긴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비영리 민간재단을 설립하는 일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한예종의 좌파적 성향에 대해 정부가 분노하지 않아도 되고, 한예종도 정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비상할 수 있는 궁극적인 대안이다. 나아가 그때에서야 우리는 제2의 한예종, 제3의 한예종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학풍 없는 나라 대한민국에서 한예종은 그런 상징이다. 우리는 한예종을 지켜야 하고, 한예종을 통해 교육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의 블로그 http://heterosis.tistory.com/ 에도 게재되었습니다.



태그:#한예종, #진중권, #유인촌, #변희재, #피디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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