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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전원일기> 시절이 참 좋았다. 내가 세상 구경하기 전부터 하던 드라마였다. 양촌리 김 회장의 둘째 아들 용식이는 순박한 농촌 청년이었다. 아버지의 농촌 사랑을 따라 곡괭이를 잡고 땀을 흘리던 모습이 늘 정겨웠다. 그가 유인촌이었다. 한국방송 <역사스페셜>의 진행자로 나섰을 때는 진지한 태도로 역사의 굴곡을 두루 살피었다.

 

그런 유인촌이 이명박 정권의 장관이 되었을 때는 조금 씁쓸한 마음도 들었지만, 그래도 좋은 모습 많이 보여주었던 사람이니 '은근한' 정이 가는 게 당연했다. 맨 처음 그에게 질겁했을 때는 국정감사 도중 사진기자들에게 욕설을 뱉은 것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을 때다. "찍지 마, **! 성질이 뻗쳐서..." 그 유명한 '유인촌 욕설 사건'이다. 결국 유인촌 장관은 휴일에 고개를 조아리며 긴급 사과를 했다. 나는 코미디로 웃고 넘겼다. 평생 연기에 살고 연기에 죽던 사람이라 정치판에서 잠시 이성을 잃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예종 사태와 유인촌 장관의 '막말'

 

허나 '양촌리 청년회장' 유인촌이 문화관광부 장관이 된 뒤로 문화계는 쑥밭이 되어가는 것 같아 실망스럽다. 장관 자리에 오르고 얼마 되지 않아 김정헌 한국문화예술위원장과 김윤수 국립현대미술관장 등 단체장, 기관장들의 사퇴 논란이 일었다. 결국 끈질긴 압박에 두 사람은 자리에서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국립오페라합창단은 비용 절감 등의 이유로 해체되었다. 또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위원장 자리에는 강한섭 서울예대 교수가 앉았다. 이른바 '뉴라이트 계열' 사람이다.

 

강한섭 위원장은 독립영화 지원을 줄이고 시네마테크를 공모제로 전환하려 해 반발을 샀고, 급기야 영화 <반두비>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까지 거듭 소음을 부르고 있다. 심지어 오랜 세월 숱하게 썼던 '독립영화'라는 말도 '다양성 영화'로 바꾸고자 한다. 이명박 정부의 행보와 툭하면 '좌파' 낙인이 나오는 요즘 문화계를 보아하니 노무현 정부의 흔적은 물론이고, 문화계 진보 인사들을 표적 삼아 몽땅 물갈이할 속셈이라 하지 않을 도리 없다.

 

이번에 터진 '한예종 사태'는 물갈이의 마침표라 생각된다. 문화관광부는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을 두고 고강도 행정감사를 벌였다. 그리고 지난 5월 18일, 문화관광부는 한예종에 이론학과 축소, 전공 무관 교수 초빙, 통섭 교육 중단과 연관 교수 중징계, 서사창작과 폐지 처분을 내렸다. 이명박 정부는 백날 '학교 자율화'를 부르짖었지만 어쩐 일인지 이번만은 예외가 되었다. 함께 '자율화' 노래를 부르던 사립대학들도 입을 꾹 다물 뿐이다.

 

고등학교에서도 강조하는 융합교육, 대학에선 안 돼?

 

총장 황지우 시인은 벌써 학교를 떠났다. 당연히 한예종 교수, 학생, 학부모들의 반발이 일어났다. 참혹한 블랙코미디가 벌어진 것이 이때다. 5월 22일, 감사 결과에 반대하며 문화관광부 앞에서 1인시위를 하던 학생에게 유인촌 장관이 보인 태도는 불손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이 모습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려도 된다고 당당하게 말하기까지 했다. 끝이 아니었다. 이어 지난 3일, 역시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학부모에게 유인촌 장관은 "학부모를 왜 이렇게 세뇌를 시켰지?"라며 막말을 뱉었다. 보는 사람 혼백이 쑥 빠질 만한 '명장면'이었다.

 

얼씨구나, 보수진영에서는 한예종을 '좌파 강습소'라 손가락질을 한다. 언제나 '자유'를 외치는 투사들이지만 '좌파'에게는 자유를 주고 싶지 않나 보다. 문화관광부의 예산지원은 벌써 예전에 중단됐다. 논란의 핵심이 된 통섭교육이란 예술과 인문학, 과학기술이 서로 소통하는 융합 교육으로 전인적 예술인을 양성한다는 취지다. 당장 고등학교 교과서만 봐도 '간학문적 관점'을 강조하니 박수를 쳐야 마땅할 일이다.

 

허나 유인촌 장관은 예술 실기 전문가 양성이란 한예종의 취지와 맞지 않는다며 중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또한 문화계 보수 인사들과 보수언론은 통섭교육이 좌파 세력의 자리를 만들어주려는 구실이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황지우 총장의 사퇴를 두고서 신재민 문화부 1차관은 "황지우 총장이 현 정권을 지지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 않냐"며 실언을 넘어 망언 수준의 말을 했다. 마치 옛날 독일의 나치 정권이 '공산주의자' 낙인을 찍어 정권에 방해되는 인사들을 축출하던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

 

장관님은 누가 세뇌시켰을까

 

이명박 정부의 천박한 문화 정책이야 두말하면 입이 아프지만 유인촌 장관은 마치 청와대가 내려보낸 자객처럼 보인다. 닥치는 대로 '좌파 낙인'을 찍고 목을 치고 있다. 무섭다. 대체 누가 양촌리의 촌부를 청와대의 자객으로 만들었단 말이냐. 순하고 익살맞던 '용식이'가 무척 그러워지는 때다. 유인촌의 추억을 찾아가다 보니, 동영상 코뮨 '유튜브'에 '유인촌의 아이러니'라는 제목으로 지난 <역사스페셜> 시절 영상이 올라 있다.

 

거기서 유인촌은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을 비판하며 "민심을 읽지 못하고 힘으로 누르려고만 했기에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이 최후를 맞이했다"고 힘주어 역설한다. 옛말에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하더니 '이승만과 자유당'을 '이명박과 한나라당'으로 읽기만 하면 당금 현실에 딱 맞는 이야기다. 왕년에 역사 프로그램을 맡아 훌륭하게 해낸 사람이니 필시 역사에 박식할 테다. 그러니 과거의 유인촌과 현재의 유인촌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분명하다. 정말 궁금하다. 장관님은 누가 세뇌시켰을까?


태그:#유인촌, #한국예술종합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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