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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투병중인 김옥이씨(사진 왼쪽)와 박지연씨가 떨리는 서로의 몸을 지탱하며, 근로복지공단 천안지사 앞에서 산재승인을 촉구하고 있다.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투병중인 김옥이씨(사진 왼쪽)와 박지연씨가 떨리는 서로의 몸을 지탱하며, 근로복지공단 천안지사 앞에서 산재승인을 촉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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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살고 싶어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그토록 건강하기만 했던 제 몸이 삼성전자 온양공장에서 온갖 화공약품에 노출돼 병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일만 했습니다. 이보다 더 명백한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저는 더 이상 병원치료를 이어나갈 돈도 없습니다. 산업재해 인정을 받지 못하면 저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나도 억울합니다."

15일(금) 오전 10시 근로복지공단 천안지사에서는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에 걸린 김옥이(40), 박지연(23)씨의 산업재해 인정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자문의 협의회가 열렸다.

삼성백혈병충남대책위 회원 30여 명은 자문협의회에 최후 진술을 위해 들어가는 김옥이, 박지연씨에게 산업재해를 인정하라며, 근로자복지공단 천안지사 앞에서 집회를 가졌다.

같은 시각 평택지사에서도 고 황유미씨(사망당시 23세), 고 이숙영씨(사망당시 30세), 고 황민웅씨(사망당시 31세)의 산업재해 인정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회의가 열린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근로복지공단측은 이들의 백혈병이 업무상 질병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다며 산업안전보건공단에 역학조사를 의뢰했었다. 그래서 지난 3월 역학조사 결과가 근로복지공단으로 넘어올 때까지, 피해 노동자들과 가족들은 산재 신청 이후 길게는 2년, 짧게는 1년을 기다려 왔다.

그런데 근로복지공단은 또 다시 산재 판정을 유보하고 자문의 협의회를 연다고 결정한 것이다. 산업안전보건공단에서 명쾌한 결론을 내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이날 기자는 자문의 협의회장에서 나온 근로복지공단 천안지사장에게 "역학조사결과와 자문의 협의회 결과를 공개할 수 있는가"라고 묻자 천안지사장은 "일일이 답변해 줄 의무가 없다. 말하지 않겠다"고 잘라 말하며 기자와 대화를 피했다.

이날 반올림측의 확인결과 천안지사와 평택지사 모두 산업재해가 아닌 것으로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이들의 백혈병은 업무와 관련이 없는 개인 질병이 돼 버린 것이다.

이에 대해 지역노동계는 아픈 노동자의 치료받을 권리는 외면한 채 유해하고 위험한 작업환경을 제공한 기업에게는 면죄부를 부여하는 처사라며 크게 반발하고 있다.

삼성백혈병충남대책위와 반올림은 노동부, 근로복지공단, 산업안전공단 그리고 삼성을 상대로 노동자 생존권사수를 위한 투쟁을 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삼성대책위,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업무환경"

삼성백혈병 충남대책위원회는 5월15일 근로복지공단 천안지사 앞에서 삼성반도체에 근무하다 백혈병에 걸려 투병중인 근로자들에게 산업재해를 인정하라며 집회를 가졌다.
 삼성백혈병 충남대책위원회는 5월15일 근로복지공단 천안지사 앞에서 삼성반도체에 근무하다 백혈병에 걸려 투병중인 근로자들에게 산업재해를 인정하라며 집회를 가졌다.
ⓒ 이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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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연씨와 김옥이씨의 작업환경에 백혈병의 잠재적 원인물질이 존재하고, 이에 대한 노출 가능성이 존재한다. 가족력이나 기타 개인적인 환경에서는 백혈병 유발 요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박지연씨와 김옥이씨의 급성 골수성 백혈병은 업무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김현주 산업의학전문의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공유정옥 산업의학전문의는 이들의 백혈병에 대해 업무관련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 근거는 산재보험법 시행령 제34조(업무상 질병의 인정기준)에 근거해 ▲작업환경에서 백혈병 유발원인이 발견되었거나, 백혈병 유발원인의 존재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고 ▲근무기간 중 노출된 양이 백혈병을 일으킬 만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고 ▲업무상 노출된 유발원인보다 더 유력한 백혈병의 다른 원인이 없을 경우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또 업무 관련성을 뒷받침하는 간접 사실로 ▲입사할 당시 건강 상태가 양호했다는 사실 ▲가족력 상 백혈병이나 기타 동종 질환 병력이 없다는 사실 ▲근무 당시 작업환경상 유해요인 노출 방지를 위한 안전보건설비가 충분치 않았다는 사실 ▲근무 당시 유해요인 노출이 가중될 만한 방식으로 작업했다는 사실 ▲같은 사업장 안에서 백혈병 및 동종 질환이 발생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산업재해로 인정해야 할 충분한 정황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산재로 인정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본인들의 직위와 실명을 밝히며 구체적 사례를 들어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에서는 역학조사 과정이나 결과, 조사에 관여한 의사들에 대한 모든 자료 제시를 거부하고 있다.

삼성백혈병충남대책위 선춘자 위원장은 "이러한 근거에도 불구하고 근로복지공단이 피해 노동자와 가족들의 고통스러운 기다림을 연장하면서까지 굳이 '자문의 협의회'를 개최하는 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자문의 협의회는 업무 관련성을 판정하는데 결코 적합하지 않은 기구라고 주장했다. 직접 진찰하고 치료하기는커녕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환자에 대해, 현장에 한번 가보기는커녕 웨이퍼가 어떻게 생겼는지, 런이 무엇인지, 유기용제 일사일비(141B)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이, 어떻게 업무 관련성을 판단하냐는 것이다.

당사자에게도 알려주지 않는 역학조사결과

근로복지공단 천안지사 자문의 협의회에서 박지연, 김옥이씨가 최후 진술을 마친 후 회의장을 나오고있다.
 근로복지공단 천안지사 자문의 협의회에서 박지연, 김옥이씨가 최후 진술을 마친 후 회의장을 나오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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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백혈병충남대책위와 반올림은 성명을 통해 근로자복지공단은 피해자인 근로자를 외면하고, 기업체에 면죄부를 주고 있다고 비난했다.
 삼성백혈병충남대책위와 반올림은 성명을 통해 근로자복지공단은 피해자인 근로자를 외면하고, 기업체에 면죄부를 주고 있다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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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누가, 무슨 자료를 가지고, 내 병의 원인에 대해 판단하고 있는지조차도 알려주지 않는다. 역학조사가 공정하게 진행됐다면 공개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역학조사 과정이나 결과를 알고 싶다는 백혈병 당사자들에게조차 알려주지 않고 있다. 이는 명백한 알권리 침해며, 뭔가 떳떳하지 못하다는 반증 아니겠는가."

삼성백혈병충남대책위와 반올림은 지금까지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역학조사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공개되지 않고 있는 점을 지적했다.

아무리 유능한 전문의라 하더라도 몇 시간 만에 서류 몇 장을 읽고 제대로 판단을 내릴 수 있으리라고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이번에 구성된 자문의사들은 업무 관련성에 대해 조사하고 평가해본 적도 없고, 급조해 만들어진 구성원이며, 자문의사들에 대해서도 전혀 공개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로복지공단이 굳이 자문의 협의회를 개최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이유는 삼성반도체 백혈병 피해 노동자들에 대한 산재 판정의 책임을 몇 사람의 전문가들에게 떠넘기려는 얕은 수작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반올림 이종란 노무사는 "오래 전부터 자문의 협의회를 앞세워 산재 불승인을 남발해온 근로복지공단의 횡포에 고통을 겪어온 산재 노동자들이 허다하다. 때문에 우리는 자문의 협의회를 빌미로 피해 노동자와 가족들의 고통을 연장하지 말 것을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수차례 면담을 청하고, 한 달 동안 1인 시위를 하고, 보름 동안 노상 농성을 해왔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은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다"며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

삼성전자 백혈병 피해자 총22명

근로복지공단측은 역학조사와 관련된 어떤 문건도 백혈병피해 당사자들에게조차 공개하지 않고 있어 ‘삼성눈치보기’라는 오명을 자초하고 있다.
 근로복지공단측은 역학조사와 관련된 어떤 문건도 백혈병피해 당사자들에게조차 공개하지 않고 있어 ‘삼성눈치보기’라는 오명을 자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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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복지공단측은 역학조사와 관련된 어떤 문건도 백혈병피해 당사자들에게조차 공개하지 않고 있어 '삼성눈치보기'라는 오명을 자초하고 있다.

2008년 역학조사 보고서(반도체 제조공정 근로자에 대한 건강실태 역학조사, 조사기관: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 따르면 2007년부터 소급해 과거10년간 림프조혈기계암 발생현황은 백혈병 발병 총10명(사망자6명 포함), 백혈병 포함 림프조혈기계암 총 19명이다.

이는 2007년까지 기록이므로, 2008년 이후 발병자는 포함되지 않았다. 2008년 이후에는 반올림에 제보를 준 발병자는 3명이 더 있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 기흥공장 2라인 여성 현장노동자가 2008년 4월 급성백혈병이 발병해 현재 투병중이고, 삼성전자 온양공장 남성 현장노동자 송창호씨는 2009년 9월 비호지킨림프종이 발병해 현재 투병 중이고, 신원을 밝히지 않은 삼성전자 온양공장 여성 현장노동자는 림프종(임파선암)에 걸려 투병 중이다. 따라서 현재까지 삼성전자 혈액암 피해자는 총22명이 파악되고 있다.

백혈병 환자에게 치명적인 타박상을...

근로복지공단 직원에게 떠밀려 화분에 부딪힌 김옥이씨가 어깨통증을 호소하고 있다.
 근로복지공단 직원에게 떠밀려 화분에 부딪힌 김옥이씨가 어깨통증을 호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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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좀 어떻게 해주세요. 나 좀 도와주세요. 아파 죽겠어요. 고통이 너무 심해요."

근로복지공단 천안지사 사무실에서 김옥이씨가 울부짖으며, 주변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백혈병 투병중인 김씨는 이날 산업재해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자문의 협의회에 최후진술을 위해 들어가던 도중 직원들과 몸싸움이 일어났고, 힘에 떠밀려 화분에 어깨를 부딪혔다고 말했다.

삼성백혈병충남대책위 선춘자 위원장과 함께 동행했다는 이유다. 백혈병은 사소한 상처나 충격에도 치명적이라는 점에서 이날 직원들의 행동은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이다.

이날 김옥이씨는 보호자를 동반하지 못했다. 가족들 모두 생업을 이유로 함께 동행해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김씨는 선춘자 위원장을 자신의 보호자로 요청해 회의실로 들어서려는 과정에서 직원들이 제지하며 김씨가 떠밀려 넘어지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선춘자 위원장은 "김옥이씨의 발언을 돕겠다는 것도 아니고, 단지 옆에서 김옥이씨가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도록 보호자 역할을 해주겠다는 것인데 이마저도 저지당했다"고 말했다.

근로복지공단측은 더 이상 저지할 명분을 찾지 못하고 선춘자 위원장의 보호자 역할을 인정했다. 김옥이씨는 이날 최후진술을 마친 후 어깨통증을 호소해 병원으로 후송됐다.

덧붙이는 글 | <충남시사><교차로>에도 송고했습니다.



태그:#삼성백혈병, #산업재해, #근로복지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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