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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목령
▲ 노루귀 단목령
ⓒ 이형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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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9일, 가는 봄이 아쉬워 1박 2일의 짬을 내어 강원도 인제군의 곰배령을 찾았다. 철정을 지나 곧게 뚫린 홍천-인제 간 도로를 버리고, 상남 방향으로 접어든다. 좁고 구부러진 길이지만 한적한 봄길의 정취가 여유롭다. 미산리, 개인리를 거쳐 온 도로와 상남에서 마주친다. 그리고 속사를 넘어 온 31번 도로와 만난 길은 이제 기린면 현리로 향한다.

소양강의 원천이며, 맑고 수려한 내린천을 따라 이어진 길들을 더듬어 방동으로 향한다. 여름이면 보라와 흰색의 도라지꽃과 감자꽃들이 너울지던 산등성이에선 농부들이 부지런히 밭을 갈고 있었다. 팔뚝만한 열목어가 붉은 눈을 식히던 방태산 물골에 물레방아를 걸치고 들어앉았던 너와집 자리에는 이제 기기묘묘한 펜션들이 대신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방동 다리에서 좌측으로 이어진 진동 길로 들어선다. 여기서 곰배령까지는 대략 22㎞ 거리이다. 외나무다리가 간간히 걸려 있던 개울에는 우람한 시멘트 다리들이 가로지르고, 직선으로 뚫린 포장도로는 시원하다 못해 지루하다. 무엇이 이런 산중까지 직선으로 내달리기를 원했을까.

'계집아이들이 조잘대는'듯하다는 내린천의 물줄기를 곁으로 이끌고 구불구불 이어지던 실낱같은 산길이 이제는 길가의 들꽃마저 미처 바라볼 틈도 없이 휙휙 스쳐 지나치고 마는 포도가 되고 말았다. 조침령 터널 입구에서 왼편으로 꺾어들자니 모처럼 만난 흙길이 반갑다. 도심을 버리고 불원천리 먼 길을 찾아 나선 나그네가 바라던 길은 아마 이런 흙길이 아니었을까.

겨우살이가 있는 나무
▲ 나목 겨우살이가 있는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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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안내표지판을 가득 메운 펜션들의 이름 중에서 하루 밤 묵을 숙소를 찾아낸다. 곰배령 자연보호구역 중에서도 거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한옥의 펜션이다. 서둘러 짐을 내려놓고 봄꽃들이 지천이라는 곰배령으로 당장 달려갈 태세로 자동차는 속력을 내어 달려나간다.

서두른 탓인가. 검문소 비스름한 출입구를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치려니, 두 눈을 부릅뜬 험상궂은 표정의 사내가 달려 나온다. 어디를 가느냐, 무엇하러 가느냐는 물음은 거칠기 짝이 없다. 곰배령 일대는 자연보호구역으로 임산물을 무단히 채취할 경우, 벌금 2000만원 징역 7년 이하에 처해진다는 경고를 전하는 목소리는 비장하기만 하다. 그나마 이런 비장함이 있기에 태고의 자연을 지닌 곰배령이 남아 있을 수 있었으리라.

엄청난 규모의 한옥 펜션은 곰배령과 단목령으로 나뉘는 갈림길에 자리잡고 있었다. 서둘러 떠난 길에도 오후 3시를 넘겨 도착한 탓에 짐을 풀기도 전에 서둘러 곰배령으로 향했다. 그때, 펜션의 바깥 주인이라는 사람이 뛰쳐나와 대뜸 '한계령풀'을 볼러 왔느냐고 묻는다. 곰배령 보러 왔다는 말에 그이는 들은 척도 않고 단목령을 둘러보라고 권했다.

권하였다기보다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말에 별 수 없이 생각지도 않은 한계령풀을 보러 단목령으로 발길을 돌렸다. 펜션 주인은 단목령 가는 노정과 주의사항을 반말에 가까운 말투로 전하였다. 그것이 출입 금지된 지역을 드나들기 위한 환경 계도교육인 셈이었다.

단목령을 오르다

단목령
▲ 홀아비 바람꽃 단목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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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겁결에 나선 단목령 길은 조릿대 샛길로 이어졌다. 좁은 길가에는 이따금 넘쳐흐른 물이 질척하니 흘러 발을 적시고, 작은 야생화들이 옹기종기 모여 맞이했다. 무엇보다 개울가에 핀 산벚이 화사하고,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어 있는 주변 산은 아직 벌거벗은 채 임립한 참나무들이 고산의 늦은 봄을 몸으로 일러 주고 있었다. 바야흐로 여름으로 이어지는 녹음이 짙어가는 다른 지역의 숲과는 너무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가장 먼저 푸른 빛의 현호색이 나타나고, 이어서 축축한 물가에 노란 매미나물 꽃들이 탐스럽게 피어 있다. 그리고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서 연자주의 얼레지 꽃이 모습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아름드리 고목 등걸 아래 앙증맞게 핀 홀아비 바람꽃이 아직 쌀쌀한 바람에 처연한 흰 꽃잎들을 쓸쓸히 흩날린다. 바람에 쓰러진 고목들이 길을 가로지르고, 습지에는 매미나물 꽃이 노란나비처럼 떼를 지어 피어 있다. 작은 들꽃들은 어김없이 조릿대 사이로 난 한 폭이 될까 말까한 등산로 가장이에 줄을 지어 피어 있었다. 아마 깊은 숲의 나무 그늘을 헤집어 그 틈새로 스민 볕을 찾아 나선 모양이었다. 얼마 쯤 올랐을까. 약 1.9㎞ 거리의 단목령에 도달한다. 멀리 남설악이 보이고, 조침령으로 향하는 우측 길로 돌아선다.

단목령
▲ 얼레지 단목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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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꽃망울이 맺힌 철쭉들 사이로 단풍이 미처 펼치지 못한 새순을 반짝이고 있다. 어린 아이의 눈꺼풀 같은 솜털에 덮인 새 순은 여느 꽃만큼이나 아름답다. 그런데 등산로 주변이 드문드문 험하게 패어 있다. 얼레지들의 뿌리가 드러나고, 움푹움푹 패인 것이 누군가 약초나 야생화를 캐어간 모양이었다. 그렇게 문 앞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있어도 이 지경이니 한숨부터 나온다.

그렇게 팬 자국은 길을 따라 줄곧 이어진다. 호기심에 한두 뿌리 캐어간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업 삼아 무엇인가를 작정하고 캐어간 흔적이었다. 오르막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걷자니 높이에 따라 피는 꽃들의 종류도 다채롭다. 흡사 어린 노루의 귀처럼 보드라운 솜털이 덮인 노루귀며, 바람에 하늘거리는 여러 종류의 바람꽃들이 잿빛 낙엽들 새로 흰 꽃잎을 내민다. 내 어두운 눈으로 분간하기 어려운 푸르고, 희고, 노란 꽃들이 산의 높이에 따라 떼를 지어 얼굴을 드러낸다. 그것은 거의 천상에 이르는 오솔길이며, 하늘의 정원과 같다.

단목령
▲ 노루귀 단목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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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길은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겠다. '오르다 보면 단목령이 나오고, 거기서 왼편으로 가면 습지가 나오니 그 개울을 따라 내려오라'는 아주 '간단하고도 명확한' 숙소 주인장의 설명에 의하자면 벌써 습지로 내려서야 할 시간이었다. 유난히 짧은 것이 산중의 해이며, 깎아지른 산에 해가 넘어 가면 바로 밤이 찾아오는 것이 강원도의 산중임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걸음이 나도 모르게 조급해졌다.

산등성이를 오르니 멀리 한계령이 보이고, 양양과 아련한 동해도 보인다. 간간히 꽂혀 있는 이정표는 조침령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러다가 조침령을 넘어 양양으로 가는 게 아닐까. 내친 김에 동해 바닷가에 가서 회나 한 접시 먹고 오자는 농담을 했지만, 덜커덕 산중에서 밤을 새워야 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북암령으로 내려오다

단목령
▲ 한계령풀 단목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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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에 익숙한 일행이 산세를 살피더니 지금 가는 길이 숙소로 돌아가는 방향이 맞다고 단언한다. 이정표는 점점 조침령 쪽으로 길을 좁히고, 곰배령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온 길을 되짚어 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듯했지만 앞선 분의 걸음이 워낙 단호하여 말없이 따를 뿐이었다. 꽃에 홀려 한번쯤 길을 잃어 보는 것도 매혹적인 일이었다.

이미 돌아가기에 멀어진 곳에 이르니 마음은 오히려 태평해졌다. 가랑잎 덮고 하룻밤을 산중에서 지낼 각오를 하고 앞선이를 따라 걸을 뿐이다. 얼마쯤 지나니 누군가 한계령풀이라고 소리친다. 숙소 주인이 말하던 한계령풀이 떼를 지어 나타난다. 흡사 노란 달맞이꽃을 닮은 듯한 한계령풀을 보니, 제대로 길을 찾은 기분이다. 고도 1000미터가 넘는 고산지대에 자란다는 한계령풀은 주로 백두산과 만주지역에 분포되어 있다고 하는 희귀식물이란다.

한계령풀 군락지 부근에는 각이 진 바위가 많았는데, 누군가 다듬어 놓은 듯 각이 살아있고 면이 평평하니 고른 바위들이 듬성듬성 모여 있어 마치 선사시대 유적지나 고인돌의 흔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단목령
▲ 노루귀 단목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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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따라 험하게 파 헤쳐진 흔적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문득 사람의 소행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극성맞은 장사꾼이라 해도 이렇게 긴 거리를 쉬지 않고 땅을 파헤칠 기력은 없으리라는 짐작이 들었다. 문득 엄니가 기다란 멧돼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이리저리 파헤쳐진 땅의 모습을 살피니 삽으로 깊게 판 구멍 같은 것도 있지만 이리저리 쟁기로 민 듯 골이 파진 모습이 멧돼지가 주둥이나 엄니로 파헤친 자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깊은 산중에서 그런 멧돼지와 마주친다면 어찌 될까 생각하니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단목령
▲ 고목과 신록 단목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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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은 내리막으로 이어졌다. 얼마를 내려오니 거짓말처럼 표석 하나가 나타났다. 북암령이라고 적힌 표석 곁에는 이정표가 걸려 있었다. 누군가 가필을 하여 그어 놓은 등정로는 설피마을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길을 따라 얼마를 내려오니 정말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손과 얼굴을 씻고 잠시 땀을 식힌다.

단목령으로 오를 때는 힘이 들었는데, 북암령에서 내려오는 길은 수월하고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물줄기를 따라 얼마를 내려오니, 어느 민박집 마당으로 이어진다. 마당에는 중부지방에서는 벌써 진 지가 오래인 개나리가 한창으로 피어 있었다.

힘은 들었지만 생각지도 않은 단목령을 오르고, 한계령풀이라는 희귀한 꽃도 만난 뜻깊은 산행이었다. 대강 걸어온 거리를 추정해 보니, 8㎞ 정도 되었다. 여유 있게 꽃구경을 하면서 걸어 네 시간 가량 걸렸다. 언제고 여유 있는 일정으로 단목령에서 조침령을 넘어 동해로 걷고 싶었다. 우선은 내일 일찍 일어나 곰배령부터 오르기로 했다.


태그:#단목령, #곰배령, #바람꽃, #한계령풀, #노루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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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면 광대울에서, 텃밭을 일구며 틈이 나면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http://sigo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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