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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가 제 손에 들어온 지 14년입니다. 대학 1학년이던 94년 무렵은 삐삐의 전성시대였습니다. 새로운 기계 문명에 어두웠던 한 형이 강의 중 삐삐가 자꾸 울리자 진동으로 바꾸라는 교수님의 꾸지람을 듣고, 가입한 지 얼마 안 된 삐삐를 들고 가맹점을 찾아가 벨소리가 울리는 게 아니라 진동으로 되는 삐삐로 바꿔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정겨운 추억담이 되었을 만큼 시간이 흘렀습니다.

14년 동안 휴대전화를 사용하면서 네 번 기계를 바꿨습니다. 보통 물건을 사용하면 오래도록 쓰는 성격인지라, 또 그런 것을 미덕으로 배우고 자란 세대라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장 나기 전에 바꾼 적이 없었으니, 새로운 디자인과 기능으로 끊임없이 새 것으로 갈아탈 것을 강요하는 시대에는 한참 뒤떨어진 사람입니다.

가장 짧게 썼을 때가 첫째 아이를 낳아 기르던 시기였습니다. 그 때 쓰던 휴대전화는 두 종류의 '침수'를 당했는데 하나는 아이가 하도 빨아서 아이의 침으로 당한 침수이고, 또 하나는 잠시 욕실에 둔 것을 아이가 물 속에 넣어 버린 침수 사건입니다. 그래서 둘째 아이를 기를 때는 휴대전화 단도리를 잘 했습니다. 아이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두기 위해 노력한 것이지요. 그것이 아이의 건강에도 좋다는 믿음도 한 몫 했습니다.

휴대전화 액정이 깨졌다. 3년 동안 쓰던 놈인데, 이를 고칠 것인가 아니면 공짜폰으로 갈아 탈 것인가, 아니면 이 걸 기회로 아예 휴대전화를 없앨 것인가?
▲ 충격으로 깨진 액정 휴대전화 액정이 깨졌다. 3년 동안 쓰던 놈인데, 이를 고칠 것인가 아니면 공짜폰으로 갈아 탈 것인가, 아니면 이 걸 기회로 아예 휴대전화를 없앨 것인가?
ⓒ 한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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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지난 주 어느 날 멀쩡하던 휴대 전화 액정이 깨진 걸 발견했습니다. 3년 동안 쓰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 기사를 읽지 않았더라면 '아니, 액정 깨지면 새로 사는 게 낫지?'하며 공짜폰을 찾아 인터넷이나 거리를 헤맸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기사를 읽은 것이 저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내 휴대전화가, 내가 쓰는 노트북이, 내가 쓰는 모든 전자제품들이 아프리카 굶주린 아이들을 유독가스로 가득 찬 벌판으로 내몰고 있다니.

주변에 2009년을 맞으며 작심하고 휴대전화 생활을 청산한 친구들이 있습니다. 수첩 가득 주소를 적어 다니며 전화카드와 동전을 챙기며 다니는 친구들입니다. 한편으로 자유로워 보이면서도 한편으로 미리 연락하고, 미리 확인해야 하는 꼼꼼함을 발휘해야 하는 '책임감'에 '아직, 내 몫은 아니지'하며 옆으로 밀쳐두었던 그 과제가 생각났습니다. '이번 휴대 전화기를 마지막으로 하자'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액정 화면만 보이지 않을 뿐 멀쩡하게 울리는 전화 벨소리를 들으며, 상대방의 전화 번호와 수시로 울리는 문자 메시지 도착 알림 소리를 확인하지 못하는 것이 어찌나 답답하던지요. 휴대전화 서비스 센터에 전화해서 액정 수리 비용을 물었습니다. 4만 1천원 정도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품을 써서 프린터 수명을 길게 할 것인가? 재생 토너를 쓸 것인가? 정품으로 칼라 토너 네 가지를 한 번씩 갈 돈이면 새 프린터를 살 수 있다. 난 정품을 사서 쓰고, 폐카트리지를 생산 회사로 돌려주고 있다.
▲ 나를 갈등하게 하는 프린터 토너 정품을 써서 프린터 수명을 길게 할 것인가? 재생 토너를 쓸 것인가? 정품으로 칼라 토너 네 가지를 한 번씩 갈 돈이면 새 프린터를 살 수 있다. 난 정품을 사서 쓰고, 폐카트리지를 생산 회사로 돌려주고 있다.
ⓒ 한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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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걸 기회로 휴대전화를 끊고 살 것인가 액정만 고쳐서 더 사용할 것인가?'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남편은 필요할 때 자기 전화기를 쓰면 되니, 끊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함께 일하는 친구들에게 물었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여기 저기 답사나 기행을 다닐 일이 많으니 조금 힘들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어제, 퇴근 후에 휴대전화 서비스 센터를 찾아가 20분 만에 4만 1천원을 주고 액정을 고쳤습니다. 1년간 무상 서비스 기간이니 다시 깨질 경우 무상으로 수리를 받을 수 있는 '빈말(1년 이내 깨지거나 고장 날 확률을 생각할 때)'을 들었습니다.

휴대전화 없이 사는 불편과 자유함을 동시에 누릴 용기가 없다면, 그럼에도 검은 재앙에 죽어가고 있는 아이들의 검은 눈동자가 떠오른다면 이런 '비겁한 방법'도 있습니다. 고장날 때까지 물건 하나 사서 오래도록 쓰는 일입니다.


태그:#휴대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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