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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봉화에 남아있는 정자는 모두 90여개에 이른다. 
이 중 봉화읍과 법전면에 40여개의 정자가 군집해있다.
 현재 봉화에 남아있는 정자는 모두 90여개에 이른다. 이 중 봉화읍과 법전면에 40여개의 정자가 군집해있다.
ⓒ 김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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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의 정자는 봉화읍과 법전면을 중심으로 군집되어 있다. 이렇게 정자가 집단적인 군을 이루고 있는 까닭은 집성촌을 중심으로 정자가 지어졌기 때문이다. 봉화읍의 정자가 닭실마을을 중심으로, 법전면의 정자가 만산고택을 중심으로 모여있는 것은 이러한 까닭이다. 봉화의 정자가 기본적으로 주거와 결합된 형태를 띠고 있다는 설명은 지난 편에서 언급하였다.

경북 봉화군 봉화읍에서 36번 도로를 따라 자동차로 20여 분을 달리면 법전면에 도착한다. 이 조그만 면 단위 마을에만 20여 개의 정자가 모여있다고 하니 가히 정자의 고장이라고 할만하다.

그러나 이 중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정자는 사미정, 사덕정, 한수정 정도다. 이외의 정자는 대부분 문화재 지정이 안돼 개인차원에서 보존하고 있었는데, 그러다보니 관리가 제대로 안된 채 방치된 경우도 많았다.

추사 김정희의 친필이 걸린 경체정

앞의 어열개 문을 들어올리면 대청마루로 활용할 수 있다.
오른쪽에 있는 예서체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친필
 앞의 어열개 문을 들어올리면 대청마루로 활용할 수 있다. 오른쪽에 있는 예서체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친필
ⓒ 김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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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전면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만날 수 있는 곳은 경체정이다. 경체정은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비교적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정자 앞이 크게 훼손된 모습. 근처에 연못이 있으나 예전부터 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정자 앞이 크게 훼손된 모습. 근처에 연못이 있으나 예전부터 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 김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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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체정은 크기가 단출하여 왜소하게 보인다. 산을 배경으로 주위의 고목들에게 둘러싸여 보호받는 느낌도 든다. 경체정은 특이하게도 정자의 삼면에 현판이 가득 붙어있었다. 오른쪽에 위치한 예서체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친필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정자를 받히고 있는 기둥마다 시구를 적은 까만 편액들이 인상깊게 붙어있다.

경체정의 이름은 시경 소아(小雅)편에서 따왔다고 한다. 형제의 우애를 그린 구절과 연회의 기쁨을 노래한 글에서 두 자를 취하였다고 정자 기문에서 밝히고 있다. 남다른 우애의 주인공은 강완, 강한, 강윤 3형제이다. 병자호란의 굴욕적 화친에 반대하여 봉화로 은거한 강흡의 고손자들이다.

경체정은 읍의 구석자리에 위치하고 있는데다가 앞에 생활하수가 흐르고 있지만 이전의 경체정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비록 정자의 크기는 작으나 정자 가득 걸려있는 현판과 편액을 보며, 기개를 굽히지 않는 선비의 당당한 느낌마저 느낄 수 있었다.

전주 이씨 종가의 자부심, 사덕정

사적정과 바로 옆 한산군종택 대문. 전통건축물과 새로 지어진 대문의 조화가 절묘하였다.
 사적정과 바로 옆 한산군종택 대문. 전통건축물과 새로 지어진 대문의 조화가 절묘하였다.
ⓒ 김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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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체정을 지나 '시드물'이라는 다소 낯선 이름의 마을로 들어가면 사덕정이 보인다. 도착하니, 사덕정 앞 연목 너머 할머니께서 식물을 매만지며 잡초를 뽑고 계셨다. 사덕정 바로 옆으로는 한산군종택(韓山軍宗宅)이라고 써있는 신식 한옥대문이 보인다.

서울에서 낯선 이가 방문하니 할머니께서는 놀라면서도 반가워하시는 기색이 역력하셨다. 사덕정에 관해서 이것저것 여쭤보고 사진도 찍고 있는 동안에 주인 할아버지도 만날 수 있었다. 얼마 전에도 사학과 교수, 학생들이 사덕정을 보러 왔다며 찬찬히 둘러보라고 손짓하신다.

사덕정은 외관 상 매우 폐쇄적인 공간으로 보인다. 하지만 마루 전면에 어열개 문을 달아 필요에 따라 방을 확장시킬 수도 있고 마루를 확장시킬 수도 있다. 정자 뒷편에는 아궁이가 두 개 있었는데 최근까지도 불을 땐 흔적이 있었다. 사덕정을 ㄷ자로 둘러싼 담벼락은 마치 조각보 같아 소박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사덕정이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다고 감탄하자 할아버지께서는 사덕정 옆 영모당과 위패를 모신 곳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주셨다. 먼 곳에서 온 객이라며 차를 대접해주시는 모습에서 시골의 정을 듬뿍 담아올 수 있었다.

쪽빛 계곡, 가파른 산기슭에 사미정

사미정은 현존하는 정자 중에 가장 오래된 것으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사미정 앞 굽이 돌아 흐르는 계곡물은 옛적에는 그 물의 깊이를 알 수 없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수위가 얕아졌다. 하얀 반석이 아름다워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는 이 곳은 정자의 이름을 붙여 사미정 계곡이라 한다.

사미정을 파노라마로 찍어본 모습. 넓어보이지만 사실은 굉장히 작은 정자이다
 사미정을 파노라마로 찍어본 모습. 넓어보이지만 사실은 굉장히 작은 정자이다
ⓒ 김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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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미(四未)는 부자유친, 군신유의, 붕우유신, 형우제공을 뜻하는 말이다. 옥천 조덕인이 사미를 지키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학문에 더욱 정진하다는 의미에서 사미정을 지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정미년, 정미월, 정미일, 정미시에 맞춰 정자를 지으라 하여 정미가 4개 겹쳤다는 뜻으로 사미라고 했다고도 전해진다.

풀이 무성하여 입구를 찾기 어려웠다(왼), 사람이 살았는지 전기계기판이 달려있는 모습(오른)
 풀이 무성하여 입구를 찾기 어려웠다(왼), 사람이 살았는지 전기계기판이 달려있는 모습(오른)
ⓒ 김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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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에 걸맞는 선비의 정신과 아름다운 풍경을 기대하고 방문한 사미정을 보고는 실망감을 감출 길이 없었다.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사미정의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문화적 가치가 높은 정자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풀이 무성하고 사람이 거주했던 흔적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파른 산기슭에 어떻게 정자를 지었는지 선조들의 건축기술에 다시 한번 감탄하였다. 사미정에서 공부를 하며 가끔 쪽빛 계곡물 바라보고 있노라면 세상근심을 다 잊었을 것 같다. 후손들이 이런 문화적 가치가 있는 전통건축물을 잘 보살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워낭소리의 소와 봉화의 정자는 닮은꼴

옥계정(오른)과 옥천정사(왼)의 모습. 비록 사람의 손길이 닿지는 않아 여기저기 낡고 바스라졌지만 이 마저 세월의 흔적으로 승화시키는 봉화 정자들
 옥계정(오른)과 옥천정사(왼)의 모습. 비록 사람의 손길이 닿지는 않아 여기저기 낡고 바스라졌지만 이 마저 세월의 흔적으로 승화시키는 봉화 정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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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경체정, 사덕정, 사미정 말고도 옥계정, 옥천정사, 매계정, 이오당을 더 둘러보았다. 하지만 정자 바로 앞에 하수도가 있거나 주변에 시멘트 주택에 빼곡히 쌓여 정자가 어디 있는지 헤매는 경우도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주변 풍광은 바뀌었지만 정자들은 자신들의 세월을 잊지 않으려는 듯 꿋꿋이 제 자리를 지켜오고 있었다.

그제서야 얼마 전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던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가 바로 이 곳, 봉화에서 촬영되었다는 게 생각났다.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오직 변함없이 자신의 자리를 지켜 온 워낭소리의 소와 세월의 풍파를 몸에 새기며 노쇠하였으나 묵묵히 같은 자리에서 남아있는 봉화의 정자. 워낭소리의 소와 봉화의 정자는 서로 닮은꼴임을 느끼니 마음 한편이 시리다.

워낭소리와 봉화의 정자는 잊혀져 가는 것들에 대한 감동과 여운을 전해준다
 워낭소리와 봉화의 정자는 잊혀져 가는 것들에 대한 감동과 여운을 전해준다
ⓒ 스튜디오느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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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워낭소리'가 우리에게 전해주었던 것은 잊혀져 가는 것들에 대한 경외와 감동이었다. 봉화의 정자도 이 곳을 찾는 이에게 '워낭소리'가 주는 잔잔한 감동과 여운을 안겨준다. 그렇게 어느 화창한 봄날, 방문한 봉화의 정자는 진한 삶의 흔적을 끌어안은 채 다시 시간 속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태그:#봉화 정자, #사덕정, #사미정, #경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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