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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집짓기라는 내 인생 최대(?)의 화두를 품고 시작한 한 해가 어느덧 중반을 향해 가고 있다. 지난 3월 31일 착공 이후 한 달 만에 오매불망 상량을 하고 이제 지붕작업에 들어가고 있다. 아직 집짓기의 절반도 이루지 못했지만 지나간 시간들이 봄날 한바탕 꿈인 듯하다. 

다락방 상량을 마친 후 아내와 목수들이 환히 웃음을 짓고 있다
▲ 상량기념 다락방 상량을 마친 후 아내와 목수들이 환히 웃음을 짓고 있다
ⓒ 이종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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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집도 제대로 못 짓는 내가 선택한 직영 집짓기

집은 지어야 하는데 어떻게 지을 것인가? 개집 하나 짓는 데 하루 종일 끙끙대는 나의 실력으로 사람 사는 집을 혼자 짓기는 너무 무리가 있다 싶어 직영 방식을 택했다. 직영은 목수들에게 평당 금액을 책정해 공사 전체를 넘기는 도급이 아니라 목수를 고용해 집주인이 직접 집짓기를 지휘, 감독하는 경우를 말한다.

직영은 사실 건축주가 집짓기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있어야 하는데 내가 갖고 있는 지식은 집짓기 관련 책 몇 권 본 것이 전부였다. 생각 같아선 나와 아내 둘이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집짓기에 도전하고 싶었지만 가족의 생명이 달린 일이라 내 맘대로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돈 없고 집짓기 능력 없는 건축주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합리적 방안이 직영이었다.

어떤 목수를 구하느냐가 직영 집짓기의 가장 중요한 관건이었다. 귀농자 모임에서 경량목구조 집을 짓는 젊은 목수가 제안을 받아들였고, 일당도 귀농자의 처지를 감안해 통상 금액보다 낮게 책정하는 배려까지 해주었다. 돈 없는 나로선 정말 고마운 제안이었으나 1월부터 공사 일정과 자재문제 등을 논의하면서 시작된 집짓기의 전초작업은 시작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미 다른 지역의 집짓기를 제안 받은 목수가 가능하면 2, 3월안에 양쪽 기초공사를 마무리 지으려고 했지만 토목작업에 혼선이 생기면서 우리 집 일정도 덩달아 오락가락하기 시작한 것. 그러기를 수차례, 결국은 물리적으로 양쪽 집짓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목수의 사정 고백으로 두 달을 끌어온 집짓기 논의가 결국 목수의 교체라는 결과로 나타나고 말았다. 고의성도 아니고 상황변수에 따른 일이라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미 시간은 3월 초, 같이 일을 할 도목수를 다시 구해야 하는 일이 발등의 불로 떨어진 것이다. 다행히 귀농자 중에 나무 흙집 짓는 목수가 있어 긴급 제안을 했고, 흔쾌히 수락한 목수와 새로이 집짓기에 대해 논의하게 되었다. 목수가 바뀌면서 당초의 경량목구조 황토벽돌집에서 통나무귀틀황토벽돌집으로 골조가 변경되었고 설계도 또한 귀틀집에 맞게 다소 바꿔질 수밖에 없었다. 애써가며 실제 우리집 설계 해주느라 많은 수고를 해 준 이웃마을의 귀농자에게 미안할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소망하던 논을 임대해 포도밭 조성에 근 한 달을 보내고 우여곡절 끝에 3월 31일 집짓기의 첫 삽을 뜰 수 있었다.    

트렉터로 대들보를 올리고 있다
▲ 상량작업 트렉터로 대들보를 올리고 있다
ⓒ 이종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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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도움으로 큰 힘 얻어,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집을 짓다

귀농 3년 차에 조그만 땅을 사고 마침내 집을 짓게 된 나로서는 사실 감개무량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귀농을 결심할 때부터 가족들에게 이렇게 다짐을 했다.

"2년간은 땅과 집 빌려서 농사짓고 살다가 3년차부턴 어떤 형태든 정착의 뿌리를 내릴 것이다."

현실은 나의 계획대로 움직여졌고 귀농 3년 만에 나의 땅에 집을 짓게 된 것이다. 그동안 많은 어려움도 겪었지만 집을 짓기까지 주변 분들의 도움이 있었고, 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집을 짓고 있다. 특히 각자 스스로 집을 한 채씩 지어 본 경험이 있는 귀농자들의 모임은 아주 구체적인 도움을 주고 있어 늦둥이 집짓는 나로서는 복에 겨울 뿐이다.

얼마 전 마침내 상량이라는 단어를 내 삶에서 구체화시켰다. 집짓기의 골격이 완성된 것이다. 요즘은 통상 크레인으로 편하게 상량을 하지만 집짓는 데 한 푼이라도 아끼라는 마을 형님이 직접 트렉터로 대들보를 올려주었다. 덕분에 거금(?)은 절약했지만 대들보 올리느라 몸 고생한 목수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바람결에 들리기도 했다.

귀농 전후 다른 귀농자들이 집을 지으면서 상량식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언제나 저런 집을 짓고 상량식이라는 것을 해볼까' 오매불망했는데 내게도 그런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다만 독실한 기독교인 아내와 어머니의 반대로 전통상량식은 생략하고 음식을 해서 지인들과 상량의 기쁨을 나누는 시간을 가진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한글로 쓰여진 대들보가 올라가고 있다
▲ 대들보 한글로 쓰여진 대들보가 올라가고 있다
ⓒ 이종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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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들보의 상량 문구는 졸필인 내가 직접 썼는데 아내의 요청으로 '범사에 감사하라'와 '2009년 4월 28일 힘을 모아 보를 올리다'라는 문구를 써서 대들보를 올렸다. 상량문은 글씨 잘 쓰는 동네 분에게 부탁하라는 권유도 있었지만 집주인인 내가 직접 쓰는 자체가 의미 있을 것 같았다.

다음날 동네 할아버지 한 분이 오셔서 대들보를 보더니 " 이게 어느 나라 상량문이야?"라며 혀를 차시기에 아이들이 보고 알 수 있도록 한글로 풀어 썼다고 구구절절 설명을 드려야 했다.

집을 짓는 것도 결국 삶의 행복을 찾기 위한 길

도목수 1명으로 시작한 집짓기는 낮은 노임이지만 봉사하는 마음으로 일하겠다는 후배 귀농자 2명이 합류하면서 예정보다 훨씬 더 속도를 내고 있다. 그래도 집짓는 일이 농사보다 더 힘 드는 일임은 분명한 것 같다. 아내는 목수 포함 5~6명의 식사를 하루 세끼 꼬박 챙겨야하는 함바식당 사장(?)이 되었고 나는 온갖 잡일에다 자재구입, 작업현황 총감독을 맡아야 하는 건축주로서 하루해가 너무 짧아요를 외치고 있다.

집짓는 현장 보러 온 사람마다 한마디씩 훈수를 두면 건축주의 마음은 또 갸우뚱해지고 목수의 표정은 굳어진다. 시시각각 변하는 공사 일정과 자재 변동에 따라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즐거운 집짓기가 아니라 집짓다 열 받아 10년은 늙는다는 말이 허투로 들리지 않는다. 오래 끌어봤자 사람만 지친다는 주변 경험자들의 충고가 이제 겨우 한 달 넘긴 지금 까맣게 탄 얼굴에 새록새록 와 닿는 것 같다.

주변에는 혼자서도 집을 짓고 1년 이상 씩 천천히 집을 짓는 사람들도 많지만 내 경우 적당하게 집짓고 농사의 자립기반을 마련하는 일이 더 급선무라고 생각된다.

이미 생각한 예산의 절반이 지출되고 앞으로 추가로 들어가야 할 비용을 생각하면 걱정도 태산이지만 즐거운 집짓기를 위해 매일 매일 내 스스로를 다잡아 본다. 집짓기도 결국은 삶의 행복을 찾아가는 길이거늘 길가다가 행복을 버릴 수는 없기에 말이다.


태그:#집짓기, #상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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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찬 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을 존경하고 깨어있는 농부가 되려고 노력중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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