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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이 생기게 된 배경과 유래

내일은 제87회 어린이날이다. 1923년 5월 1일, 색동회를 중심으로 방정환 외 8명이 어린이날을 공포하고 기념행사를 치렀던 것이 어린이날의 시원(始原)이다. "미래 사회의 주역인 어린이들이 티없이 맑고 바르며, 슬기롭고 씩씩하게 자라날 수 있도록 어린이 사랑 정신을 함양하고,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자" 만든 것이다.

새삼스럽지만, 소파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날을 만든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본다. 나 어렸을 때만 해도 어린이도 엄연한 하나의 노동력이었다. 새벽에 눈뜨자마자 닭 모이를 주고 나면 소나 돼지를 먹일 꼴을 베러 다녀와야 하고 또 베어온 꼴을 가마솥에다 집어넣고서 쇠죽을 쑤고 난 다음에는 마당까지 쓸어야 했다. 이것이 아침밥 먹기까지의 통상적인 일과였다.

또 학교 갔다 돌아오면 어머니·아버지 일을 돕거나 산에 나무하러 가야 했다. 그러고 나서 시간이 남으면 그제야 공부를 하고 숙제를 해야 했으니 도무지 쉴 짬이 없었다. 물론 각자 처한 위치나 사는 곳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처럼 시골에서 살았던 아이들에겐 대동소이한 일과라 할 수 있다.

일이 고달픈 건 그래도 견딜 만했다. 어렸을 적 우리 마을 아저씨들 가운데 제대로 자기가 해야 할 몫의 농사일을 제대로 하고서 노는 사람은 채 절반도 되지 않았다. 농사일은 으레 여자들 차지였다. 끄떡하면 어디 가서 잔뜩 술이나 퍼마시고 와서 아이들에게나 아내에게 작대기를 휘두르거나 술주정을 하기 일쑤였다. 또 먹을 것 없는 가난한 집에 태어나 숟가락 수나 늘리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친구들도 종종 목격할 수 있었다.

어디에선가 읽었던 소설가 김훈의 글이 생각난다. 아마도 그의 아버지는 술 주정뱅이였던 모양이다. 그의 아버지는 새벽 4시, 통금 시간이 해제되는 때를 기다렸다가 10리쯤 떨어진 주막에 가서 막걸리를 받아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고 한다.

그 시절 어른들은 막걸리를 차게 마시지 않았다. 막걸리가 차면 양은 주전자에다 따끈하게 데워 마셨다. 그도 막걸리를 그냥 받아오는 게 아니라 막걸리 가게에서 아예 데워 달라고 해서 받아 왔던가 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막걸리를 엎질러 결국 허벅지를 데고 말았다. 그리하여 지금도 자신의 허벅지에 뜨거운 막걸리에 덴 흉터가 남아 있다는 것. 그때의 참담한 기억 때문에 김훈 자신은 지금도 술을 전혀 입에 대지 않는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김훈의 이야기는 결코 특수한 경우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 중년 이상의 아주머니들 가운데는 아버지에 대해 애증을 가진 분들이 적지 않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제 나이도 들었으니 그만 아버지를 이해해야겠는데 심정적으론 아직도 선뜻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훨씬 앞선 궁핍한 식민지 시대의 어린이들은 얼마나 가련하고 고달픈 생활을 했으랴.

그래도 어린이보다 더 사랑스러운 존재는 없다

이 세상에 아이들보다 더 사랑스럽고 소중한 존재는 없다.
 이 세상에 아이들보다 더 사랑스럽고 소중한 존재는 없다.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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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늘의 어린이는 제왕이다, 어린이날이 돌아오면 어른들은 여간 골치가 아픈 게 아니다. 선물 대령하랴 모시고 행차할 곳 알아보랴. 이만저만 고민스럽고 고역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모든 분야에서 민주화되고 있지만 이 어린 제왕들의 횡포만은 어쩌지 못할 마지막 성역으로 남아있다. 그 횡포가 고쳐지기는커녕 점점 더 극심해지고 있는 형편이다. 내가 보기에 참으로 '간 큰 남자'는 아내의 말을 거역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녀의 말을 거역하는 아버지가 진짜 '간 큰 남자'인 것이다.

이 어린 제왕들은 너무 버릇이 없다. 어버이가 숟가락을 들기도 전에 제 숟갈 먼저 추켜 든다. 좀 맛있는 음식은 행여 엄마·아빠 맛볼세라 부리나케 먹어 치운다. 아침에 제 이부자리 개는 아이도 없다. 그저 일어나서 밥 먹고 학교에 가주는 것만도 고마운 처지다. 일일이 예를 들기가 민망할 만큼 그 행패가 극심하다. 방정환 선생이 중심이 된 색동회가 어린이 날을 제정할 당시만 해도 어린이는 분명히 사회적 약자였다. 그러나 이제 어린이는 어느새 막강한 제왕이 되어 있다.

그러나 앞에 열거한 갖가지 악덕(?)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보다 더 사랑스럽고 귀여운 존재는 이 세상에 없다. 제왕의 횡포는 용서 못할 정도는 아니다. 아이들이 이 세상에 없다면 사람 사는 낙이 어디 있겠는가. 

수많은 시인이 사랑스러운 존재인 아이들에 대해 기꺼이 노래했다. 푸릇푸릇 자라는 아이들의 풋풋함을 노래하는 김용택의 시 '보리 같은 아이들아' 등 희망에 찬 시편들, 조은의 시 '아이 하나가 자라고 있다'나 황동규의 '우리는 수상한 아이들', 그리고 김기택의 '매맞는 아이', 작고한 기형도의 '아이야 어디서 너는' 같은 힘겹고 안타까운 삶을 이어가는 아이를 노래한 시편들, 이성부 시 '유배시집(流配詩集) 9 -정희량이 아이들에게'처럼 이렇게 자라주었으면 하고 아이들에게 당부하는 시편 등등.

시집 표지
 시집 표지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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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운데서 아이들의 사랑스러움을 노래한 천양희 시인의 시 '한 아이'를 읽어보기로 한다.   

시냇물에 빠진 구름 하나 꺼내려다
한 아이 구름 위에 앉아 있는
송사리떼 보았지요
화르르 흩어지는 구름떼들 재잘대며
물장구치며 노는 어린 것들
샛강에서 놀러온 물총새 같았지요
세상의 모든 작은 것들, 새끼들
풀빛인지 새소린지 무슨 초롱꽃인지
뭐라고 뭐라고 쟁쟁거렸지요

무엇이 세상에서
이렇게 오래 눈부실까요?
            - 천양희 시 '한 아이' 전문

천양희 시인은 1942년 부산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 <사람 그리운 도시>, <하루치의 희망>, <마음의 수수밭>, <오래된 골목> 등이 있다.

천양희 시인은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분노와 투쟁이 아니라 연민과 관용으로 바라보는 모성의 눈으로 시를 쓴다. 그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어느새 마음이 따스해지는 이유다. 시 '한 아이'는 시집 <오래된 골목>에 실린 시다.

한 아이가 시냇가에 서 있다. 아이는 구름이 흘러가는 시내물에서 송사리떼가 "물장구치며 노는" 것을 본다. 그 송사리들은 "샛강에서 놀러온 물총새 같"기도 하고 "풀빛인지 새소린지 무슨 초롱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세상의 모든 작은 것들, 새끼들"은 너무나 눈부신 생명이다. 마침내 시인은 이렇게 반문한다. "무엇이 세상에서/ 이렇게 오래 눈부실까요?" 아마도 독자와 함께 그 찬탄을 나누고 싶었던 게다.  천양희 시인에게 있어 송사리=아이다. 아이는 송사리떼를 지켜보는 주체인 동시에 객체인 셈이다.

아이를 바르게 가르치려는 한 교사의 기도

시집 표지
 시집 표지
ⓒ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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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시인의 시 '한 아이'가 아이들이란 존재의 눈부심을 노래한 시라면 도종환의 시 '돌아온 아이와 함께'는 자신이 가르쳤던 아이가 이렇게 자라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기도의 시다.

지금 당신 앞에 돌아와 무릎 꿇고 올리는
이 아이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달도 없는 밤 가을 숲 속에서 몇 밤을 지새고
다섯번째 도둑질을 하다 들킨 왼손을
오른손의 칼로 내리긋고
피흘리며 돌아온 이 아이의 한 손에
바르게 가르치지 못한 제 한 손을 포개어
당신께 올리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이 아이가 자라며 원망해 온
남루함과 헐벗음 누추함보다
이 아이의 아비가 진흙에 손을 넣고
대대로 빚어 온 붉고 고운 항아리들의 의미가
더욱 값진 것임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고
이 아이가 자라며 동경해 온
풍성함과 사치스러움 비어 있는 반짝거림보다
흙에서 건진 것들로 일용할 그릇을 삼는
저 정직한 옹기들의 넉넉함이
더욱 소중한 것임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불가마 옆에서 평생을 살아오는 이들과
그 이웃들의 가난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계시는 당신께
이 아이가 원망해 온 것들과 유혹에 빠져온
나날들을 빠짐없이 지켜보고 계셨을 당신께
또 다시 죄의 보속을 비옵는 까닭은
그들을 빼앗김과 짓눌림 한스러움에서
더욱 벗어나지 못하도록 옥죄어 오는 끈끈한 거미줄이
이 땅의 어느 구석에서 움솟는 것인지
그들에게 바르게 이야기하고 참되게 일깨워
제 손에 칼을 긋던 다른 한 손을 들어
결연히 그 어떤 것을 금그어 가야 하는지를
아직 다 깨우쳐주지 못한 까닭입니다
자신을 속이며 쉽게 쉽게 사는 일보다
흙을 디디고 흙을 만지며 정당하게 노동하는 일이
보람찬 삶임을 뜨겁게 깨닫는 아이가 되도록
바른 삶의 지혜를 불어넣어 주시옵고
제게 맡기신 가난한 이 땅의 많은 아들 딸들도
어떻게 우리가 바르게 살아야 하며
무엇이 우리를 바르게 살지 못하도록 하는지
우리가 진정 미워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아이로 이끌어 갈 수 있도록
제게 힘을 주시옵고 도와주시옵소서
아흔 아홉 번 용서하시고 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시는 당신 앞에
돌아온 아이와 함께 무릎 꿇고 올리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피흘리며 돌아온 이 아이의 한 손에
바르게 가르치지 못한 제 한 손을 포개어
당신께 올리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 도종환 시 '돌아온 아이와 함께' 전문 

1954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도종환 시인은 서정적인 글 속에 진솔한 삶을 녹여내는 아름다운 시를 쓰는 시인이다. 지금까지 펴낸 시집에는 <고두미 마을에서>, <접시꽃 당신>,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 <부드러운 직선>, <슬픔의 뿌리> 등이 있다. 

도종환 시인은 지금은 교직을 떠났지만, 전교조 활동으로 1989년 해직되었다가 10년 만에 복직하여 아이들을 가르쳤던 해직교사였다. 그러니까 1987년도에 출간된 <접시꽃 당신>에 실려 있는 이 시는 시인이 해직되기 전에 쓴 시다. "돌아온 아이"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보아 아마도 학교를 그만뒀다가 복학한 학생에 대한 시가 아닌가 생각한다.

시 속엔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에 대한 절절한 사랑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시에 뭔가를 덧붙인다는 것은 그야말로 사족이다. 우리나라 모든 아이들이 시인의 기도대로 자라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가정 안에서 아버지는 한 사람의 교사다

학교에서야 교사가 아이들의 교육을 책임지지만 가정에서 아이들의 교육을 책임지는 사람은 아버지다. 아버지는 자식을 엄격하게 훈육하여 날 자리 들 자리를 구별할 줄 알게 키워야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가정교육은 어머니의 몫이 돼 버렸다. 어머니는 본래 사랑을 주는 사람이지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 아니다. 정작 자식을 교육해야 할 아버지란 존재는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는 핑계로 항상 밤늦게 들어온다. 그 약점을 메우려고, 아이들의 환심을 사려고 아버지는 아이들의 비위를 맞춘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 아버지들의 한심한 자화상이다. 아이들은 이래저래 버릇이 없어져 간다. 우리가 자랄 때 "아비 없는 후레자식"이란 말은 지독한 욕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버지가 멀쩡하게 살아있는 데도 아이들이 '후레자식'들이 돼 가는 것이다. 도대체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내가 보기엔 어린이 날의 가장 큰 선물은 아버지가 부재(不在)로부터 돌아와 올바른 자기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술자리 같은 것을 조금 줄이고 집에 일찍 돌아와 아이에게 곧은 삶의 방향을 몸으로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가 해야할 일이다. 물론 피자 한 판이나 통닭 한 마리를 사 들고 귀가하는 자상한 아빠도 좋다. 그러나 아버지란 존재는 궁극적으로는 삶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아이들이 더 망가지기 전에 이제부터라도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시작해야만 한다. 더 이상 삶에 주눅들린 초라한 아버지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당당한 삶의 교훈을 보여줄 수 있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야말로 87주년 어린이 날을 목전에 둔 우리 모든 아버지들의 로망이 돼야 한다. 안 그런가?


태그:#어린이날 , #천양희, #도종환 , #창비,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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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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