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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과 '나무'가 결합하면 ㄹ이 탈락하여 '소나무'가 되니 '솔'은 곧 송(松)이다. 이는 박목월 시인의 '윤사월'에 나오는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에 나오는 송화(松花)를 기억하는 사람이면 단숨에 알 수가 있다.

 

그런가 하면 '고개'는 한자로 현(峴)이다. 이는 나당연합군이 공격해 왔을 때 감옥에 갇혀 있던 충신 흥수의 '천혜의 요새인 탄현(炭峴)과 백강(白江)을 지키면 적을 마침내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하는 건의를 의자왕이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 계백 장군의 5천 결사대가 황산벌에서 장렬하게 전사하면서 백제가 멸망했다는 고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즉, 우리말 이름 '솔고개'는 한자어로 송현(松峴)이 되니 대구광역시 달서구의 송현동은 본디 소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던 고개- '솔고개' 아래에 자리잡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동구의 송정동(松亭洞) 또한 이와 같아서 마을 한가운데에 큰 소나무에 기댄 정자가 있다 하여 그렇게 이름지어졌다.
 
입석동(立石洞)은 선돌[立石]들이 들판에 흩어져 산재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고, 달서구의 죽전동(竹田洞)은 죽(竹)이 '대나무'이고 전(田)이 '밭'이므로 본래 대[竹]나무가 많이 자라던 밭[田]이 있는 마을[谷], 즉 '대밭골'이 한자어로 바뀐 동명임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동구 괴전동(槐田洞)의 동명 역시 죽전동과 동일한 출생 과정을 거쳤음은 글자만 보고도 바로 확인이 된다. 괴(槐)는 괴나무를 뜻하니, 이 마을에는 본디 공예품의 재료로 많이 쓰이는 괴나무가 무성하게 자랐다는 말이다. 괴전동의 자연부락 중 괴동(槐洞, 우리말 이름은 괴믄골)은 계명동(鷄鳴洞)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닭[계鷄]이 우는[명鳴] 소리를 들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계명동에는 고려 시조 왕건의 고사가 깃들어 있다. 왕건은 팔공산 아래에서 견훤과 싸우다가 신숭겸, 김낙 두 장수가 목숨을 던져 싸우는 틈을 타 도망을 쳐 생명을 부지하는데, 정신없이 달리던 중 괴믄골에서 새벽닭이 우는 소리를 듣게 된다. 이를 뒷날 사람들이 한자로 적으니 곧 계명동이 된 것이다.

 

동구의 노곡동(蘆谷洞), 수성구의 노변동(蘆邊洞)은 갈대[蘆]가 무성한 마을이라는 뜻이고, 금사동(錦沙洞)은 비단[錦] 같은 모래[沙]가 많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금사동은 뒷날 검사동(檢沙洞)으로 바뀌는데, 망국 식민지 시대에 일제가 '금사동의 모래가 정말 비단처럼 아름다운지는 검사를 해보아야 한다'며 심술을 부려 그렇게 동명을 바꾸어버린 탓이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동명을 우리말인 '금샛벌'로 되돌리지는 못하더라도 '금사동' 정도로는 환원시키는 것이 좋을 법하다.

 

북구 칠성동 또한 앞의 사례들과 마찬가지 탄생 과정을 거친 동명이다. 칠성동은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 7개가 북두칠성처럼 흩어져 있는 지역의 마을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7개의 칠성바위는 1795년(정조 19) 경상감사 이태영이 북문 밖으로 별이 떨어지는 꿈을 꾸고 현장을 찾아갔다가 발견한 것이다. 이태영은 7개의 바위마다 아들 7형제의 이름을 새기고 복을 빌었다.

 

그 후로 사람들은 이 바위를 칠성바위라 불렀고, 아들이 없는 이들은 이 바위에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지금 칠성바위는 1973년 대구시민회관이 건립될 때 옮겨져 지하철 대구역 광장에 자리하고 있다.

 


태그:#대구, #칠성바위,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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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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