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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는 동네 보 막는 날이었다. 집을 나서기 전 잠시 작년 보 막던 날을 생각해 보았는데 그날 몇 가지 아쉬웠던 것들이 생생하게 떠올라 창고와 책상서랍을 뒤져 하나씩 챙겼다.

 

가장 먼저 챙긴 것은 쓰레기봉투였다. 큰 걸로 해서 두 개를 챙겼고 쓰다 만 밀크로션과 바셀린, 바디로션, 그리고 삽과 낫도 챙겼다. 또 하나, 농협에서 파는 하우스용 비닐 중 가장 두꺼운 0.1mm짜리 비닐을 폭 1.2m쯤으로 해서 18m를 잘라서 트럭에 실었다.

 

작년에는 두 사람한테서 보 막는다고 전화가 왔었는데 올해는 세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먼저 전화를 건 사람은 올해 중보 유사를 맞게 된 이아무개씨였고 두 번째로 전화를 한 사람은 작년에 유사를 맡았던 이아무개 할아버지였다. 세 번째로 전화를 한 사람은 이태 동안 내가 논을 부쳐 먹던 집 할머니였다. 올해는 다른 논을 부치는데도 이 할머니는 늘 잊지 않고 나를 챙겨주신다. '중보'는 냇가에 있는 세 개의 동네 보 중에서 가운데 있는 보를 말한다.

 

세 사람한테서 전화가 왔다는 것을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된다. 내가 외지인 취급되는 수습기간이 완전히 끝났음을 선포하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동네 와서 농사짓고 산 지 3년째인데 3이란 숫자는 원래 신비한 숫자다. 그래서인지 이날 예사롭지 않은 사건이 하나 생겼다.

 

일찌감치 보 막는 일을 끝내고 함께 둘러앉아 참을 먹는 시간에 동네 사람들이 나를 내년 유사로 추대한 것이다. 만장일치였다. 시골살이 15년 만에 처음 써 보는 감투. 그것도 대한민국 시골동네에서 최말단 감투인 동네 보를 책임지는 유사를 맡게 된 것이다. 얼마나 소박하고 겸손한 감투인가.

 

도랑을 따라 여기 저기 버려져 있는 쓰레기들은 올해도 여전했는데 쓰레기 하나하나를 준비해 간 쓰레기봉투에 주워 담는 것이 기특해서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나를 추대했는지도 모른다.

 

도랑가에는 작년처럼 페트병과 깡통, 비닐쪼가리가 여기저기 있었다. 농약병도 있었다. 밭이나 논에 농약을 치고는 집어 던져버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불을 싸질러 태워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내가 줍는 쓰레기들을 유심히 보시다가 자기가 버렸던 쓰레기를 발견한 사람들도 있었으리라. 그 발견이 나를 유사로 미는 결과를 낳았을 수도 있겠다.

 

또 모른다.  나를 유사로 추대하게 된 이유가 도랑에 두껍게 쌓인 흙모래를 삽으로 퍼내고 주변 풀 섶과 나뭇가지들은 낫으로 쳐 내는 나를 보고 그 철저한 준비성에 감복해서 일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은 일하는 연장을 삽이면 삽, 괭이면 괭이 한 가지씩만 가져 나왔는데 나는 두 가지를 가져갔던 것이다. 도랑치기가 끝나고 막바지 작업이 진행될 때였다. 이때가 동네사람들이 나를 유사로 추대하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냇가에 돌을 쌓고는 작년처럼 비닐 사료부대를 낫으로 갈라 펼쳐가지고는 물을 막아 도랑으로 물길을 돌리는 작업을 할 때였다. 준비해 간 18미터짜리 비닐을 내가 묵묵히 펼쳤다. 내 비닐 덕에 물이 도랑으로 콸콸 흘러 들어갔다. 십 수개의 비닐 사료부대와 십여 개의 일손들이 잠시 넋을 잃은 듯 나를 쳐다보았다. 곧이어 탄성을 질렀다.

 

우리 마을 중보 유사가 됨직한 사람이라고 다들 마음속으로 신임을 보내는 순간이지 않았을까 싶다. 갖고 간 바셀린은 손이 늘 터 있는 노인회장님이 먼저 집으셨고 로션은 손 빠른 할머니 두 분이 차지하셨다. 내년 유사를 뽑는 자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갔던 나는 본의 아니게 물품을 제공하며 유세를 한 셈이다.

 

유사직을 몇 번 사양하다가 못 이기는 척 수락을 했는데 유사가 하는 역할은 중보 자금통장을 맡아 관리하고 내년에 보 막는 날을 잡고 집집이 연락하는 것이라 했다. 보 막으러 안 나온 사람들한테서 3만 원씩 골을 받아 내는 일도 유사의 중요한 역할이다. 대단한 권력으로 보였다. 동네 유지로 진입하는 초입 같기도 했다.

 

그러나 누가 알았겠는가. 시골살이 15년 만에 쓰게 된 최초의 내 감투는 꼭 십 분짜리 였다. 참으로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내 유사자리가 갑자기 위태로워 진 것은 엉뚱한데서 비롯되었다. 일사부재리의 원칙도 무시하고 나를 내년도 유사자리에서 끌어 내리고야 만 원인은 돈 때문이다. 대신 동네 최아무개 할머니가 내년도 유사를 맡게 되었다. 내게 유사를 맡으라고 강권하던 분이시다.

 

동네에서 아랫집부터 차례차례 올라가면서 유사를 맡으니까 내년은 자기 차례지만 내 후년에 맡을 테니 나더러 먼저 맡으라고 했던 분인데 이 할머니가 마음을 고쳐먹고 유사를 맡겠다고 한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올해의 유사인 이아무개씨의 부인이 참거리를 가져 와 다리 밑 그늘 막에 펼쳐놓고 다들 둘러앉아 부지런히 먹을 때였다. 내년 유사도 뽑아 놨겠다, 일은 다 끝났겠다, 소주잔이 몇 순배 잘도 돌고 있었는데 유사가 통장에 잔고가 29만 몇 천 원이라고 보고를 하자 동네 할아버지들이 그렇게 돈이 많으면 내년에는 참을 유사네 집에서 장만은 하되 돈은 통장 공금으로 하자고 해서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최씨 할머니가 자기 차례니까 내년에 유사는 자기가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제까지는 보 막는 날의 참 준비는 유사네 집에서 해 왔다. 국수를 끓이든 밥을 하든 자유지만 꼭 술과 안주도 마련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젊은 축에 드는 올해의 이아무개 유사 부인이 면 소재지에서 꽃집을 하는 터라 소재지에서 김밥이랑 복숭아주스랑 소주 됫병이랑 중국집에서 만드는 술국을 사서 승용차에 싣고 개울까지 가져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 유사 부담의 참이 될 줄이야. 통장에 공금이 많이 모인 것이 내 감투가 그토록 단명하게 되는 원인이 될 줄이야.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삶이 보이는 창>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보, #도랑, #시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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