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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보았던 경양방죽에 대한 기억

 

TV의 일기예보 시간이면 가끔 경기도 고양시 일산 사람들이 호수공원을 거니는 모습을 보여주는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가까이 호수를 둔 일산 사람들을 몹시 부러워하면서 지금은 사라진 한 호수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그 호수는 광주광역시에 있었던 경양방죽이다. 내가 경양방죽을 처음 본 것은 아마 초등학교 3학년쯤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호수였다. 산골에서 태어나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치 못했던 내게 당시의 경양방죽은 커다란 인문지리적 충격이었다. '아, 세상엔 저렇게 큰 저수지도 있구나' 싶었다. 어린 내게는 아직 호수와 저수지를 구별하는 눈이 없었기 때문에 저수지로 알았던 것이다.

 

당시 나는 전남 담양의 시골집에서 할아버지·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5일마다 열리는 서방 장날이면 달걀이나 닭, 감 따위를 팔러 가는 할아버지나 할머니를 뒤따라 나서곤 했다. 굽이굽이 오십 리 산길을 넘어가 장에 내다 팔 물건을 다 팔고 나면 종종 들르는 곳이 있었다. 바로 양동시장에서 잡화점을 하는 아버지에게 가게였다.

 

말바우시장에서 양동시장까지 걸어가려면 계림초등학교 근방에 있던 경양방죽 둑길을 지나가야 했다. 둑방 길옆으로는 코딱지만한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여름에 거길 지나갈 때면 코를 감싸쥐어야 할 만큼 역한 냄새가 풍겨오곤 했다. 1970년대에 서울 뚝섬의 판잣집 근처를 근처를 지날 때도 그와 똑같은 냄새를 맡은 바 있다.

 

수심 10m·면적 4만6000여 평 크기의 경양방죽은 원래 자연호수가 아니었다. 1440년(조선 세종 22년), 김방이란 사람에 의해 축조된 인공호수였다. 그렇게 유서깊은 경양방죽은 1937년 일본인 집단거주지를 만들려는 일제 당국에 의해 완전히 매립될 뻔한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경양방죽을 지키려는 광주 사람들의 거센 반발에 부닥쳐 1/3가량만 남겨둔 채 매립 공사를 끝냈다. 그러니까 내가 본 것은 원래의 경양방죽의 1/3이었던 셈이다.

 

경양방죽이 완전히 메워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은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68년의 일로 기억된다. 광주 시민의 수원지이기도 했던 경양방죽의 수질이 나빠졌을 뿐 아니라 방죽 안에 투기된 쓰레기와 오물에서 풍기는 악취와 수질오염이 심각하다는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결국 지금의 무등경기장 근처에 있는 태봉산을 깎아 그 흙으로 경양방죽을 매립하고 말았다. 그 바람에 태봉산 공동묘지에 있던 나의 어머니의 산소를 옮겨야 하는 번거로움을 겪기도 했다. 그래서 500여 년 동안 무진주의 젖줄이었던 경양방죽은 2회에 걸쳐 매립되어 완전히 사라지고 만 것이다.

 

직접 본적은 없지만, 지금 내가 사는 대전에도 지금의 대전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소제방죽이란 꽤 큰 방죽이 있었다고 한다. 둘레 2618척 남북 850척쯤 되는 크기였다고 하니 경양방죽처럼 큰 방죽은 아니었던 것 같다.

 

소제방죽 역시 1928년 대전 도시계획사업 시행으로 메워지고 말았다 한다. 당시 방죽 가에 있었던 우암 송시열의 별당 기국정은 현재 송시열이 유생들을 가르치던 서당인 남간정사로 옮겨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완전히 찬밥 신세가 되어 있다. 한 번 상상해 보라. 광주나 대전 같은 대도시 한복판에 그런 호수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면 어떤 풍경을 보여줄까.

 

물안개 피어오르는 아침 호숫가를 산책하는 사람들, 갓난아기를 유모차에 태운 채 나들이 나온 젊은 아주머니들, 벤치에 앉아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 혹은 친구들, 숙연한 표정으로 저물어가는 하루해를 바라보는 사람들. 상상만으로도 정겹게 느껴지고 가슴 한켠이 더워지는 그런 풍경이 아닌가?

 

소제방죽에서 계룡산 쪽으로 해가 지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소제 8경의 하나였다던가. 호수가 있었던 자리에 주택을 더 짓는 편이 행복했을까, 아니면 호수를 그대로 놔둔 채 두고두고  정서적 사치를 누리는 게 더 행복했을까.     

 

 

호수는 갑갑한 사람이 마음을 푸는 장소

 

누가 그랬던가.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돌이킬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야 한다" 라고. 백 번 천 번 옳은 말이다. 현재 있는 것이라도 제대로 사랑해야지. 내가 사는 대전에는 좀 전에 언급했던 소제방죽 말고 대청호라는 인공호수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호수다.

 

내가 대청호를 아끼게 된 것은 대청호 가에는 크고 작은 10여 개의 삼국시대 산성이 있다. 그 산성들을 본격적으로 답사하면서부터 자연스레 호수를 가까이하게 됐다. 산성에 올라서 바라보는 호수는 남해안의 리아스식 해안을 연상시킬 만큼 뛰어난 풍경을 펼쳐보인다. 호수를 가만히 굽어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평안해지는 걸 느끼곤 한다. 어디 그런 감정을 나만이 느꼈겠는가.

 

<조금은 쓸쓸하고 싶다><당신의 손><동목(冬木)><매듭을 풀며><등나무 아래에서> 등의 시집을 낸 바 있는 임강빈(1931~) 시인도 대청호와의 정서적 교감을 이렇게 노래한다. 

 

충남 대덕군 동면 신하리

충북 보은군 회남면 법수리

한 자락이 물에 잠기면서

부스스 호수를 떠올린다

호면에 햇살과 물결이

바람결이 한데 어울려 반짝인다

대전 근교에서

탁 트인 곳을 꼽으라 하면 단연 여기다

이미 많이들 모여들었다

갑갑한 사람

나만은 아니라는 증거

대청호는

지긋이 눈을 반쯤 감고

갈증을 적셔 주는 일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

   - 임강빈 시 '대청호' 전문

 

임강빈 시인에게 대청호란 "갑갑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그런 사람들이 탁 트인 호수에 찾아와서 삶의 "갈증을 적셔 주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임강빈 시인이 묘사한 호수의  풍경은 사뭇 정적이다.

 

사실 난 별다른 움직임 없이 정적인 호수도 좋아하지만 동적인 호수를 더 좋아한다. 가령, 아침 안개가 한 채의 이불처럼 호수를 덮은 위로 해가 불쑥 솟아 오르는 풍경이라든가 비가 오는 날 호수 위로 거대한 비구름이 오락가락하는 풍경을 훨씬 더 좋아하는 것이다. 꽤 많은 비가 내리는 어제 오후에도 만사를 젖혀두고 그 풍경을 보고 왔을 정도다. 구름이나 눈, 비가 시시각각 성형(成形)해내는 호수의 모습은 언제 봐도 경이롭기 짝이 없다.

 

 

그대는 산그림자에 돌을 던지고 싶은 날이 없는가

 

임강빈 시인의 시는 조용하고 관조적이다. 그러나 생의 역정이 파란만장한 시인인 고은 시인이 쓴 '호수'라는 시는 훨씬 동적인 편이다.

 

이제까지 바다 탐내었느니라

 

욕심도 희망도 줄여

호수에 가

거기 담겨 있는 산그림자에 돌 던져라

다시 살아나는 산그림자에 돌 던져라 

그러다가 바람이 와

물푸레나무랑 나랑 기뻐 어쩔 줄 몰라

던진 돌 가라앉은 뒤

     - 고은 시 '바람 시편' 중 '호수' 전문 

 

이 시는 고은 시인의 고희를 기념하여 펴낸 시집 <어느 바람>(2002)에 실려 있는 시다.  44여 년의 창작 생활 동안 고은 시인이 발표했던 시들 가운데 총 150편을 추려 묶은 시집이다. 

 

그러나 내가 이 시를 처음 읽은 것은 오래전이었다. 1988년 계간지 <창작과 비평>가을호에서였던 것 같다. 이시영이 쓴 '고은과 신경림'이라는 글 안에 이 시가 들어 있었다. 그 글에서 이시영은 이 시가 "이전에 민중시의 저항적인 비유와 알레고리에 길들여져온 독자들에게 좀 당혹스런 충격을 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그러나 이 시는 "온갖 알레고리를 배제한 채 , 아니 그것으로부터 해방된 채 언어 본래의 싱그러움"만을 즐길 것을 제안하고 있다.

 

시는 거두절미한 채 대뜸 "이제까지 바다 탐내었느니라"라는 자기반성으로부터 시작한다. 여기서 '바다'는 큰 것을 대변하는 아이콘이다. 그렇게 큰 것만을 탐내던 시인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욕심도 희망도 줄여" 호수에 간다. 거기 가서 산그림자에 돌을 던진다.

 

무엇 때문에, 왜 돌을 던지는가. 아이들처럼 재미로 물수제비 뜨는 장난을 하는 것도 아니다. 자꾸만 돌을 던져 "산그림자"를 깨트리라는 것이다. 

 

이시영은 이 시에서 "언어 본래의 싱그러움"만을 즐기라고 권유하지만 그렇게 상황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시가 탄생한 배경을 모르고선 이해하기 어려운 시가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 시가 쓰여진 시기가 1987년 6월 항쟁 이후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해하기가 훨씬 쉬울 듯싶다.

 

후보 단일화가 실패한 채 치른 대통령 선거 결과는 민주진영의 실패로 끝났다. 게다가 선거의 여파로 민주진영까지 갈기갈기 찢어진 상황을 상정한다면 시인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조금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다.  

 

내가 보기에 시인이 바다를 탐낸 것은 결코 욕심이 아니었다. 명분이 살아있는 대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산그림자'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산그림자가 상징하는 것은 역사적 책무보다는 자기 진영의 이익에 더 목매다는 집단을 가리키거나 대의보다는 소리(小利)에 갇힌 욕심이 아닐는지. 그렇다면 그것은 지워도 지워도 되살아나는 악몽 같은 것이리라. 던진 돌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나면 어느 정도 마음이 풀리는 것일까. 그제야 시인은 "물푸레나무랑 나랑 기뻐 어쩔 줄" 모르는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

 

격렬함의 정도는 다르지만 호수를 들여다보거나 거기에 돌을 던지는 행위나 다 같이 마음을 삭이는 행동이라는 데선 일치한다. 호수는 마음을 푸는 곳이다. 이를 테면 정신의 해우소 같은 곳이리라. 산그림자 같이 커다란 근심 있는 날이면 가까이 있는 호수를 찾아갈 일이다.


태그:#대청호 , #경양방죽 , #고은 , #임강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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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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