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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는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큰 규모의 섬이다. 그것도 한민족의 삶과 역사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한반도의 중심 서울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섬이다. 수 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강화도는 우리 민족의 수난과 애환을 품은 채 육지에서 서해로 향하는 땅의 끄트머리에서 한 발짝 뜀을 뛰어 바다 속의 육지로 실존해왔다.

지금은 강화대교와 초지대교가 놓여져 육지에서 배를 이용하지 않고서도 쉽게 건널 수 있는 사실상의 육지나 다름없는 뭍이 되었지만, 수 천, 수 백 년 전에는 가깝고도 멀다 할 수 있는 천연의 낙원이며 오지이자 요새로 존재해왔을 그런 섬이다.

나는 강화도에 살아 숨쉬고 있는 파란만장한 우리 역사의 유구한 흔적에 접신(接身)하고자 계획한 나름의 일정으로 경유지를 정해 자동차를 몰았다. 우선 강화읍성의 서문을 지나 48번 국도를 따라 '송해면'과 '하점면' 방면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부근리로 가는 길가 밭에서 풀을 뜯고 있는 흑염소를 만났다.
▲ 풀을 뜯고 있는 봄날의 흑염소 가족 부근리로 가는 길가 밭에서 풀을 뜯고 있는 흑염소를 만났다.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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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는 수줍은 연분홍빛으로 화사하게 핀 진달래와 그의 친구 노란 개나리가 무리지어 있었다. 봄을 노래하는 표정으로 방긋하게 입을 벌려 환하게 반겨주고 있는 강화의 봄꽃들은 유난히도 예뻤다. 길가와 들녘에 피어난 봄꽃들의 향연을 행복하게 감상하고 있는 사이 자동차는 어느새 하점면 삼거리 근처에 도착했다. 갈래 길에서 오른쪽으로 꼬부라져 약 오백 미터쯤 들어왔을까, 저만치 낮은 구릉 잔디밭 한 가운데 거대하게 서있는 고인돌이 씩씩한 모습으로 반겨주고 있었다.

산만하고 거슬리게 하는 모든 주변을 물리치고, 스스로 주인인 양 육중하고 웅장한 모습으로 분위기를 압도하며 서있는 청동기 시대의 권력의 상징과 만날 수 있었다. 점잖고 위엄 있는 자태와 품새는 아직도 여전히 권력과 힘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려는 듯 구릉을 넘나드는 건조한 흙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강력한 카리스마를 내뿜고 있었다. 마치 입을 다물고서 고요히 낮은 숨을 마시고 내쉬는 신비한 모습으로 살아 있었다. 수 천 년 전 죽은 자의 무덤인 고인돌은 결코 죽어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미확인 비행물체(UFO)처럼 내려앉은 고인돌
▲ 부근리 고인돌 미확인 비행물체(UFO)처럼 내려앉은 고인돌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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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근리 고인돌은 우리나라 고인돌 중 가장 큰 것으로 그 생김새가 썩 괜찮을 뿐만 아니라 크기와 무게도 거대하다. 덮개돌 하나만해도 길이가 7.1미터, 너비 5.5미터 무게는 약 50톤 정도라고 하니, '대체 이 고인돌에 누워 잠든 사자(死者)는 어떤 권력자였고, 죽어서 무슨 부귀영화와 영생불사를 염원했던 존재였을까?' 나는 순간적으로 짧게 혼자만의 엉뚱한 상상을 했다.

무려 3~4천 년 전쯤에 만주와 몽고로부터 우리나라로 들어온 청동기인들은 이 곳 강화도에 터전을 잡고 살았다. 강화는 섬치고는 비교적 비옥한 평야와 물이 있고, 해안을 따라 갯벌이 발달하였기에 농사와 목축, 어로를 통해 당시로는 풍족한 생활을 영위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풍족한 생산을 통한 잉여생산물의 축적은 집단과 조직 구성원 속에서 지배와 피지배관계 즉 계급사회를 형성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계급이 높은 족장이나 지배자가 죽을 경우 많은 공을 들여 무덤을 만들고, 심지어 숭배하기까지 하는 풍습이 자연스럽게 등장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고, 그 결과물이 바로 거대한 돌로 만든 무덤인 고인돌로 탄생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내 눈앞에 우뚝 서있는 저 고인돌은 나이로 치자면 3천 ~4천 살 정도 먹은 초고령(超高齡)의 노인이거나, 감히 그 나이를 헤아릴 수 없는 한민족 현생 인류의 조상인 것이다.

"오 할아버지, 할머니, 어르신, 영감님 아니 불멸의 조상님이시여!"

무려 50톤 정도되는 덮개돌을 굄돌 위에 얹은 탁자식 형태의 부근리 고인돌
▲ 덮개돌 모자 쓰신 고인돌 할아버지 무려 50톤 정도되는 덮개돌을 굄돌 위에 얹은 탁자식 형태의 부근리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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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긴 굄돌이 좌우로 받쳐지고 그 위에 크고 장대한 덮개돌로 얹혀진 우리나라 탁자식(북방식) 고인돌의 대표 '부근리' 고인돌 앞에서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그리고 나도 몰래 주머니에 넣었던 양 손도 얼른 빼서 자세를 바르고 겸손하게 했다. 엄청난 나이를 잡수신 조상의 신성한 무덤 앞에서 그야말로 나는 젖비린내 가시지 않은 애송이 어린애처럼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마치 너른 밭에 살며시 내려앉은 미확인비행물체(UFO)처럼 보이는 고인돌의 주위를 두어 바퀴 돌면서 굄돌과 덮개돌의 균형과 비례, 돌방의 형태와 크기를 살폈다. 게다가 건방지게도 고인돌이 가진 조형적, 미학적 의미도 음미해보는 당돌한 탐구와 관찰을 했다. 보면 볼수록 신비로웠고, 신성했으며, 적어도 내 느낌으로는 장엄해 보였다.

웅장하고 멋진 자태를 가진 채 3~4천 년의 나이를 잡수신 고인돌 할아버지를 배경으로
▲ 꽃보다 고인돌 웅장하고 멋진 자태를 가진 채 3~4천 년의 나이를 잡수신 고인돌 할아버지를 배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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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근리 고인돌의 우두머리격인 탁자식 고인돌 잔디밭의 외곽에는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에서 주로 볼 수 있다는 남방식(바둑판식, 개석식) 고인돌의 모형을 살펴볼 수 있었다. 게다가 각기 다른 묘한 미스터리를 품고 있는 다른 나라의 석상모형도 볼 수 있어 유익했다. 남태평양의 이스터 석상, 영국의 스톤헨지, 중국의 고인돌 등은 비록 모형이었고, 어떤 이유로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오래 전에 살았던 고대인류가 후세에 남겨놓은 신비한 유산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였다. 

나는 시종일관 여전히 씩씩한 모습으로 제자리를 지키고 선 고인돌을 보았다. 크고 육중한 덮개돌을 모자처럼 굄돌에 올린 채 들판을 지배하는 수호신처럼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선 고인돌 할아버지의 강렬한 모습을 보았다. 그러하므로 나는 고인돌에 대한 나만의 독특한 영감을 떠올리고 획득할 수 있는 생생한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셈이다. 내게는 그렇게 수 천 년 전의 유산과 교감하고 소통할 수 있었던 뿌듯한 행운의 시간이 그 곳, 바로 그 때에 있었다.

"고인돌이시여! 언젠가 다시 찾아올 그 때까지 영원무궁토록 강령하십시오!"

나는 고인돌께 작별의 인사를 드리고서 다음 경유지인 전등사를 향해 자동차를 몰았다. 48번 국도를 다시 되돌아 나와 '연무당터와 석수문'을 지나고, 남문을 스쳐 강화우체국 앞 삼거리에서 전등사 마니산이라고 적힌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우회전했다. 30여 분을 달려왔을까, 어느새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鼎足山)-산의 생김새가 마치 세 발 달린 가마솥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전등사 입구에 도착했다.

전등사로 향하다

강화에서 제일로 규모가 크다고 알려진 사찰 전등사의 남문 입구에서 고고한 모습으로 품위 있게 늙은 소나무 군락의 환영을 받을 수 있었다. 주차장에서 전등사로 향하며 가벼운 산보로 등반하는 내게 소나무에서 투명하게 내뿜는 솔향이 머리를 맑게 해주었다. 청량제 같은 상쾌하고 신선한 느낌이 좋았다.

전등사는 '진리의 등불은 시공(時空)에 구애됨이 없이 꺼지지 않고 전해진다'라는 의미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창건설에 의하면 멀리 고구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소수림왕 2년(372)에 '진종사'란 이름을 거쳐 고려시대 삼랑성 가궁궐에 불정도량에서 법회를 열었다는 <고려사>의 기록을 알 수 있으며, 그 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비로소 전등사에 대한 기록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니까 전등사는 그 유래를 따져보면 천 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는 시간 속에 이 곳 정족산의 가마솥 같은 품에 안겨 존재해 온 것이다.

전등사로 향하는 언덕을 오르며 충분한 산소와 피톤치드로 무공해 삼림욕을 즐기는 사이 어느새 단군 왕검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의 정문(남문)에 도착했다. 남문의 좌우로 산등성이를 따라 이어진 산성을 바라보니 다시금 문득 병인양요 당시의 떠올리고 싶지 않은 전란의 장면이 눈앞을 스쳤다. 대검이 장착된 총칼과 대포를 앞세워 이 곳 정족산성을 침탈해온 제국주의 프랑스군대의 야만적 살육과 파괴의 그림자가 보이는 듯했다. 피 흘리며 산화해 간 불쌍한 동양의 변방 조선 병졸들과 쌓여진 채 불타고 있는 서책들의 신음소리도 스산하게 들리는 듯했다.

삼랑성의 정문을 통과해 불과 몇 분 만에 눈앞에 나타난 전등사의 전각들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전등사 대조루에 얼마 못 미쳐 아이들에 의해 팽이처럼 돌아가고 있는 '윤장대'를 만날 수 있었다. 마치 화려한 꽃가마와 비슷한 색깔과 문양으로 어우러진 윤장대는 아름다운 치장을 한 채 돌아가고 있었다. 윤장대는 가운데 축을 중심으로 빙 둘러진 몇 곳에 연자방아처럼 지지대로 축을 만들어 놓아 아이들이고, 어른이고 원하는 사람들은 마음껏 돌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부처님 정신의 소산이자 배려였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문맹의 불자들을 위해 윤장대를 돌리면 부처님의 말씀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도록 배려한 자비의 소산이다.
▲ 윤장대를 돌리는 아이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문맹의 불자들을 위해 윤장대를 돌리면 부처님의 말씀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도록 배려한 자비의 소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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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나라 복잡한 글과 말인 한문으로 만들어진 불경. 불경은 글을 모르는 문맹의 불자들에게는 읽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문맹의 불자들을 배려한 돌아가는 책장 '윤장대'는 인간의 업장을 씻기 위한 윤회의 의미와 더불어 상단 책장 같은 곳에 불경을 넣어 놓아 한 바퀴 돌릴 때마다 부처님의 말씀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자비로움이었다. 나는 윤장대를 몇 바퀴 돌리며 먹고 살기에 바빠 잊어가고 있고, 잃어버려 가고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걸음을 옮겨 대조루 아래를 지났다. 속에서 승으로 향하는 것처럼 몇 개의 계단을 오르니 눈앞에 그림 같은 대웅보전이 나타났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한 눈에 보아도 아담하지만, 우아하고 날렵해 비상하는 듯한 자태가 몹시 아름다웠다. 막돌 쌓기로 쌓은 기단과 막돌 초석 위에 놓여진 원흘림기둥의 매우 자연스런, 그야말로 자연스러움은 인공의 가공과 가식으로 성형하고 화장한 용모가 아니었다. 남루한 듯하면서도 고색의 신비로움을 있는 그대로 발산하고 있는 대웅보전은 전등사를 찾아 정족산을 오른 수많은 중생들에게 환하고 자애로운 미소를 무한정 나눠주시는 영험한 스님이자 신령이셨다.

단아하지만 화려한 모습으로 비상하는 듯한 대웅보전의 자태
▲ 전등사 대웅보전 단아하지만 화려한 모습으로 비상하는 듯한 대웅보전의 자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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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대웅보전을 찬찬히 걸어가며 한 바퀴를 돌았다. 나무기둥을 손으로 만져보기도 하고, 고개를 젖혀 지붕처마를 살펴보기도 했다. 다포식 기둥으로 공포(지붕을 들어올리거나 받치는 부재) 위로는 동물조각과 연꽃봉오리가 보였고, 네 귀퉁이 추녀에는 발가벗은 채 쪼그리고 앉은 여인상이 힘겹게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발가벗은 여인의 조각을 보니 그와 관련된 재미있는 설화 한 토막이 떠올랐다.

'불이 난 전등사를 광해군 6년(1614)에 새로 짓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 대웅전 공사를 맡았던 도편수(목수 중 우두머리)가 아랫마을 주모와 정분이 났다. 도편수와 주모는 정답게 지냈으나 공사가 끝나갈 무렵 주모는 도편수가 벌어다 준 돈을 모두 챙겨들고 줄행랑을 놓았다. 이에 앙갚음 할 묘안을 찾던 도편수는 생각한 끝에 그 여인을 닮은 네 개의 나체상을 만들어 법당의 네 귀 추녀를 떠받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는 부처의 설법을 듣고 개과천선하라는 뜻과 악녀를 멀리하라는 경고 메시지를 담은 해학적 조각이었던 것이다.

법당 안에는 불단 위에 목조각 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삼존불은 간결하게 살짝 올라간 짧은 입 꼬리를 다물어 맑게 정화된 미소를 짓고 계셨다. 그 뒤로는 후불탱화가 걸려있고, 삼존불 위 천장에는 화려한 채색과 능숙한 솜씨로 조각된 용, 극락조 등이 부처님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꼼꼼히 감상하며 살펴보니 법당 안은 극락정토나 다름없이 모든 만물이 조화롭게 서로 연관하여 존재하는 우주의 공간이었다.

대웅보전을 돌아 나와서 법당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살던 곳이자 조선시대에는 상궁이나 나인들이 기도하던 곳으로 쓰이기도 했다는 향로전을 스치듯 지나쳤다. 그리고 향로전 옆에 아까 본 듯한 차림새와 품새를 한 대웅보전의 동생 격인 약사전을 만났다. 정면 3칸 측면 3칸 다포계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 건물 형태와 자태가 매우 흡사한 것이 꼭 대웅보전과 형제 같은 느낌이었다.

약사전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중생들의 아픔을 치료하고 달래주신다는 약사여래좌상이 유난히 큰 귀와 다소곳이 내리 뜬 눈으로 가부좌한 채 앉아계셨다. 나는 늙으신 어머니와 장인 장모님을 생각했다. 그러면서 잠시나마 그 분들의 평화롭고 고요한 노년을 기도했다.

약사전을 살펴 돌아 옆에 있는 명부전으로 향했다. 명부전은 죽은 사람이 49일이 지나 죽은 이를 재판하는 시왕에게 재판을 받을 때까지 그들의 넋을 위해 치성을 드리는 건물이라고 한다. 명부전 안에는 지장보살을 포함해 여러 존상이 모셔져 있었다. 지장보살은 모든 중생이 극락에 가기 전까지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노라는 원을 세운 보살이라고 한다. 나는 새삼스레 죽어서도 재판을 받아야 하고, 재판을 잘 받게 가족들이 치성을 올려야한다는 이야기를 머금은 명부전을 바라보며 갑작스럽게 푸시시 웃음이 나왔다. 인간사 새옹지마에 한 톨 우주 속의 먼지인 것을...

빼어난 안정감과 상승감이 돋보이는 약사전의 자태
▲ 전등사 약사전 빼어난 안정감과 상승감이 돋보이는 약사전의 자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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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걸음을 가벼이 하여 명부전을 내려왔다. 그리고 명부전 앞에 있는 종각에 들렀다. 사각지붕 아래 붉은 홍살로 호위를 받으며 묵언중인 동종을 살펴보았다. 한 눈에 보아도 우리나라 전통 종이 아닌 것이 분명해 보이는 그의 용모는 어색했다. 우리나라 범종과는 달리 음통이 없고, 용뉴에는 두 마리의 쌍룡이 마주해 꼭지를 이루고 있으며 종몸을 상중하로 나눠 띠를 두르고 매화문을 새긴 것이 평상시 보아왔던 우리 종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중국의 송나라 때 종이 어떤 이유로 전등사에서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포로로 잡혀 있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료를 통해 살펴보면 일제 말기 군수물자 징발에 전등사 범종을 강제 공출 당했다가 우연찮게 지금의 동종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자료에 따르면, '전등사 주지 스님은 범종을 잃어버리고 해방이 되자마자 일제 때 빼앗겼던 종을 찾기 위해 인천 항구를 뒤지고 다니다가 누군가의 우연한 제보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다 부평 군기창 뒷마당에 있던 종을 발견했고, 전등사 종은 아니었지만 가져다가 전등사에 보관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중국 송나라 때 동종이 떠돌다 전등사에 기거하게 되었다니 참으로 우연치고는 묘하다.

나는 마음 같아서는 당목을 힘껏 잡아서 당좌를 쳐 종을 울려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우리나라 종과 중국 동종의 음색과 목소리를 두 귀로 꼭 한번 확인해보고 싶은 욕구가 발동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어코 참았다. 그냥 눈으로 소리를 짐작하고 종의 몸매를 통해 음색을 가늠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 정도로 참기로 했다.

동종과의 대면을 끝으로 나는 전등사를 떠나기로 했다. 나는 언덕을 내려오며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천 년의 세월을 머금은 전등사에 들러 불심(佛心)과 솔향으로 온 몸을 씻어서인지 몰라도 아무튼 그렇게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가벼운 발걸음을 땅을 향해 툭툭 던지며 경쾌하게 정족산을 내려왔다.

아름다운 군사시설 광성보

자동차는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광성보에 한 20분 만에 도착했다. 정문인 '안해루'가 어스름 저녁 빛을 받으며 거기 있었다. 강화에 남아있는 대표적인 전쟁관련 유적이자 군사시설인 광성보에는 그에 딸린 돈대가 몇 개 있는데, 두루 돌아보며 살펴보기로 했다.

지명 끝에 진, 보, 돈대 등이 들어가면 강화도에서 조선시대부터 사용되어 오던 군사시설의 명칭이다. 즉, 진은 오늘날의 대대규모 병력이 주둔하던 부대의 진지를 말하고, 보는 중대규모, 돈대는 망을 보고 보초를 서는 초소의 의미정도라 할 수 있겠다.

광성보에는 광성돈대와 용두돈대, 손돌목돈대가 딸려 있는데, 나는 먼저 광성보의 정문인 안해루의 왼쪽 성벽에 난 작은 출입문을 통해 광성 돈대 안으로 들어갔다. 광성돈대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이건 마치 군사시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하학적인 구성으로 디자인 된 다리미 모양의 공간을 볼 수 있었다. 이 곳은 놀라웠지만 아름답고 아이러니한 군사시설이었다. 광성돈대는 후면을 제외하고 북과 동, 남 삼면을 향해 성벽이 둘러쳐져 빈틈없이 외부의 적을 관측하고 방어할 수 있도록 구축된 탁월한 진지였다.

다리미 모양처럼 기하학적으로 생긴 아름다운 조형적 군사시설 광성돈대
▲ 아름다운 광성돈대 다리미 모양처럼 기하학적으로 생긴 아름다운 조형적 군사시설 광성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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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시설로도 탁월하지만, 예술적으로도 매우 아름다운 형태와 공간 조형미를 보여주는 광성돈대
▲ 광성보의 광성돈대 군사시설로도 탁월하지만, 예술적으로도 매우 아름다운 형태와 공간 조형미를 보여주는 광성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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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대 중앙에는 동그랗고 커다란 철제포탄으로 적의 함선을 뚫어 침몰시킬 수 있는 대포인 홍이포와 비교적 작지만 연사가 가능한 블랑기(명나라에서 외국인을 프랑크라 하고 그들의 서양식 대포에 붙인 이름), 우리의 재래식 포인 소포가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관찰하며 당시의 무기 수준을 가늠할 수 있었고, 그것들을 통해 이 곳이 비로소 전란의 현장이었음을 새삼 알 수 있었다.

나는 돈대 주위를 돌아가며 중간 중간에 뚫린 포구와 성벽 위의 원총안, 근총안의 배치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1871년 치열하고 장렬했던 신미양요 전란의 기억이 잠시 뿌옇고 흐릿하게 느껴질 만큼 매우 세련되고 절묘한 조형적 공간 구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 치의 빈틈도 없는 공간안배와 효과적인 지휘를 가능하게 하는 위치와 각도는 수준 높은 전략적 군사시설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예술적으로도 매우 뛰어난 조화와 균형의 미학이 반영된 작품이라 할 수 있었다. 군사시설이라지만 마치 조각공원이나 예술마당인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나는 광성돈대를 나와서 손돌목돈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양 옆으로 늘씬늘씬한 소나무와 참나무들이 가지런하게 서서 차분한 오솔길 숲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나는 시원한 숲길을 진심으로 자유롭게 걸었다. 그렇게 얼마 동안 걸으니 신미양요 당시 200여 명의 군사가 48시간 동안 미군들과 사투를 벌이며 싸우다 모두 전멸하고만 통한의 사지(死地)에 다다를 수 있었다.

신미양요 순국무명용사비가 그늘 속에 어둡게 자리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어제연, 어제순 장군 형제의 장렬하고 용맹한 죽음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쌍충비와 비각이 초연하게 있었다. 나는 신무기로 무장한 서양오랑캐들에 맞서 칼과 창, 맨주먹으로 대항하며 촛불처럼 약한 조국을 위해 몸을 던져 싸웠던 젊디젊은 조선의 병졸들을 생각했다. 나는 그들의 숭고한 죽음과 비운의 역사 앞에 고개 숙여 묵념을 올렸다.

1871년 신미양요 당시 어제연 장군 휘하에서 싸우다 전사한 51명의 병졸들이 합장된 7기의 무덤이다.
▲ 신미순의총 1871년 신미양요 당시 어제연 장군 휘하에서 싸우다 전사한 51명의 병졸들이 합장된 7기의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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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아래로 7기의 무덤이 나란히 누워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제연 장군 휘하에서 싸웠던 51명의 군졸들이 모두 전사했는데, 그들의 신원을 알 수 가 없어 7기의 무덤에 합장해놓은 것이었다. 슬픔과 고요함이 드리워진 '신미순의총'을 길 위에서 내려보고 있자니 가슴 깊숙한 곳에 머물던 미지근한 한숨이 실바람처럼 허공에 뿌려졌다. 나는 서둘러 그 곳을 지나 광성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손돌목돈대로 향했다.

손돌목돈대는 높은 지대 위에 위치해 주변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광성돈대와 비슷한 형태와 구조를 가지고 있었지만 돈대 안의 모습은 마치 소싸움이 벌어지는 원형경기장에 거의 가까울 정도였다. 나는 요새의 지형인 돈대의 잔디밭에 앉아 짧은 휴식을 만끽했다. 봄날 오후의 훈풍이 부드럽게 소용돌이치는 돈대의 잔디밭은 역설적이게도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로웠다. 나는 그 곳의 잔디밭에 앉아 손돌이라는 뱃사공에 얽힌 한 조각의 설화를 더듬어보기로 했다.

'고려 고종이 몽고군의 침입으로 강화를 향해 피난하는데, 손돌이라는 뱃사공이 뱃길을 안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배가 광성보를 지나자 갑자기 물길에 휩싸이는 듯 뱃길이 멈추자 고종은 손돌이 무슨 계략으로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려는 줄 알고 부하를 시켜 손돌을 처형하라고 명하였다. 손돌은 이 곳의 지형이 원래 이러하다 말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자 뱃길 앞에 바가지를 하나 띄워 그 바가지가 떠가는 대로만 가면 뱃길이 트일 것이라고 말하며 끝내 처형을 당했다. 그러나 뱃길이 계속 트이지 않자 왕은 별 수 없이 손돌이 가르쳐준 대로 바가지를 따라 배를 움직여 무사히 강화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뒤부터 사람들은 덕진진 앞 좁은 물길을 손돌목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손돌이 죽은 10월 20일경에는 큰 바람이 불어 손돌의 넋이 아직도 그 곳에 있음을 암시한다고 믿으니 그 바람을 손돌바람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목숨이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을 때면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인걸까?' 나는 강화 뱃사공 손돌에 얽힌 설화를 되새기며 인간에 대한 씁쓸한 회의감에 대해 한 동안 생각했다.

나는 엉덩이의 지푸라기를 탈탈 털고 일어서 용의 등뼈처럼 구불거리며 물길 쪽으로 고개를 내민 용두돈대로 걸었다. 좁은 강화해협에 용머리처럼 쏙 고개를 내밀고 있는 용두돈대는 마치 바다로 향하는 기찻길 같은 느낌이었다. 보통사람 키보다 조금 낮은 높이에 좌우로 쌓은 성벽은 두 줄의 레일이었으며, 오래 전 역사의 현장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회한의 통로였다.

붉은 저녁 노을이 지는 아름다운 용두돈대에서 답사여행에 동행한  꼬마친구들
▲ 아름다운 용두돈대 붉은 저녁 노을이 지는 아름다운 용두돈대에서 답사여행에 동행한 꼬마친구들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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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용두돈대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일품이었다. 북, 동, 남으로 훤히 보이는 시야는 넓게 트여 건너편 김포와 인천을 조망할 수 있었고, 꼬이고, 뒤엉키며, 회오리를 일으켜 흐르는 손돌목의 물살은 빠르고도 격했다. 나는 천연의 바다 전망대 용두돈대 끝자락에 서서 붉은 노을이 엷게 덥힌 하늘을 보고 바다를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소리쳤다.

"대체 군사시설이라는 곳이 왜 이렇게 멋진 거야?"
"진짜 왜 이렇게 아름다운 거냐고?"

덧붙이는 글 | 지난 4월 11일 답사 다녀와서 쓴 글입니다.
# 강화도 답사(2)편 경유지 : 부근리 고인돌-전등사-광성보



태그:#강화고인돌, #전등사, #광성보, #용두돈대, #부근리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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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에 걷기 좋은 길을 개척하기 위한 모임으로 다음 카페 <고양올레>를 운영하는 카페지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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