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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짱 포나가 참탑

앙코르와트와 비슷한 모습의 참탑
▲ 나짱 포나가 참탑 앙코르와트와 비슷한 모습의 참탑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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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짱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우리는 나짱 시내 관광을 나섰다. 아내는 리조트에서 좀 더 쉬고 싶어 했지만 벌써 이틀을 리조트에서 뒹굴 거렸던 터라 내가 좀이 쑤셔 못 참는 터였다. 게다가 나짱에 오면서 계획했던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 야전사령관은 찾아 봐야지 않겠는가.

우리가 처음 간 곳은 나짱 북쪽에 위치한 포나가 참탑이었다. 한때 베트남 남부지역을 지배하던 참족이 9세기 말, 북쪽의 비엣 족에 몰려 이곳까지 도망쳐 온 뒤 만든 탑으로서 팔이 열 개인 참족의 포나가 여신을 모신 힌두교식 사원이라고 했다. 아마도 그들은 이 탑을 세우면서 비엣족을 쫓아내기 위해 절절히 기도를 했을 것이다.

옛날 장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참탑
▲ 포나가 참탑의 위용 옛날 장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참탑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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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그 규모와 정교성에 있어서는 많이 떨어졌지만 참탑은 분명 크메르족이 세운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와 거의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앙코르와트 한 구석에 크메르족과 참족의 전쟁을 보여주는 부조가 있었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두 민족이 활발히 교류했음을 뜻하는 것이리라. 결국 전쟁이라는 것도 그 문명의 교류에 있어서 하나의 방법 아니었던가.

나짱의 작은 어촌 뒤 언덕에 세워진 포나가 참탑은 아직도 그 종교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터라, 참탑 주변 곳곳에는 많은 현지인들이 아주 진지한 모습으로 향을 피우고 절을 올리고 있었다. 심지어 그들은 참탑 내부에까지 들어가서 원형 그대로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관광객이 있거나 말거나, 사진을 찍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종교적 제의는 이어지고 있었다. 참탑을 단순히 유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참탑 내부에서도 행해지는 종교의식
▲ 베트남 여인의 기도 참탑 내부에서도 행해지는 종교의식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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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탑을 올려다보며 만선을 기도했을 마을
▲ 나짱의 작은 어촌 첨탑을 올려다보며 만선을 기도했을 마을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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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만큼 베트남의 문화재 관리가 소홀한 것일까? 어쩌면 참탑이 지금처럼 온전하게 보전될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참탑이 이와 같은 종교적 맥락을 간직했기 때문에 가능했는지 모른다. 집이란 건축물은 사람이 살아야 제대로 보전되듯이, 종교적 건축물 역시 그 본연의 역할을 수행해야 원래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탑이 유적으로서만 보전되었다면 과연 지금 같은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물론 그 겉모습은 보전되었을 테지만 그것은 죽은 화석으로서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감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지금의 참탑을 존재케 하는 이들은 그 밑에서 오랜 시간 동안 참탑을 보며 만선을 기원했던 나짱의 어민들인 것이다.

나짱 롱선사와 대성당

많은 종교가 혼합된 사찰
▲ 나짱 롱선사 많은 종교가 혼합된 사찰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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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나가 참탑에서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다음으로 간 곳은 롱선사였다. 1889년 창건된 불교 사원이었는데 그 모습부터가 잡다하기 짝이 없었다. 대승불교, 소승불교, 티벳불교, 현지신앙, 도교 등이 모두 롱선사에 모두 녹아 있었던 탓이었다. 하긴 프랑스 식민지 때 지어졌다고 하니, 그 답답한 상황에 당시까지 알려진 좋은 것들은 모두 담으려 하지 않았겠는가.

법당에서 예를 올리고 나와 사찰 뒤 언덕위에 세워진, 롱선사의 랜드 마크 불상을 향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 중턱에 자리한 커다란 와불도 와불이었지만, 무엇보다 나의 시선을 끄는 건 계단 곳곳에 앉아 구걸하는 노인들과 관광객들에게 붙어 조잡한 물건들을 파는 아이들이었다. 개중에는 그 전날 밤 나짱시내에서 내게 엽서를 판다며 3천원에서 천원까지 물건 값을 깎아주던 소녀도 있었다.

얼핏 보아하니 분명 초등교육 대상자인 듯 한데, 이들은 주중에 학교를 다니지 않는 건가? 베트남이 아직까지 사회주의를 고수한다면 분명 교육은 무상이라 선전할 텐데 왜 이들은 이 시간에 이곳에 있는 것일까? 게다가 사회주의에 거지는 웬 말인가. 물론 북한 같은 경우 식량이 모자라 꽃제비까지 있었던 판국이지만 베트남은 어쨌든 제2의 쌀 수출국 아닌가. 그렇다면 이는 결국 시스템의 문제일 터, 그들의 사회주의가 궁금할 뿐이었다.

조금은 유치했던 롱선사의 랜드마크
▲ 롱선사 불상 조금은 유치했던 롱선사의 랜드마크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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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산토리니마을을 떠올린다
▲ 롱선사 언덕에서 바라본 나짱 시내 그리스 산토리니마을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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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도착한 언덕 위의 불상. 안내 책자나 지도에서는 불상이 나짱의 명물이라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지만 별 감흥은 없었다. 무조건 크고 하얗게 지어놓은 폼이 오히려 천박하고 유치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대신 그곳에서는 나짱의 전체적인 모습을 조망할 수 있었는데, 파스텔톤의 건물과 파란바다가 어우러져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날씨가 조금만 맑았어도 그리스의 산토리니마을을 연상했을 듯.

화려한 사찰의 모습
▲ 롱선사 내부 화려한 사찰의 모습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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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선사를 나와 다음 우리가 향한 곳은 나짱 대성당이었다. 아주 오래된 종교인 힌두교 참탑으로부터 출발해 불교 사찰을 거쳐 천주교 성당까지 다다른 우리의 발걸음. 사회주의 국가 베트남에서 종교 성전들을 종류별로 구경한다는 것 자체가 조금은 우스웠지만 어쨌든 그것이 베트남 역사의 궤적 아니겠는가.

정문 옆으로 늘어선 순교자들의 이름 때문일까? 나짱 대성당은 작고 아담했지만 대신 그 힘이 느껴졌다. 어쨌든 사회주의 사회에서 종교가 견딘다는 것이, 그것도 식민 본국 프랑스의 종교인 천주교가 견딘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었겠는가. 물론 공산주의보다는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했던 베트남의 통일이었기에 그 탄압의 강도는 훨씬 약했을 테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성당이 남아있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수많은 성인들의 피로 건립되었을 성당
▲ 나짱 대성당 수많은 성인들의 피로 건립되었을 성당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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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한국군 야전사령부를 찾아서

우리는 성당을 나온 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 야전사령부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유적지야 베트남의 지도에 잘 드러나 있었지만 구 한국군 야전사령부는 표시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껏 가지고 있는 단서라곤 인터넷에서 봤던, 구 야전사령부가 짠홍다우(Tran Hung Dao) 거리에 위치해 있고, 지금은 나짱 사범대학생들의 기숙사라는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현재 사범대학생들의 기숙사라기에 쉽게 찾을 줄 알았건만 그건 나의 착각일 뿐이었다. 현지인들은 영문 'dormitory'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혹여 이해한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위치를 알지 못했다. 게다가 롱선사에서만 해도 흐렸던 날씨는 언제 그랬냐는 듯 햇빛 쨍쨍해졌고 덕분에 아내는 발이 아프다며 조금씩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왜 짠홍다우 거리에는 사람도 별로 없는지.

몇 번의 퇴짜 끝에 들린 어느 레스토랑. 다행히 그들은 조금씩 영어를 할 줄 알았는데, 역시 dormitory는 쉬운 단어가 아닌 듯 했다. 손짓 발짓 다 해가며, 학생의 집이라는 둥 기숙사를 설명했지만 역시 그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지친 마음에 왜 기숙사도 모르냐고 우리말로 혼자 투덜대던 나. 그런데 직원이 깜짝 놀라면서 기숙사라는 발음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다. 잉?

알고 보니 베트남어의 기숙사와 한글의 기숙사가 거의 같은 발음이었다. 비록 그 언어의 모습은 달랐지만 과거 한자에서부터 비롯된 음절이 남아있는 탓이었다. 베트남과 우리가 같은 한자 문화권이라는 사실이 이렇게 실감 날 수가.

구 주월 한국군 야전사령부인가?
▲ 나짱 사범대학교 기숙사 구 주월 한국군 야전사령부인가?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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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렇게 어렵사리 도착한 나짱 사범대학교 기숙사. 그러나 그 기숙사가 구 주월 한국군 야전사령부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본디 가지고 있던 정보의 신빙성도 신빙성이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 겉모습이 많이 변해 어떤 건물이 군대 막사였는지 가늠키가 어려웠다. 들어가면 알 수 있을까 싶어 입장을 시도했지만 경비의 제지로 물러서야했던 나는 대신 멀찌감치 서서 사진만 찍을 뿐이었다.

하긴 그 건물이 진짜 구 한국군 야전사령부인지, 아닌지가 대수겠는가. 중요한 것은 이곳 나짱에 한국군이 주둔했었다는 것과 그 흔적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채 현지 사람들과 함께 숨 쉬고 있다는 사실 아니겠는가. 비록 베트남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혹은 오래된 일이라고 우리의 참전을 잊은 듯 보이지만 한번 당한 역사는 계속해서 어떤 형식으로든 그 후예에게 각인된다는 사실을 우린 기억해야 할 것이다.

(후일담이지만 여행에서 돌아와 나짱 이야기를 꺼내니 한국군 야전사령부에서 근무하셨던 어른이 몇 분 계셨다. 그분들은 당시 야전 사령부를 수많은 야자수 나무와 야간근무 설 때 느꼈던 공포로 기억하셨는데, 우리가 찍은 사진으로는 그 장소를 구분해내지 못하셨다.)

우리는 다시 리조트로 돌아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아내는 계속 나짱에서 휴양을 취하고 싶어 했지만 이미 우리의 다음 관광 코스는 하노이로 정해져 있었다. 그래도 하노이에서 호치민은 한 번 뵈어야지 않겠는가.

자, 다음은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베트남, #나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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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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