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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한주의 중간입니다. 어떻게 잘 지내시나요? 저는 그다지 잘 지내지 않습니다. 환절기가 되면 늘 비염이 도지는데 올해 좀 안좋네요. 이 글을 쓰면서도 콧물을 훌쩍거리고 있습니다. 오늘 질문은 자식에게 잔소리 하는 것 때문에 괴로운 분이시네요. 

 

저같은 경우는 남편한테는 잔소리 안할 수 있습니다. 왜? 어짜피 잔소리 해도 안 들으니까^^ 그런데 자식한테는 잔소리 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도저히 안하고 싶어도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딸을 보면 저절로 말이 술술 튀어나갑니다. 그러니 딸과의 관계가 좋을 리 없습니다. 방학 때는 극에 달합니다. 매일같이 108배를 해도 돌아서서 자식 얼굴을 딱 보면 '이것들이!!!!' 하게 됩니다. 아래 질문하신 어머니도 저 같은 상황인가 봅니다. 어디 저보다 심한지 안 심한지 볼까요?

 

질문

 

아이의 게으른 행동을 보면서 언제까지 잔소리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엄마로서 당연히 아이의 행동을 바로잡아 줘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잔소리를 안 하고 바라만 보려면 저 자신이 참 힘듭니다. 제 잔소리가 그 아이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고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는 제가 답답합니다.

법륜 스님 답변 

 

이런 문제는 꼭 부모 자식 사이에만 있는 일은 아닙니다.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일은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생기는 일입니다. 이때에 보통 사람은 애를 나무랐다가 자신을 나무랐다가 왔다 갔다 하며 고민합니다. 그러나 수행자라면 우선, 잔소리를 하는 것도 잔소리를 안 하는 것도 아이 문제가 아니고 내 문제라고 봐야 합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수행자의 태도이고, 이렇게 안 보는 것은 세간의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잔소리를 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되니까 내 원하는 대로 되라고 잔소리하는 것이고, 잔소리를 안 하는 것은, 내 말을 안 들어 주니까 '에라, 모르겠다. 네 맘대로 해라'고 해서 잔소리를 안 하게 되는 겁니다. 

 

잔소리를 하는 이유는 내 뜻대로 안되기 때문이다.

 

잔소리를 할까 말까 갈등하는 것은 '아이를 위해서 하는 게 좋을까, 안 하는 게 좋을까?'를 고민하는 게 아니지요. 사실은 안 하려니 답답하고, 하려니 애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게 싫고, 그래서 둘 중에 어느 게 더 이로울까 재는 것에 불과합니다. 아이를 위해서 고민하는 게 아니고, 어떻게 하는 게 나한테 더 좋을까 고민하는 것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백화점 앞을 지나가는데 아이가 "엄마, 저 권총 사 줘" 했어요. 그러면 엄마는 안 된다고 거절하지요. 장난감 권총 하나 사 달라는 아이에게 안 된다고 할 때에는, 아이를 위해서 좋지 않다고 판단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아이가 땅바닥에 앉아 울면서 발을 동동 구르고, 고함을 치며 가자고 해도 안 가면, "그래, 그래. 알았다" 하고 사 주는 경우 있지요? 이럴 때 우리는 '너를 위해서 사 준다'라고 생각합니다. 안 사 주려고 한 것도 자식을 위해서 안 사 주는 것이고, 사 주는 것도 자식을 위해서 사 주는 것이라 생각하지요. 이렇게 보는 것은 세속적인 것입니다.

 

안 사 줄 때도 나를 위해서 안 사 주고, 사 줄 때도 나를 위해서 사 준다고 봐야 합니다. 사 달라 할 때 안 사 주는 것은 내가 보기에 안 좋아서 안 사 주는 겁니다. 그런데 아이가 울고불고 해서 사 주는 것은 달래려니까 귀찮기 때문에 사 주는 것입니다. 정말 아이를 위해서 안 사 주려고 했으면 아이가 아무리 울고불고 팔짝 뛰어도 안 사 줘야지요. 아이를 위해서 사 준다면 처음부터 사 줘야지 왜 그렇게 괴롭힌 다음에 사 줍니까?

 

그러니까 나의 문제로 봐야 번뇌가 사라집니다. 아이 문제라고 보는 한 해결책이 안 나옵니다. 남편이 문제가 있어서 같이 살까 말까 하는 것도 내 문제지 남편 문제가 아닙니다. 이렇게 분명하게 입장이 정리될 때 수행자의 자세를 가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이가 공부는 안 하고 컴퓨터 게임만 하니 속이 탑니다." 

 

이럴 때 우리는 '제법(諸法)이 공(空)함'을 봐야 합니다. 그 아이는 다만 그럴 뿐이지요. 컴퓨터 게임을 할 뿐이고, 놀 뿐인데 그걸 보는 내 생각, 내 기준 때문에 분별이 일어나고 화가 일어납니다. 그걸 보고 내가 못 참아서 문제 삼은 것이기 때문에 아이를 야단치는 것은 내가 화를 푸는 방법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에게는 잔소리가 되는 거지요. 이럴 때 잔소리를 안 해야 한다는 것은, 잔소리를 하고 싶지만 참는 거지요.  

 

세속에서는 참는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수행의 관점에서 보면 참는 것은 수행이 아닙니다. 즉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이때 자기를 봐야 합니다. '아이가 저런다고 내가 왜 화가 날까, 아이가 저런다고 내가 왜 괴로울까?' 이렇게 문제의 원인을 살펴야 합니다. 내 의견을, 내 취향을, 내 생각을 고집하기 때문에 답답하고 화가 나고 괴롭고 슬픈 것입니다.

 

그 고집하고 있는 것을 놓아야 합니다. 이걸 '상'이라고 이름하면 상을 버려야 하고, 이게 '아집'이면 아집을 내려놔야 합니다. 이게 '분별'이면 분별을 끊어야 하고, 이게 '집착'이면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가 어떻게 하든 나는 편안해집니다. 이미 화가 났는데 그것을 밖으로 내느냐, 안 내느냐 하는 것은 세속적인 선악의 문제입니다. 밖으로 화를 안 내고 참으면 선이고, 밖으로 화를 내면 악이라는 생각은 세속적인 잣대의 선악입니다. 그건 이미 화가 났을 때 그에 따른 대응일 뿐입니다.  

 

아이가 컴퓨터를 하는데 내가 왜 화가 날까?

 

그러면 수행이란 무엇인가? 화가 왜 일어났느냐를 연구하는 겁니다. '애가 저런다고 내가 왜 화가 날까?' 이것을 돌이켜보는 거지요. 그래서 화가 나지 않게 되는 것이 수행입니다. 화를 안 내는 게 수행이 아니고, 화가 나지 않는 것이 수행입니다. 화가 나지 않으니까 참을 게 없지요.  

 

화가 나거나 화를 낼 때, 그 화가 왜 일어나는지 돌이켜보는 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돌이켜보면 어느덧 사라지지요. 그런데 대부분은 수행을 어떻게 합니까? 화를 낼까 말까? 참을까 말까? 이걸 갖고 수행이 됐느냐, 안 됐느냐 평합니다. 화를 내면 내어서 부작용이 있고, 참으면 참아서 고통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통에서 벗어나는 해탈로 가지 못합니다. 이 화가, 이 고통이 왜 일어나는지 그 본질을 봐야 합니다. 우리가 수행한다는 것은 그게 핵심입니다.  

 

내가 편안해지면 이 세상 모든 것이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러면 여러분들 또 이렇게 묻지요. "저만 편안하면 됩니까? 아이는 어떻게 하고요?" 내가 편안하면 아무 문제도 없어요. 다 내가 불편하기 때문에 자꾸 문제를 삼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게 모두 나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만 편안하면 됩니까?" 하고 묻겠지만, 내가 편안해지면 자연스럽게 아이를 위하는 길이 뭘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때는 내가 지금 미리 이야기 안 해도 저절로 알게 됩니다. 내 의견을 고집해서 말할 때보다 그냥 내 의견을 말할 때 받아들여질 확률이 더 높지요. 또 아이가 안 받아들여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사실은 아이가 안 되는 게 아니라 내가 안 되는 겁니다. 내가 잘못했다는 것은 내가 잔소리를 하는 게 잘못됐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잘하고 잘못한 것이 없는데 있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본래 잘하고 잘못한 것이 없다

 

'나는 잘하고 너는 잘못했다'만 잘못된 게 아니라 '네가 잘하고 내가 잘못했다'는 것도 잘못된 생각이에요. 잘하고 잘못하는 게 없는데 있다고 착각해서 남을 미워한 게 잘못된 거지요. 그 착각에서 벗어나는 게 참회입니다. 그러니까 상대가 뭐라고 할 때, 잔소리를 하면 수행이 안 된 것이고, 잔소리를 안 하면 수행이 된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 문제인데, 내 문제에 내가 어떻게 대응하느냐? 잔소리를 해서 답답함을 푸는 사람도 있고, 그 부작용이 싫어서 참는 걸로 대응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건 다 중생이 대응하는 방법입니다. 잔소리를 많이 하는 사람도 참아 가면서 해요. 참는다는 사람도 가끔 잔소리를 해요. 그러니까 그 비중이 서로 다를 뿐 근본적인 행위는 똑같습니다. 잔소리를 참을 때도, 잔소리를 할 때도 수행자는 늘 자기를 돌아봐야 합니다. 나를 중심에 놓고 사물을 보는 '자기'라는 것이 도사리고 있는 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나'라는 것이 만병의 원인입니다.  

 

저는 매년 방학 때마다 큰 딸과 싸웁니다. 이유는 위 질문하신 분과 비슷합니다. 게으르고, 컴퓨터를 끼고 앉았고, 공부는 안하고, 내 말은 안 듣고... 지난 겨울방학도 별반 다르지 않게 시작할 조짐이 보였습니다. 방학하고 일주일 쯤 대판 한번 붙고 나서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상대에게 바라는 것이 많을 때 싸운다

 

도대체 내가 저 아이와 왜 싸울까. 스님 말씀대로 저는 아이한테 바라는 것이 많았습니다. 적어도 이 정도는 '네가 해야 하는 것 아니냐', 는 기준을 들이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매일 싸울 밖에요. 그걸 안 순간부터 딱 바라는 마음을 내려놓았습니다. 

 

침대에서 뒹굴고 안 나와도 '피곤한가보다', 밥을 제 때 안 먹어도 '배가 안 고픈가보다', 컴퓨터를 하루 종일 하면 '오늘 컴퓨터 쓸 일이 많은 날인가 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제가 그런다고 아이가 제 때 일어나고, 밥을 잘 먹고, 컴퓨터를 적게 하는 이상적인 모습은 보여주지 않았지만 제 마음이 한결 가벼웠습니다. 엄마가 시비하는 마음을 없애니 딸과 지내는 방학이 괴롭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편이 오히려 게으른 딸을 보고 파르르 넘어갔다는 거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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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정토회, #법륜스님, #즉문즉설, #무엇이든 물어라, #스님 마음이 답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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