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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제비꽃. 아주 작아 보지 못한 채 그냥 지나치기 쉬운 꽃이다.
 남산제비꽃. 아주 작아 보지 못한 채 그냥 지나치기 쉬운 꽃이다.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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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비운다는 건 천천히 걷는 것

새벽이면 앞산(423.6m)을 오른다. 비가 내리거나 눈이 내리거나 거의 개의치 않는다.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내게 산은 배냇시절부터 친구였는지 모른다. 날마다 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내리면서 땔감을 해야 했던 어린 나무꾼 시절엔 머루나 정금나무·명감나무 등 온갖 새콤달콤한 열매를 따 먹을 수 있어 산이 좋았고 나이가 들어서는 산봉우리에 올라 눈 아래로 펼쳐지는 아득한 풍경을 바라보는 게 좋았다.

시론·이미지론으로 유명한 바슐라르는 이렇게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가리켜 지배자적인 시선이라고 했다. 그러나 내겐 그런 식의 우월감 따윈 없다. 산 위에서 산 아래를 바라보는 일은 내겐 일종의 백일몽 (白日夢)을 꾸는 일이다. 그리고 그 백일몽은 황폐한 삶을 견디는 묘약이다. 저 멀리 떨어진 인간의 마을이 매우 몽롱하고 비현실적인 세계로 다가올 때 문득 가슴속 응어리가 씻겨져 나가는 듯한 느낌에 젖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껏 늘어놓은 허튼소리에도 불구하고 내 등산 실력은 여태 초보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몇 달 전에, 내 등산 역사에 획을 그을 만한 일이 일어났다. 오랜 숙원이던 축지법을 익힌 것이다. 사실 내가 익힌 축지법이란 별 게 아니다. 단지 보폭만 예전의 절반으로 줄였을 뿐이다. 보폭을 줄이고나선 아무리 가파른 등산로를 오를 때도 거의 숨이 가쁘지도 않았다. 예전보다 피로도 훨씬 덜했다. 앞산 정상까지 오르는 데 걸리는 시간도 절반가량 앞당겨졌다. 보폭을 줄였는데 오히려 더 빨리 목적지에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음미하면서 걷는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기쁨의 경지

산에서 마음을 비운다는 건 보폭을 줄이고 될수록 천천히 걷는 것이다. 적어도 산에서만큼은 그렇다. 보폭의 크기야말로 그 사람이 가진 욕심과 욕망의 크기이다. 숨이 가쁘지 않으니 훨씬 여유가 생겼다.

자연히 길섶의 크고 작은 식물들이 예전보다 훨씬 눈에 잘 들어온다. '숨은 꽃'이야말로 이 산의 진정한 주인이다. 그 주인들과 눈빛을 주고받으며 산행을 즐기는 것은 손님된 자의 당연한 예의인지 모른다. 이즈음엔 산을 오를 때마다 마음을 비우고 천천히 주변의 풍경을 음미하면서 걷는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기쁨의 경지를 노래한 고은 시인의 시 '그 꽃'이 떠올리곤 한다. 시 '그 꽃'은 짧지만 완벽한 내 산행 교본이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 고은 시 시집 <순간의 꽃> 50쪽 

고은 시인의 시집 <순간의 꽃>은 일종의 선(禪) 시집이다. 시집 속 시들은 제목도 없다. 시편들이 고구마 넌출처럼 죽 이어질 뿐이다. 시로서의 완결성을 강조하기보다는 세상을 순간적으로 느낀 감흥을 적다 보니 그리 되었을 것이다. 당연히 이 시에도 제목이 없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이 시는 '그 꽃'이란 제목으로 통용되고 있다.

시집 표지
 시집 표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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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2006년에 이문재 시인이 중앙일보에 '시가 있는 아침'이라는 시리즈로 소개했던 시편들을 한 권의 시집으로 묶어 펴낸 시선집 <꽃이 져도 너를 잊은 적 없다>(이레 간. 2007.01.29 )에서 편의상 이 시에다 제목을 붙인 것이 시초가 아닌가 싶다. 

이 시의 내용은 간단하다. 그러나 시가 주는 여운은 아주 길다. 왜 나는 좀 전 산에 올라갈 때는 이 꽃을 보지 못 했는가. 꽃이 걸어 다니는 것도 아니고 숨바꼭질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꽃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확고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건만 꽃의 존재를 모른 채 지나친 것은 나라는 무신경한 존재다.

숨 가쁘게 산봉우리만 쳐다보고 올라가느라고, 그저 앞만 보고 올라가느라고 보지 못한 꽃. 너무 작고 하찮아서 제 존재를 확연히 드러내지 못한 꽃의 존재를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놓칠 뻔한 시인의 뉘우치는 심정과 뒤늦은 발견의 기쁨이 시속에 뒤엉켜 있다. 하마터면 '그 꽃이 가진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할 뻔했노라'는 묘한 안도감까지도 함께.

그러나 어디 세상사에 앞서고 뒤섬이 있는가. 만일 시인이 올라갈 때 시선에서 놓치지 않은 채 이 꽃을 바라보았다면 이 시는 결코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시인의 시 쓰기를 위해선 그야말로 전화위복이 아닐 수 없다.  

시 '그 꽃'은 고은 시의 특징인 선적 직관이 빚어낸 시다. 제대로 쓰면 채 한 줄도 되지 않는 이 짧은 시는 우리를 전광석화 같은 깨달음 속으로 이끈다.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데는 수십 혹은 수백 줄의 시구가 필요치 않다. 단 한 줄이면 충분하다. 시의 앞과 뒤에 끌어다 놓을 수도 있었던 많은 말을 버림으로써 오히려 더 많은 것을 說(설)하게 된 셈이다. 순간이야말로 우리들네 생에 주어진 안타까운 꽃이다. 그 꽃을 놓치지 않고 누리려면 부디 단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말지어다. 

발견이 없으면 일상의 구태의연함은 극복되지 않는다

윤재철의 시 '세상에 새로 온 꽃' 역시 발견하는 기쁨을 노래한 시다. 시 '그 꽃'이 어느 한순간 홀연히 다가온 깨침의 세계라면 시 '세상에 새로 온 꽃'은 서서히 다가오는 깨달음의 세계랄까. 
시집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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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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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 며칠 지나 가본
아버지 산소
제절(際節) 바로 앞에
어린 산수유나무
지난번에는 못 보았는데
일 미터가 조금 넘을까
가늘고 여린 가지 위에
대여섯 송이 노란 산수유꽃

꽃을 두고
죽은 사람 그리는 심사도
예전 같지는 않아
태연한데
엊그제인 듯 갓 피어
봄 햇살과 입맞춤하는
꽃만 눈부시다
꽃이 더
눈부시다

- 윤재철 시 '세상에 새로 온 꽃'

1953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윤재철 시인은 내게 김진경·곽재구 등과 더불어 5월 광주를 노래하던 <오월시>동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각인돼 있다.

<이 땅에 태어나서>, <그 산 그 하늘이 그립거든>, <다시는 절망을 노래할 수 없다>, <땅들아 하늘아 많은 사람아> 등 <오월시> 동인들이 낸 동인집들은 억압과 침묵을 뚫고 5월 광주를 노래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 시절 <오월시> 동인집을 읽으면서 얼마나 분노에 치떨었던가. 또한 윤재철 시인은 전교조운동이 일어나기 이미 몇 년 전에 교육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시인이다.

지금까지 <아메리카 들소>, <그래 우리가 만난다면>, <생은 아름다울지라도> 등의 시집을 냈으며 시 '세상에 새로 온 꽃'은 네 번째 시집인 <세상에 새로 온 꽃>에 수록된 시다. 이 시집 속에서 시인은 근원적인 것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문명의 숨겨진 욕망을 노래하고 있다. 

시 '세상에 새로 온 꽃'은 아버지 산소에 성묘차 간 시인이 노란 산수유꽃 대여섯 송이를 발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엊그제인 듯 갓 피어/ 봄 햇살과 입맞춤하는" 꽃이 눈부시다. 소멸이 진행되는 바로 그 옆자리에서 새로운 생명이 생성되고 있다는 건 얼마나 잔인한가.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꽃이 눈부신 것은 '죽은 사람'의 집인 산소 옆이기 때문에 더욱 눈부신 것인지 모른다. 

차마 돌아가신 아버지 곁에서 꽃의 눈부심을 바라보기 미안했던지 시인은 "꽃을 두고/ 죽은 사람 그리는 심사도/ 예전 같지는 않아/ 태연"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새 생명의 눈부심을 느끼는 것과 죽음에 대한 추모는 별개의 것이다. 

왜 옛사람들은 이 계절을 두고 '봄'이라 이름 지었을까. 무언가를 바라보거나 발견하는 계절이라는 뜻이 아닐는지. 비유하자면 봄은 산이며 우리는 그 산을 허위허위 올라가는 등산객이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을 내려갈 때라도 보려면, 엊그제 세상에 새로 온 꽃을 보려면 우리는 늘 긴장하는 정신으로 삶의 풍경을 바라봐야 하리라. 발견이 없으면 일상의 구태의연함 혹은 진부함은 영영 극복될 수 없을지니.  


태그:#꽃 , #고은 , #윤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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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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